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진태의 무게가 실린 눈빛을 본 재만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참고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강빈이가 돈이 많은 것과 저희 태선그룹의 지분을 가져가는 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게다가 태선택배라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투자가 많이 들어간 곳 아닙니까. 공들여 키운 암소를 막내한테 주시겠다는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진태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채규야.”
“태선택배와 GB택배의 합병은 지극히 순수한 이득에만 입각해 진행하는 일입니다.”
채규가 일어나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들고 이어서 말했다.
“현재 택배시장에서 태선택배가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은 31퍼센트. GB택배가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은 49퍼센트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태선택배의 점유율은 22퍼센트, GB택배의 점유율은 59퍼센트입니다. 작년에 비해 GB택배의 점유율이 떨어진 이유로는, 택배시장의 파이가 커진 이유도 있겠지만 경쟁사들의 성장이 주된 요인입니다.”
영만이 손을 들자 진태가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태선택배의 점유율은 늘고 GB택배는 떨어졌는데 굳이 합병할 이유가 있습니까?”
“점유율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이미지를 구축하기 이전 태선택배의 점유율은 작년보다 낮은 19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행사 이후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와 투자 유치를 통해 주가가 크게 올랐던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채규가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고 이어서 말했다.
“그런 해외시장에 대한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합병하는 곳이 GB로지스틱스입니다. 다들 집에 픽앤픽 용기를 하나쯤 갖고 계시죠?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열풍을 불고 있는 픽앤픽과 독점계약한 곳이 GB로지스틱스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한텐 익숙하지 않은 해외 유명기업들과의 계약도 되어있죠. 합병한다면 이 모든 계약을 전부 태선으로 갖고 오는 겁니다. 더 의의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영만이 입을 다물었다.
인수합병 팀이 얼마나 정밀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영만, 정순과 같은 진태의 친자식들에게도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쉬운 설명으로 납득시키는 채규도 대단했다.
그때, 범준이 손을 들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서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슨 변화가 있던 모양인지 표정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럼 GB로지스틱스만 갖고 오면 될 것 아닙니까. 해외와 교류할 활로를 열고 그쪽에 초점을 맞춘다면 굳이 GB택배도 필요할까요? 이실장님이 말하신 점유율은 국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태선은 좀 더 멀리 볼 필요가 있어요.”
허점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범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채규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GB택배와 합병하는 것은 자본투입에 따른 성장기대치 때문입니다. 택배의 경우 현재 공급보다 수요가 높은 상황인 건 아실 겁니다. 기존 3일 걸리던 배송 기간이 지금은 4일, 길게는 5일까지 지연되고 있습니다. GB와 태선을 합친 택배사는 어떨까요? 전국에 흩어진 물류센터와 미들센터를 하나의 기업으로 획일화한다면 시간과 수익을 지금보다 훨씬 효율성 있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아까 말했던 GB택배와 태선택배의 점유율을 단순하게 합치면 80퍼센트지만 저희 인수합병 팀의 분석으로는 합병 이후 시장 점유율 90퍼센트 이상을 점치고 있습니다.”
범준은 무언가 따져보기라도 하려는 듯 입을 꿈틀거렸지만 떼지는 않았다.
움켜쥔 주먹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채규를 향해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활활 불타오르던 범준의 눈빛은 어느새 식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국내 시장 안에서의 독과점을 위한 GB택배와의 합병,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GB로지스틱스와의 합병까지 근거가 충분했다.
“더 할 말 있는 놈 있으면 말해봐. 그리고 서재만 사장아.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내가 공들여 키운 암소를 잡아다가 먹은 건 너 아니냐?”
재만은 더 이상의 말은 오히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은 듯 침묵했다.
태선전자를 물려받은 재만이 고작 택배사 하나를 나에게 주겠다고 트집 잡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심지어 내가 키우고 내가 투자한 만큼의 지분만을 갖고 가겠다는데 말이다.
이런 내 속을 진태가 대변하듯 말했다.
“애초에 택배 사업을 한국에 갖고 온 게 강빈이었다. 길가다가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택배하면 어디가 떠오르냐고. 택배하면 GB라는 공식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리고 네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태선택배의 지분은 강빈이한테 먼지 한 톨 안 넘겼어.”
1 대 2.86의 비율로 합병을 진행하면서 생길 70프로 이상의 지분은 순전히 내 자산만으로 이룬 성과였다.
혹시나 다른 말이 생길까 봐 비율 산정부터 시작해서 건덕지를 줄 만한 건 모두 깔끔하게 처리했다.
투자금에 목마르던 예전이야 모르겠지만, 지금은 돈이야 차고 넘치니 그깟 지분 조금 더 얻겠다고 더러운 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때 준만이 손을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도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태선물산을 맡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은 모양인데, 괜히 일을 그르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서재만 사장님께 외람되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서범준 사장이 물려받은 태선식품의 기업가치와 이제 합병할 태선택배의 기업가치가 비슷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범준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물려받은 것을 서강빈 사장은 제힘으로 얻겠다는데 뭐가 잘못된 겁니까?”
준만은 공손한 말투를 쓰면서도 공격적으로 말했다.
지킬 것은 지키면서 대놓고 시위하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재만은 준만과 나를 번갈아 보며 씹어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진태는 달라진 준만을 보며 피식 웃고는 재만에게 시선을 돌려 차갑게 말했다.
“더 할 말 있는 놈 있으면 지금 말해라. 나중 가서 뒷말 나오게 하지 말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진태가 이어서 말했다.
“태선택배 사장은 정했어?”
“기존 나재심 사장으로 유지하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그래. 나재심이가 그쪽 방면은 아주 전문가야. 잘 결정했다.”
재심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를 향한 건지, 진태를 향한 건지 방향이 애매했지만 그의 심정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진태의 질문으로 알 수 있듯이, 이번 태선택배의 사장을 최종결정한 것은 진태가 아니라 나였다.
재만조차 태선전자의 자회사 사장을 마음대로 앉히지 못했다.
태선택배가 규모가 크진 않지만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태의 말에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알고 있는 듯, 진태가 말을 덧붙였다.
“강빈이가 직접 사장 붙이는 거에 불만 있으면 너네들도 너네 힘만으로 지분 50프로 넘겨라. 그때가 되면 나도 별말 안 하마.”
몇몇은 납득한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몇몇은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준만은 나를 자랑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더 남은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진태는 앞에 놓인 정글 모자를 쓰고 휘적휘적 이사회실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십시오!”
이번에도 다 같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재심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한층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보다 이제 대표라는 직함이 사라졌네요.”
GB택배가 합병을 진행하게 되면서 나를 지칭하는 직급이 애매해졌다.
사장한테 본부장으로 부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계속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나사장님 편한 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대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가볍게 묵례를 하고 이사회실을 빠져나오자 준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니다. 나도 말을 뱉으면서 속이 시원하더구나.”
집안에서 천대받던 준만.
어느새 태선물산이라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사장 자리를 맡게 되다니.
전생에서는 내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태선가에서 잊혀진 인물이었지만, 이젠 어엿한 기업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괜히 뿌듯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참아왔던 것들. 다 토해내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오늘 정말 듬직했습니다.”
“하하. 그래야겠어. 이제 곧 해가 지겠네. 집에서 저녁 어떠냐. 네 엄마가 이번에도 굴비를 공수해 오셨단다.”
“저야 너무 좋죠. 같이 가실까요?”
“그러자. 잠시만.”
준만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장들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지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때로는 온화한 표정을 짓다가도 때론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격려라도 하는 듯 사장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돌아왔다.
“이제 가자.”
“아버지. 정말 달라지셨네요”
“그래서 싫으냐?”
히죽 웃으며 말하는 준만을 따라 나도 웃으며 말했다.
“좋다는 말입니다.”
준만이 내 어깨를 와락 감싸며 같이 걸었다.
대기하고 있던 임기사는 바로 퇴근시키고 준만의 차를 같이 탔다.
막상 둘이 남게 되자 둘 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준만이야 원체 과묵한 성격이었고, 나는 아버지란 사람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깨진 것은 집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는 영혜 덕분이었다.
“어머, 둘이 같이 왔네요?”
“임원 회의 마치고 같이 들어왔지. 당신이 오늘 저녁 식사 같이하면 좋겠다며.”
“강빈이가 워낙 바쁘니까 기대는 안 했죠. 호호.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일이래요?”
“강빈이가 경영하는 GB택배를 태선택배와 합병하기로 했대.”
“뭐라고요?”
영혜는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미 억만장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 정도도 충분히 놀랄 만하긴 했다.
멋쩍게 머리를 긁고 있다가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너는 미리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왜 언질도 안 해줘.”
“하하.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어머, 얘 좀 봐라. 우리가 남이니? 가족이지.”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말씀드릴게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굴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영빈도 집 안에 있었는지 방에서 나와서 인사했다.
“왔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너랑 같은 집에서 사는 줄도 모르겠어.”
“형이 너무 늦게 일어나니까 그렇지. 나는 새벽에 집에서 나오고.”
정확히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아주머니가 미리 다려 놓은 정장을 입고 나가는 것이 내 루틴이었다.
아주머니가 다려 놓는다는 것만 빼면 강현재 시절부터 지속해온, 그러니까 30년이 넘은 전통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하루가 삐걱거렸다.
“아무튼 너는 가끔 보면 기계 같을 때가 있어. 사람이 쉴 줄도 알아야지.”
영빈의 말에 즐겁게 웃었다.
식탁에 모여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영락없는 내 가족들이었다.
이득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