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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7화 (87/249)

#87화

에릭에게 지시했던 공매도 건은 별 탈 없이 계획대로 되었다고 들었다.

공매도의 만기일까지 앞으로 9개월.

그때가 되면 내 재산은 진태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서 진태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 안의 온실을 열자 짙은 풀 내음이 느껴졌다.

진태는 안쪽 깊은 곳에서 책들을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안경을 한 번 추켜 올리고는 나를 쳐다봤다.

“생각이 끝난 모양이구나.”

“네.”

진태에게 다가가자 진태는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미 내 몫의 찻잔도 놓여있었다.

“차가 다 식었겠어요.”

“10분마다 새로 갈았으니 그럴 일은 없어.”

진태의 말을 듣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사소한 배려였지만, 그걸 베푼 사람이 진태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사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진태를 바라봤다.

진태의 깊어진 주름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 요즘 주름이 깊어지셨습니다. 걱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걱정은 무슨.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게야.”

진태는 먼저 물어볼 생각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GB의 이름을 바꾸려고 합니다.”

진태가 다음 책장을 넘기려던 손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가 가져가 주십시오.”

내 의중을 알아보겠다는 듯 진태의 눈이 나를 훑었다.

그것도 잠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회사가 되겠구나. 영악한 놈.”

“태선을 더 키울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곧장 내 의도를 알아맞힌 진태에게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나는 GB택배를 태선택배에 합병시키면서 태선택배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아직도 태선택배가 네 발밑에 있어. 굳이 지금 할 이유가 뭐냐.”

“GB택배가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예전처럼 혼자 날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태선택배 말고도 다른 경쟁사들도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말 그대로 택배사간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독보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은 기존 강자 GB택배와, 태선의 날개를 달고 이산가족 행사까지 맡으며 이미지 구축에 성공한 태선택배 둘이었다.

“언젠가는 태선의 이름을 달 회사였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을 뿐이죠.”

“해외에 있는 것들은?”

“GB로지스틱스도 태선택배와 같이 가야죠.”

“그것 말고 투자회사 말이다. 그건 어쩔 셈이냐.”

순간 욱하려는 것을 참았다.

기업가치를 떠나서 공매도를 진행하면서 GB인베스트먼트에 묶어놓은 돈만 자그마치 30억 달러다.

그걸 통째로 삼키려고 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투자회사는 제가 갖고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재산이 거기 묶여있기도 하고요.”

“고놈, 표정 한번 살벌하구나. 껄껄.”

진태가 큰 목소리로 웃어대자 그제서야 농담인 것을 깨달았다.

머쓱한 표정으로 진태를 바라보자 진태가 말을 이었다.

“그래. 네 사업에 태선의 이름을 달아주마. 합병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지 말해 보거라.”

“태선택배는 상장법인이고, GB택배와 로지스틱스는 비상장법인인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알다마다.”

진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수합병 팀을 꾸려서 제가 갖고 있는 회사들과 태선택배를 평가한 서류입니다.”

진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176조에 따르면 주권상장법인과 주권비상장법인이 합병할 시, 주권비상장법인은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가중산술평균한 가액을 기준으로 한다.

상장법인인 태선택배의 경우 기준주가가 자산가치보다 높기 때문에 기준주가 그대로 기준을 잡았다.

진태가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이대로 간다면 합병비율이 1대2.86? 이게 맞다면 합병한 태선택배는 네 차지나 마찬가지겠구나.”

“태선그룹의 자본총액은 그만큼 늘어나고요. GB로지스틱스를 통해서 이미 세계로 나아갈 발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태를 늘 자극시켰던 단어, ‘세계’.

그러나 이번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내가 물산을 너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눈치챘을 게다.”

“그렇게 티를 내셨는데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것도 거절하고 제 사업 운영하겠다던 놈이 갑자기 욕심을 내비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생각했던 말들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심호흡을 했다.

“물산을 거절했던 이유는 멈추기 싫어서입니다. 작은 계열사도 아니고 태선에서 제일 큰 기업 중 하나인 물산을 받게 되면 제가 지금처럼 미국을 오갈 수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물산보다 크다는 건 할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그랬지. 네놈 올해 수익이 태선전자를 넘겼었으니까.”

올해 태선전자의 연 매출이 약 13조 원, 순이익이 약 3조 원이었다.

아마존닷컴의 지분 양도만으로 한화로 6조 원이 넘는 수익을 거두었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가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자리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유는, 늘 태선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생각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명목상으로 태선증권사에 소속한 것이었다.

투자할 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준만에게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재산은 충분히 쌓았으니 이제 태선에서 제힘을 키울 차례입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예. 그럴 만한 능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을 뿐입니다.”

내 결연한 표정을 확인한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게다. 네 백부, 숙부, 고모들.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는 제 것 지키기 바쁘다지만, 잘못하면 자기 걸 뺏기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를 드러낼 거다.”

“그래서 힘을 기른 겁니다. 이제 개인 자산만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래.”

진태는 무심해 보이면서도,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갖고 있는 태선택배의 지분을 네게 준다고 하면 받을 게냐.”

“아니요. 저는 제힘으로 차지할 겁니다.”

“너 말고 다른 손주들에게는 지분을 물렸다. 네가 조금 가져간다고 해서 나쁘게 볼 놈은 아무도 없어.”

“이미 태선가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저는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지금껏 해온 대로 제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진태 말대로 태선택배의 지분을 받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분을 받는다면 나도 이미 무언가를 물려받은 것이 되어버린다.

나중에 더 큰 무언가를 받게 될 명분을 위해서라도 고작 택배사 지분에 만족할 수는 없다.

게다가 동만이 지분을 모두 뺏기고 태선가에서 퇴출된 이유가 바로 갖고 있던 모든 지분을 진태에게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태가 즐겨하는 말 중 하나인 ‘빌려준 것이다’라는 말처럼 받은 것은 언제든지 토할 수 있다.

“그 뚝심. 잊지 말거라. 합병은 진행하지.”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로써 기존에 갖고 있던 태선그룹의 지분에 더해 한 계열사를 순수한 내 자본만으로 차지했다.

“경영은 나재심 사장한테 계속 맡기는 것이 좋을 게다. 물류 쪽에서 일했던 놈이라 그런지 그쪽으로 일머리가 있어.”

현재 나재심 사장은 태선택배를 경영하고 있었다.

GB택배가 택배시장에서 독보적이었을 때, 태선택배를 GB택배의 턱 끝까지 따라잡게 만든 주역이었다.

합병 이후에 두 택배사를 주무를 수 있게 된다면 그 경영 능력은 더 빛을 발할 것이다.

“할아버지.”

“할 말이 더 남았어?”

“늘 건강하세요.”

“지금 신파극 찍냐?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가.”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눈가에 깊어진 주름, 힘을 잃고 바스라질 것 같은 흰 머리.

수명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진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얻어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았다.

진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서진태다. 쉽게 안 쓰러지니까 걱정하지 마라.”

서로를 잠깐 응시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

강빈이 나가자마자 진태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회장님!”

강빈이 나가는 것을 보고 들어온 채규가 달려와 진태를 부축했다.

진태는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에 힘이 풀렸다.

그런 와중에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어 알약을 꺼내 삼켰다.

채규는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수술이고 뭐고 당장 들어오라고! 당신 잘리고 싶어?”

“됐다. 이제 괜찮아.”

말과는 다르게 진태는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모습을 본 채규가 목소리를 깔며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아무튼 바로 뛰어와. 1분, 1초가 자네 목줄을 움켜쥔다는 거 잊지 말고.”

통화하는 상대는 한국대학교의 신경과 정교수였다.

한국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인 그를 개인 의사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진태밖에 없을 것이다.

진태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저녁 시간만 되면 이 모양이니 죽을 맛이군.”

“회장님….”

전화를 끊은 채규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진태를 바라봤다.

집안에서 늘 대기하고 있는 상주 의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임교수 불렀으니까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거 다 해놔.”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이탈 체크 시작하겠습니다.”

“뭐 이리 난리를 쳐. 내가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늘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실 때마다 제 가슴이 얼마나 철렁이는지 회장님께선 모르실 겁니다.”

두 손을 쥐고 몸을 떨고 있는 채규를 보며 진태가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십 년간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온 채규는 늘 충성심을 보여왔다.

“태선택배를 GB랑 합병하기로 했어.”

“합병비율 산정 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강빈이가 이미 했더구나.”

진태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서류를 살핀 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빈 군이 한 것이니 확실할 겁니다. 절차 밟겠습니다.”

약을 먹어도 힘이 없던 진태가 사업 얘기로 넘어가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채규는 마음을 달랬다.

태생이 사업가라는 말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괜히 군소리 안 나오게 밟을 거 다 밟아놓고 임원회의 진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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