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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8화 (88/249)

#88화

“아버지. 제가 뭘 그렇게 못했습니까.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이번에 실적도 좋고 저 맡은 거 잘하고 있습니다.”

범준이 발끈하며 재만에게 그동안 쌓여왔던 울분을 터트렸다.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감히 대들어?”

재만이 왜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지 이유는 알고 있었다.

강빈이 아마존닷컴의 지분 매각으로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얻었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이은 사업 성공에 더해서 이제 자산도 재만과 거의 비등하게 되자 재만은 후계 자리에 대한 불안함이 몸에 자리 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 이번 연 매출 식품업계 최초로 1조 원을 넘겼습니다. 영업이익률도 두 자릿수를 넘겼구요. 한심하다느니 쓸모없는 놈이라느니, 그런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범준이 맡고 있는 태선식품은 올해, 대대적인 개편을 진행하며 식품개발팀에 더 힘을 실었다.

5성급 호텔의 셰프들을 대거 영입하며 과도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잠시, 개발해내는 족족 신드롬을 일으키며 식품업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만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얼마 남겼어. 네가 갖고 있는 식품 지분이 50프로를 겨우 넘는다. 서강빈, 그 자식이 이번에 팔았다는 IT주가…”

“아버지. 전자도 이번에 강빈이가 벌어들인 걸 넘어서지 못했잖습니까.”

“네가 감히 말을 끊어?”

진태를 연상시키는 말을 들으며 범준은 신물이 났다.

밤을 지새우며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는 직원들을 들볶고 매일같이 회의를 진행하며 머리는 과부화 상태였다.

업계 사상 최초로 연매출 1조 원을 달성하며 어떻게든 인정받기 위한 발버둥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강빈과 자신의 비교뿐이었다.

“대체 저보고 뭘 하라는 겁니까. 강빈이처럼 어딘가에 투자를 할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파서 사업이라도 해야 됩니까?”

“뭐라도! 좀!”

범준은 가만히 서서 망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끈 쥔 양 주먹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재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못난 놈에게 기대했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됐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빌어야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갈 것 같으냐.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못 느꼈어?”

갖고 있는 권력 때문에 진태 앞에만 서면 벌벌 떨어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진태는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가고 있었다.

“늙은 호랑이가 말없이 퇴장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는 건 가장 힘 있는 놈이 아니라 가장 인정받는 호랑이다.”

“설마 할아버지를…?”

“멍청한 새끼야. 건드렸다가 잘못돼서 나가리될 일 있냐? 지금 갖고 있는 것만 지켜도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소리야.”

“...알겠습니다.”

한숨을 깊게 내뱉은 재만이 이어서 말했다.

“혹시나 하는 건데 동만이처럼 헛짓거리하지 마라. 그때는 나도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제 기대도 안 할 테니 그냥 잠자코 살아.”

범준이 말없이 허리를 숙이고 방에서 나왔다.

손톱이 파고들어 배어 나온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

“제가 구상한 사업안입니다.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태선택배의 나재심 사장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육안으로 볼 때는 40대 중반 정도로 태선계열사의 사장치고 꽤나 젊었다.

긴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지금 자리에 대한 불안함에서 온 모양이었다.

태선택배와 GB택배가 합병할 경우 내 지분은 70프로가 넘는다.

실권을 내가 잡고 있으니 진태의 지시로 편안하게 사장 자리에 앉아 있던 재심은 발에 불똥이 떨어졌을 것이다.

“나사장님.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경영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하하. 회장님 앞에 설 때만큼 긴장됩니다. 대표님께서 제 앞날을 결정하실 수 있으니까요.”

재심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재심의 말대로 그를 계속 사장 자리에 앉힐지, 내릴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를 내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을 깐깐하게 보고 쓰는 진태가 일머리가 있다고 할 정도로 재심은 유능한 사람일 것이다.

서류를 읽을수록 그 예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좋은데요? 특히 무인택배함은 당장이라도 시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인택배함을 서울시 곳곳에 만들어 직접 주소지로 찾아가는 인건비를 줄이고, 배송 기간을 짧게 만들자는 제안서에는 감탄사가 나왔다.

나야, 전생의 삶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5년도 더 뒤에야 생길 일인데 벌써부터 생각해내다니.

그 외에도 택배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나보다 훨씬 높았다.

“더 볼 필요도 없겠습니다. GB택배와 합병 이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심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대표님께 충성하겠습니다.”

아부를 좋아하진 않지만, 일 잘하는 사람이 아부하니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하하. 믿고 있겠습니다. 그럼 일 보러 가세요. 합병 진행하면서 바쁘실 거 아닙니까.”

“네. 알겠습니다.”

재심이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조사했던 기업가치에 더해 채규가 부리고 있는 인수합병 팀이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택배산업에 대해서 좀 더 이해시키고 대화를 나눠보기 위해 약속 시간을 길게 잡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시간이 떴다.

다음 사업을 구상하며 볼펜을 달그락거리고 있는데 비서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황비서의 정갈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일제약의 최회장님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특허 출원까지 끝났나 보네.”

5년 전 투자했던 에이즈 신약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특허권 기간이 끝나기까지 매년 최소 수백억 원, 많게는 천억 원의 수익이 내 손에 들어온다.

“지금 시간 괜찮은지 여쭤봐. 시간 비어있을 때 해결해야지.”

“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최회장님이 언제든지 괜찮으니 얼굴만 비춰달라고 합니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해. 임기사 대기하라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영일제약에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온다고 미리 언질을 해둔 모양이었다.

“서강빈 대표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시간이 꽤 흘렀지만 건물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찾아가는 길은 간단했다.

부규의 방은 전에 왔을 때와 변함없이 여전히 검소했다.

거의 5년 만에 본 부규는 눈에 띄게 약소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놀러 온다더니 이제야 왔구만. 그래도 반갑네.”

“하하.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시간이 도저히 안 나더군요.”

“이해하네. 세간이 자네 얘기로 아주 떠들썩하지 않은가. 우선 앉게.”

부규가 힘에 겨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자를 받았다고 해도 임상시험 자체가 긴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미 노년을 보내고 있던 부규가 밤을 지새워 가면서 만들었던 에이즈 치료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했는가를 노쇠해진 몸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장님의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겁니다.”

“구원이라니. 거창한 말 쓰지 말게. 내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야.”

부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처음 한방으로 에이즈를 치료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네. 서방 의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 사람들은 그때 했던 말들을 주워 담고 싶을 겁니다. 한국에서, 그것도 한방으로 치료제를 만들어내셨으니까요.”

“그 사람들을 욕하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어. 5년 전,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4년을 임상시험에만 매진하고 있었네. 최종 승인은커녕 2상을 성공할 수나 있을지, 나조차 그때는 확신이 없었네.”

부규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투자자가 덜컥 나타나 6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야. 우리에겐 아무런 리스크도 주지 않고 말이지. 투자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위약금 한 푼 청구하지 않겠다는 곳은 없었네. 세상에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자네 말고 또 어디 있겠나?”

“하하. 저는 의학계는 잘 모릅니다. 최회장님의 한 길만 바라보는 소신. 그것 하나만 보고 투자한 겁니다. 너무 띄워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성공할 것임을 알았고, 돈을 가져다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민 손이었다.

부규는 손익계산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머릿속을 순수한 투자로 포장했다.

진정 박수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부규였다.

“계약 관련 문의가 끊이질 않고 있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텔레마케터를 추가로 채용해야 될 지경이네. 세계특허출원까지 끝나면서 세계적인 제약회사들도 컨택하고 있어.”

“그럴만한 성과를 이루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투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지원해줘서 고맙네. 자네 덕이 커.”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투자금이 있을 때마다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제부터 들어올 수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지만 사람은 어려울 때 고마움을 느낀다고, 부규의 눈빛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돈을 대는 것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끝까지 애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하하.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다더니 겸손한 모습은 여전하구만, 그래. 진태에게도 자네 칭찬을 수도 없이 했어.”

“할아버지와는 요즘도 자주 만나십니까?”

부규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태는 아직도 잘만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내 몸은 예전만 하지 않아. 낚시를 같이 가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어. 1년에 한두 번 얼굴이나 보면서 담소 나누는 게 끝이지.”

“몸 잘 챙기십시오. 영일제약이 이제 빛을 발했는데 더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내 떠나기 전에 우리 치료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지는 보고 가야지. 성공해서 다행이야. 정말….”

그동안 부규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했다.

면역력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치료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방을 통해 독성을 대폭 줄인 치료제는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조만간 할아버지 모시고 좋은 곳에서 식사 대접 하겠습니다.”

“나야 좋은 일이지. 그때 내 아들도 함께 가도 되겠나?”

“아드님이라면… 최수혁 사장님 말하는 겁니까?”

이제 부규는 실질적으로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앞으로 영일제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나도 안면 정도는 트는 것이 좋았다.

“맞네. 자네를 보고 좀 배우라고 하고 싶군. 내 아들놈은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봐. 자네처럼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부는 알아서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부규의 장남으로, 부규의 은퇴 후 영일제약을 이끄는 인물이다.

질병이 아닌 건강식품 쪽으로 초점을 맞추며 온갖 비난을 받겠지만, 경영 능력만큼은 부규보다 뛰어났다.

그나저나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부는 알아서 따라온다니.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돈은 누구보다 가까이 하면서도, 누구보다 멀리하는 듯 보여야 내 손에 들어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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