#91화
“자주 보니 좋구나.”
진태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온실로 들어온 나를 반겼다.
나는 양손에 들고 온 종이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재심 사장이 준 겁니다.”
“이게 뭔데?”
“천년무강이라고, 공진단입니다. 챙겨 드세요.”
“지금 먹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과하다, 이놈아.”
내가 직접 줬다고 하면 거절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재심의 이름을 팔았다.
천년무강은 사향, 녹용, 당귀, 산수유가 들어간 공진단으로,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고 티베트에서 특별제작으로만 만들어지는 제품이었다.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차실장을 시켜 밑에 사람을 티베트에 보내 갖고 온 귀한 것이다.
지난번 진태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 챙겼는데 오늘은 얼굴색이 좋았다.
“티베트에 사람을 보내서까지 직접 구한 거라고 하니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드세요.”
내가 가져온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는 듯, 진태는 피식 웃으며 옆에 서 있던 구씨에게 건넸다.
“약재 보관하는 데 갖다 놔.”
“예. 회장님.”
구씨가 종이가방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진태 앞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때와 같이 맑고 노란 차였는데, 역시나 이 비리고 씁쓸한 맛이 내 오감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차 이름이 뭡니까?”
“고삼차.”
고삼차는 한약재, 고삼을 물에 끓여 우려낸 차이다.
예능에서 벌칙으로 쓸 정도로 쓴 차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 입맛에는 맞았다.
“이렇게 같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네요.”
진태는 대답 없이 차를 마시며 책을 넘겼다.
예전에는 그런 무심한 모습에 긴장을 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만큼 내가 편하다는 뜻이라는 것을 안다.
나도 서재를 돌아다니며 책을 하나 가지고 와 진태 맞은편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진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기업가치는 한국 거 8천, 미국은 5천 해서 1조 3천으로 맞췄다. 합병은 이번 주 안으로 진행될 게야.”
GB택배가 약 8천억 원, GB로지스틱스가 약 5천억 원이라면 내가 처음 분석했던 금액과 큰 오차는 없었다.
이 금액그대로 간다면 내가 갖게 될 태선택배의 지분은 약 74프로.
합병 날짜까지 잡히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저 배려한답시고 올려치기 한 건 아니죠?”
“네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깨끗하게 하라고 언질해 두었어. 양지든, 음지든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하는 놈들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을 게야.”
다른 사람들이야 몇 푼의 이득을 위해서 가치 올려치기나 투자 제한 등의 방법으로 합병비율을 올리려고 하겠지만, 나는 굳이 책잡힐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신경 써 주신 거 압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알면 됐다. 그리고 오늘 태선반도체 시찰하는 데 따라오거라. 너도 대주주 아니냐.”
“알겠습니다.”
“재만이랑 범준이도 같이 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
진태가 태선 그룹의 모든 계열사들을 정기적으로 시찰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정기적인 행사일 것이다.
나 역시 태선반도체의 지분을 20프로나 보유한 대주주로서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진태가 직접 시찰에 나서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이니, 이참에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나저나 재만과 범준의 동행이라니.
태선반도체가 태선전자의 자회사다 보니 재만은 그렇다 치고 범준이 동행하는 연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백부님과 범준이 형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할 텐데요.”
“그래서 신경이 쓰여?”
“설마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진태는 싱겁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둘의 동행이 거슬릴 뿐이지, 내가 그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불편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겠지.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안주하지 말고. 왕이 되었으면 정벌에 나서기 전에 내실부터 단단히 해야 되는 법이다. 태선택배도 마찬가지야. 지분 대부분을 네가 갖고 있으니 틈틈이 신경 쓰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태선택배까지 내 손에 들어옴으로써 태선에 또 한 발짝 다가갔다.
이제 투자를 넘어서 태선을 차지하기 위한 경영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진태의 운전기사는 경호원들이 탄 차를 몰았고, 나와 진태는 채규가 직접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회장님께서 손주 분과 같이 차에 탄 것은 처음 아닙니까?”
“그래서 채규, 너한테 운전해달라 한 거 아니냐. 차에 세 명 넘게 태우는 건 영 숨이 막혀서 말이지.”
옆을 돌아보자 진태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제분들도 어릴 때는 자주 탔었는데 어느 순간 빈도가 많이 줄었습니다.”
“자식들도 손에 꼽지. 헌데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소용이었나 싶다.”
자식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거리를 두었던 진태.
이제 황혼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런 방식에 대해서 조금은 회한을 느끼는 걸까.
한참 달려가는데 채규가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회장님. 전에 강빈 군과 있을 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하셨습니까? 천회장님 관련해서 말입니다.”
“무슨… 아, 그렇지.”
진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너 만나는 여자 있냐?”
“예?”
나는 어느 때보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뜬금없이 여자 얘기라니.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냐. 너 때문에 광고 먹여 막았던 기사들만 생각해도 아직도 가끔 골이 아파.”
“과거의 일입니다. 사업 관련 제외하고 여자 손 한 번 잡지 않은지 벌써 5년째입니다.”
진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예나라고 알고 있지? 신문에도 몇 번 난 천회장 막내 손녀.”
신문은 국내 신문사들과, 해외 경제지까지 매일 같이 읽었다.
그중 예나를 본 것은 워싱턴포스트에서 발간한 경제지였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실력이나 알맹이만 추린 내용이 인상 깊어서 기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천일그룹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신문에는 왜 났답니까?”
“얼굴이 참 곱다더구나.”
“....”
진태도 말을 하고 머쓱해졌는지 잠깐 정적이 흘렀다.
“천일에서 난 손주들 다 포함해서 학벌이 제일 좋아. 인물도 낫고. 강빈이 네가 대학교 중퇴하고 간판이 없지 않느냐.”
“그런 거 없이도 잘살고 있는 거 아시잖습니까.”
서강빈은 미국에 이름 모를 대학교에 돈을 주고 다니다가 중퇴했었다.
전생에서는 한국대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대학 간판에 집착했지만, 태선가에 태어난 이후로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대학 간판보다 재벌 간판이 일을 진행하는데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잠깐씩만 다녀서 졸업장만 딴다고 해도, 나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제가 좋은 학교 안 나왔다고 해서 누가 무시할 것 같습니까? 제 밑에서 부리는 사람들 다 한국대 아니면 아이비리그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나보기나 하라는 얘기야. 그게 그리 힘들더냐?”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알겠습니다.”
흔쾌히 수락하는 나에게 진태가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지만 한 번쯤 저녁 식사라도 하고 오면 될 터.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게다가 경제지의 칼럼니스트라면,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기업가들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 잡으마.”
진태가 씨익 웃었다.
태선반도체 사옥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입구 양쪽으로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단체로 허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를 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거대한 기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진태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대로 지나쳤다.
맨 앞줄에는 재만, 범준과 오치동 사장이 서 있었다.
진태가 지나치자 그들이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붙었다.
이어서 임원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의 뒤를 따랐다.
재만이 나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회장님과 같이 온 거냐?”
“네. 택배 합병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바로 왔습니다.”
“알았다. 적당히 살펴보다 가거라.”
재만도 내가 최대 주주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기에 노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재만은 고개를 젓고는 진태의 옆으로 붙었다.
이런 태도가 재만과 범준의 가장 다른 모습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건들면 얼굴이 붉어지며 노발대발하는 범준과 달리 재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
이번에 태선택배와의 합병을 통해서 태선그룹 안의 총 지분이 늘었다지만 아직 재만을 따라잡기엔 멀었다.
공매도에 묶인 내 자산들을 다 합친다면 재만을 넘어설지도 모르지만, 원한다고 해서 태선가의 지분들을 사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 치동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서 대표님이 QL반도체 인수하는 데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내다보지 못한 것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과찬입니다. 그보다 너무 늦게 인사드렸네요.”
“제가 먼저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자주 뵈면 좋겠네요. 태선반도체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큽니다. 아무리 QL이 개발해낸 기술이 좋더라도 이렇게까지 빨리 한국을 차지하고 세계까지 나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오사장님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죠.”
나와 치동이 담소를 나누자 범준이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서강빈. 너 형한테는 인사 안 하냐?”
“아, 범준이 형.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여기에는 어쩐 일이야?”
내 말에 범준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순수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뭐가 궁금한 거야?”
“나야 자사주를 빼면 최대 주주고, 백부님은 당연히 오시는 건데. 형은 이유가 있나 해서.”
“이 새끼가. 아버지 하시는 일 보려고 온 것도 안 되냐? 미리 경영수업을 받아야 나중에 도움이 될 거 아니야.”
“참관 역할이었구나. 좋은 수업이 되길 바라.”
“너…!”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려다가 범준이 제일 싫어할 말을 던졌다.
“형, 나는 형이 진심으로 잘 됐으면 좋겠어.”
동정.
“나랑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말이야. 나는 한 번도 형과 경쟁한다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
경쟁도 안 되는 새끼.
범준의 주변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소리쳤다.
“뭐? 이 새끼가! 감히 형한테!”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 뜨고 있는 범준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 걸어갔다.
범준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그래야 짓밟을 때의 쾌감이 더 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