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나이스 샷!”
두완이 진태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뭐가 나이스야. 나이스는. 똥볼이구만. 에잇. 뭐 하고 있어. 다른 거 가져와!”
진태가 드라이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캐디가 빠르게 달려와 다른 드라이버를 손에 쥐여주었다.
두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나이 먹고 저 거리를 날리는 게 나이스지. 서회장 체력은 여전하구만. 나는 이제 허리도 잘 안 돌아가.”
말과 다르게 몸을 비트는 두완은 아직까지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완을 바라보다가 진태는 다시 드라이버를 손에 쥐었다.
캐디가 서둘러 마커를 잔디에 꽂고 공을 올려놓았다.
진태가 자세를 잡았다가 풀며 말했다.
“그것보다 갑자기 무슨 골프야? 마지막으로 치고 나서 강산이 변했어.”
“나이가 다 차니까 이제는 정이 고픈 모양이야. 어제 아침에 눈을 뜨니까 문득 자네 생각이 나지 뭔가.”
“자네는 원래 정이 많았어.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을 꺼내.”
두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에 강빈이한테 만나는 여자가 있냐고 슬쩍 물었네.”
진태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는 다시 채를 휘둘렀다.
“꺄악!
채가 마커와 잔디 사이를 치며 흙이 튀자 젊은 캐디가 짧은 비명 소리를 질렀다.
진태가 짜증을 내며 드라이버를 내려놓았다.
“쯧. 오늘 왜 이래? 날이 흐려서 그런가.”
“서회장. 왜 모르는 척해? 궁금하지도 않아?”
“...뭐가 있어서 그래?”
진태가 넌지시 묻자 두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없어서 문제지.”
“없는 게 왜 문제야? 있어서 문제 생긴 놈들이 수두룩인데.”
“강빈이 하는 걸 보면 이상한 거 느낀 거 없어? 서른도 안 됐는데 하는 행동이며, 말이며 나이 쉰은 먹은 것 같더만.”
진태도 강빈을 보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긴 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라면 환장하고 달려들어서 문제 생기던 놈이 이미 세상 다 살아본 것처럼 굴었으니까.
한창 힘이 솟을 나이이긴 하지만 강빈의 말처럼 일에 집중하려고 절욕하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두완의 말을 들어보니 이상하긴 했다.
“몰래 만나는 애가 있을지 자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면 한 번씩 풀고 오나 보지.”
“내 그래서 사람을 붙여봤네.”
“뭐야? 이 사람이 지금!”
두완이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한 거야. 자네 경호실장하던 사람이 옆에 착 붙어서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냈네.”
진태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 턱짓했다.
“집, 태선증권사, 거래처, 집.”
“그게 뭔 소리야?”
“강빈이가 매일 반복하는 루트야. 그 녀석 진짜 일밖에 모른다니까?”
“근데 그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야?”
진태가 눈을 흘기자 두완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잘 듣게. 예나 알지? 금쪽같은 내 막내 손녀.”
“자네가 입이 터져라 말해대는데 모를 리가 있나.”
두완의 손녀, 천예나는 특출난 미모로 신문에 실릴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두완이 틈만 나면 자랑을 할 정도로 가장 아끼는 인물.
“예나가 왜… 자네 설마 강빈이한테 붙이려는 게야?”
“안 될 거 뭐 있나? 막내 손녀긴 해도 내가 제일 아끼는 아이야.”
“아끼든, 떠받든 어딜 강빈이한테 비벼? 한국을 뒤집어도 강빈이보다 잘난 놈 없어.”
“알지, 알지. 그래서 예나를 붙이려는 게 아닌가. 사람이 비슷한 급끼리 만나야 잘 되는 거야.”
진태가 드라이버를 캐디에게 넘기고 가려고 하자 두완이 진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벌은 재벌이랑 만나야 된다는 말이야. 강빈이가 사업을 잘하지 연애를 잘하겠어? 갑자기 이상한 여자 데리고 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재벌 중에서 예나만 한 애가 어딨나? 예쁘지, 심성 좋지. 머리는 또 어떻고?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 가서 차석 먹고 온 아이야. 강빈이는 대학을 중퇴했지, 아마?”
“별 같잖은 걸로 책 잡는 거야, 지금? 그리고 쓰댕빠드? 거기서 2등 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강빈이가 갔으면 수석을 먹었을 거야.”
“둘 중 한 명만 이름있는 대학 간판 들고 있으면 된다는 거야. 앞으로 강빈이가 세계에서 뛰어놀 텐데 간판 있으면 오죽 좋아? 거, 미국도 학벌! 동문! 이런 거 많이 본다더만.”
확실히 강빈이 유일하게 흠이 있다면 대학 간판이었다.
그런 것 없어도 충분히 성공했고 흠잡을 사람도 없겠지만 진태는 없어서 아쉬운 게 있다면 가져야 제 성이 풀리는 성정이었다.
게다가 두완의 말도 어느 정도 공감은 갔다.
강빈도 언젠가 짝을 만나 여생을 보낼 텐데 급에 맞는 사람을 붙여줘야 되지 않겠는가.
“그 녀석 성격에 내가 만나보라고 만날 것 같진 않은데 말은 해보겠네.”
“서회장!”
끌어안으려고 팔을 벌리는 두완의 몸을 제지했다.
“그전에 자네 막내 손녀 뒷조사 싹 들어갈 거야. 하나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없던 일로 할 걸세.”
“그, 그래야지. 암. 탈탈 털어봐야 아무것도 안 나올 걸세. 예나가 어떤 아인데.”
두완은 뒷조사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
태선전자의 이사회실로 진태의 자식들을 비롯한 임원들이 모여들었다.
가운데 길고 넓적한 나무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고 침대에 가까울 정도로 푹신한 갈색 가죽의자가 도열해 있었다.
나는 재심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잘 지냅니다. 나사장님은 별일 없었습니까.”
“네. 합병 날짜가 잡힌 것은 들으셨지요?”
GB택배라는, 기존 태선택배보다 큰 기업과 합병한다는 생각에 재심은 부담스러워하는 한편, 기대감이 엿보였다.
“한 달 뒤라고 들었습니다. 준비는 다 끝났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회장님 직속 인수합병팀이 진행하니 물 흐르듯 끝나 있었습니다.”
진태 직속의 인수합병팀이라면 직접 보진 못했지만, 문제 될 것도 어느새 사라져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팀이라고 들었다.
전생에서 태선물산과 태선패션의 합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진행시킨 팀의 근간이 된 게 바로 이 팀이다.
씁쓸한 한편, 문제없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같이 들었다.
재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그럼 오늘 이렇게 모인 것도….”
“네. 태선택배와 GB택배의 합병 때문일 겁니다.”
재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이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일로 임원소집이 열렸기 때문에 부담이 가중된 모양이었다.
“저희는 이제 한솥밥 먹는 식구 아닙니까. 나사장님이 나설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재심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들어오는 임원들은 통보받은 것이 전혀 없는 임원소집에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준만이 태선물산 자회사 사장들과 함께 입장했다.
준만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포함한 임원소집은 늘 나와 관련이 있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준만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준만이 사장들을 거느리고 자리에 앉기까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제는 태선물산 사장 자리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의자가 거의 다 차기 시작하자 재만이 비서를 대동하고 등장했다.
‘서재만, 저 양반은 제 집에서 왜 제일 늦게 오는 거야? 하여튼 주인공병은.’
사장실이라면 이사회실에서 걸어서 1분도 안 걸릴 거리에 있을 텐데, 진태를 제외하고는 가장 늦게 들어온 재만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표출하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나를 쏘아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내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제 사람들과 대화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재만조차 오늘 임원소집이 열린 까닭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 한명이 진태의 입장을 알리자 다들 정숙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채규를 대동한 진태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것이 장관이었다.
다들 정장을 입고 있는 것과 달리, 진태는 골프라도 치고 왔는지 형형색색의 골프웨어를 입고 있는 것이 대비되었다.
터벅터벅 걸어서 중앙으로 간 진태는 정글 모자를 앞에 올려두고 앉았다.
“다들 앉지.”
진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오늘 모인 이유는…”
“강빈이 때문 아닙니까.”
재만이 말을 자르자 진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갑작스럽게 내 이름이 나오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하는데 감히 말을 끊어?”
“임원소집을 할 때 강빈이가 끼어 있으면 늘 강빈이와 관계된 일이었습니다. 반도체 사업도 그랬고, 동만이를 퇴출하고 준만이를 올릴 때도 그랬고요.”
“그래서, 뭐?”
“장남인 저조차 임원소집이 열리면 한걸음에 달려오는데, 막내라는 놈은 틈만 나면 회의에 빠지질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신과 관련된 일에만 참여하니, 오늘 회의 참석한 것만 봐도 누가 관계된 건지 잘 알겠습니다.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재만아.”
“예. 회장님.”
“이유가 뭐든 간에 한 번 더 내 말 끊으면 그땐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서강빈!”
진태가 나를 호명하자 재만과 진태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임원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미국에서 바쁜 거 같아서 그동안 편의를 봐준 건 알고 있지?”
“네. 회장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참여해. 너도 태선 대주주 중 한 명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태선그룹에 달러를 지급하면서 받은 지분과 반도체에 갖고 있는 지분을 갖고 있는 나는 대주주로서 임원소집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진태 말대로 한국 밖의 일이 많았기도 했고, 굳이 갈 필요 없다는 생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태선택배와 합병하게 되면 와야 됐다.
내가 공손하게 말하자 진태가 고개를 끄덕이곤 재만을 쏘아보았다.
“됐냐?”
재만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의 시작도 전에 괜히 딴지를 거는 재만이 얄미웠지만 의도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참여했다면 오늘 회의가 적어도 나와 관여되었다는 것은 알 터, 트집이라도 하나 잡아서 나를 깎아내리려는 것이다.
이미 재만과 가까운 몇몇 임원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선택배가 GB택배와 GB로지스틱스랑 합병하기로 했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말에 나도 놀랄 정도였는데, 아예 정보가 없는 다른 임원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회장님!”
진태의 말을 끊을 때만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재만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리 질렀다.
주변에서 웅성대던 사람들은 재만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진태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재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택배 시장 점유율이 GB택배가 더 높은데 거기에 해외기업까지 합친다니요. 대놓고 강빈이한테 주겠다는 소리….”
재만이 하던 말을 멈추고 진태의 얼굴을 보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차갑게 재만을 노려보는 시선.
자신은 통보하고 아랫사람들은 그저 받아들인다.
이것이 진태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