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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6화 (86/249)

#86화

강빈이 지시했던 대로 자신의 연기가 먹히고 있다는 생각에 에릭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공매도를 진행하려고 하는 기업들은 총 4개로 최근에 팔아치웠던 애플과 아마존닷컴을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퀄컴이었다.

아마존닷컴과 퀄컴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제이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TD은행의 대변인으로 아마존닷컴의 주주총회를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온 이야기가 당신의 보스, 서강빈 대표였어요. 자사주를 제외하면 최대 주주인 그가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진행하려는 공매도까지. 의중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더군요.”

강빈이 손을 대는 투자마다 성공했다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손해 볼 것이 자명한 공매도를 진행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릭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을 말하려고 하는데 타오가 말했다.

“제이슨 씨. 거, 괜히 분위기 흐리지 맙시다. 동양인 투자자가 성공한 것을 가지고 괜히 트집 잡으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얼굴이 붉어진 제이슨이 벌떡 일어났다.

“초 치지 말고 조용히 계약이나 하자는 소리요. TD은행이 우리 루비의 투자 없이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중국 자본에 빨대 꽂아서 성장해놓고 동양인을 깔보지 말라는 말이요.”

직접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를 해주는 타오에게 에릭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타오가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 왜 안색이 안 좋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이슨이 버럭 소리 질렀다.

“들어오기 전에 나눈 대화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자자, 그만합시다. 두 분 대화는 나중에 하시죠.”

해리가 제이슨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리자 그제서야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

에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이슨 씨, 투자 몇 번 성공했다고 해서 대표님이 여러분 같은 월가 사람들보다 더 잘 알겠습니까? 저도 이번에는 대표님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제이슨이 사과까지 하자 타오도 더는 질타하지 않았다.

에릭이 손깍지를 보며 세 명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월급과 인센티브를 받아먹고 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만. 대표님 지시라고 해도 이번 거래의 결과가 좋지 않다면 고스란히 피해를 입어요. 그건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혹시 알아요. IT버블이 터지면서 공매도한 저희가 망할지?”

해리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낄낄대며 웃자 에릭은 속으로 살짝 놀랐지만 일부러 입술을 깨물며 화난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살짝 물었다 생각했는데 피가 살짝 나왔다.

에릭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슥 닦고는 말했다.

“1년. 1년도 안 되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손해의 1프로를 제가 메워야 합니다. 50프로가 상승해서 강제결제를 진행한다면 3000만 달러를 제가 내야 된다는 소립니다.”

자신들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던 에릭이 막대한 리스크를 밝히자 다들 놀란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들이 거래하는 금액은 그 이상일 때도 있었지만, 그런 돈을 보유한 적은 없었다.

제이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1프로를 에릭 씨가 메워야 한다니. 커미션도 그럼…?”

“리스크와 동일합니다. 수익의 1프로죠.”

해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마존 지분을 60억 달러에 팔았다고 들었다.

애초에 100만 달러로 샀던 지분, 60억 달러 전체를 수익이라고 본다면 에릭이 받은 커미션은 무려 6천만 달러였다.

“확실히 그 정도 금액이라면 보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지금 에릭 씨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다들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지자 에릭은 그제서야 본론을 꺼냈다.

“손해 보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 상황. 얼마나 큰 손해를 감당해야 될지 계산해야 하는 게 이제 저의 일이 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제안하겠습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조건으로 공매도를 진행하겠습니다. 단, 공매도에 관련한 이자는 내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날강도 같은 말이야?”

타오가 발끈하며 말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에릭이 타오를 응시하며 말했다.

“조건을 그럼 수정하죠. 저희 회사가 보유한 재산은 50억 달러가 넘습니다. 강제결제 상한선을 50프로에서 60프로로 올리겠습니다. 그럼 괜찮겠습니까?”

만약 60프로까지 주가가 올라간다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 수익이 6억 달러가 늘어난다.

웬만한 수수료보다 괜찮은 숫자였다.

“그럼 괜찮긴 한데…. 그럼 당신한테도 손해가 아니요?”

“손해가 그보단 낮기를 빌어야죠. 아니면 이걸 빌미로 제 리스크를 깎아달라고 하던가요.”

타오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에릭은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이들에게 최종결정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까지 보낸 것 자체가 대변인으로 쓴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럼 증거금 30억 달러 규모의 공매도 계약을 진행하겠습니다. 다들 이의 있으십니까?”

“당장이라도 계약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소.”

“여러분이 보내주신 보유주식들은 모두 검토해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분배입니다.”

에릭이 각자에게 공매도할 주식들과 그에 따른 증거금이 적혀 있는 서류를 내밀었다.

제이슨이 약 10억 달러, 해리가 23억 달러, 그리고 타오가 27억 달러였다.

세 기업 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주식은 아마존닷컴이 유일했다.

“아마존닷컴을 팔아넘긴 지 얼마나 됐다고 공매도를 하다니. 서강빈 대표가 이 공매도로 수익을 얻는다면 정말 타고난 꾼이요. 중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아주 좋아합니다.”

타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이슨과 해리도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 기업들과 연락해 보시고 결정되시면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해리가 대답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하… 저는 손해를 어떻게 메꿀지 생각 좀 하러 가야겠습니다. 다들 편하게 있다가 돌아가세요.”

에릭은 마지막까지 절망적인 포즈를 잊지 않은 채, 축 처진 어깨로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에릭은 참아왔던 웃음을 터트렸다.

강빈이 지시했던 대로,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다.

계약을 진행하러 나온 사람조차 손해 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저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제이슨이 의심하는 듯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타오가 아군이 되어주었다.

강빈의 생각대로 IT기업들의 주가 폭락이 이어진다면 공매도가 끝나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은 50억 달러가 넘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전화기를 집은 에릭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천진했다.

***

제프는 입가에 웃음이 만연한 채로 꿈같은 상상에 잠겨 있었다.

작년, 독일과 영국에 성공적인 진출 이후 급등하던 아마존닷컴의 주가는 최근 확장 및 개편을 통해 끝을 모르고 상승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과 프랑스 진출도 확정된 상황.

차고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보통 전화는 비서실을 통해서 올 텐데 직통으로 올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저 MC파이넌스의 해리입니다.”

“오! 해리 씨. 간만입니다. 지난번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지난번 주총이 열리고 제프는 몇몇 측근들을 데리고 골프를 치러갔었다.

해리와는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지만, 해리가 아마존닷컴을 전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른 것이다.

특별한 일이 생긴다면 연락하라고 직통 번호를 주기는 했으나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서 대표가 아마존닷컴의 주식을 공매도했습니다.”

“뭐라고요?”

제프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서’라는 한국식 성을 가진 대표는 제프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대 주주였던 강빈이 떠나는 것을 넘어 공매도까지 진행했다는 것이 증권가에 알려지면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걸 왜 받아들인 겁니까? 저에게 좋을 것 하나 없는 소식인데요.”

“회사 지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특정한 근거 없이 진행한 거라 생각되니 타격은 없을 겁니다.”

“....”

“아마존닷컴 말고도 퀄컴, 마이크로소프트 등 내로라하는 IT기업들에도 공매도를 진행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쉽지 않을 겁니다.”

해리의 말대로 강빈이 공매도를 했다고 쓰러질 정도로 아마존닷컴은 부실하지 않았다.

강빈이 아마존닷컴을 떠났을 때 일시적이지만 주가가 잠깐 올랐을 정도였으니, 타격이 크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있었다.

강빈은 100만 달러에 샀던 아마존의 주식을 60억 달러에 팔아치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 돈을 고스란히 공매도에 투자했다?

애초에 강빈의 지분 매도는 계획된 일이라는 소리였다.

“계약 당시 강빈 씨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서 대표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GB의 총괄이자 서 대표와 같은 한국 출신의 에릭 장이란 인물이 나왔습니다. 서 대표에게 상당히 반감을 갖고 있더군요.”

“에릭이 강빈 씨한테 반감을요? 그거 확실합니까?”

지분 매도를 위한 협상 때 본 에릭은 강빈에게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인물이 1년도 안 지나서 반감을 표한다는 것은 제프로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네. 한숨까지 푹푹 내쉬더군요. 애초에 30대도 안 되어 보이는 사람을 이런 자리까지 내보냈다는 게 우스웠습니다. ”

“하….”

제프는 해리의 말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미쉘의 친구로서 만났던 에릭은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난기가 넘치고 순수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과, 협상에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협상가의 모습.

그런 에릭이 수십억 달러가 놓인 협상 테이블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만약 강빈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면 더욱 철저하게 행동했을 인물이었다.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한층 더 심각해진 제프의 목소리에 해리도 덩달아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회장님과 직접 상의한 끝에 아마존닷컴에 갖고 있던 9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모두 공매도하기로 했습니다. 증거금은 그의 절반이고요.”

“만기일은요? 그게 중요합니다.”

“내년 9월 7일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존닷컴의 주가가 계약 당시보다 50프로 이상 상승할 시 자동 결제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이 12월 말이었으니 강빈이 내건 만기일까지는 약 9개월 남았다.

그 시기면 일본과 프랑스에 진출을 끝냈을 시점이니, 분명히 기업가치가 상승할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 그리고 TD은행에서도 공매도를 진행했습니다. 제프 회장님이 지분 매수를 위해 이용한 곳이잖아요.”

TD은행은 강빈의 지분을 매수할 때 이용했던 세 은행 중 한 곳이었다.

그런 TD은행이 공매도를 진행할 정도면 아마존닷컴의 성장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분명 모든 상황과 주변은 긍정적이었는데 단 한 사람, 강빈만이 실패를 점쳤다.

한 사람만으로 이렇게까지 불안할 수 있는가.

강빈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수익률로 따지면 십만 퍼센트 이상을 확신합니다.’

그의 말대로 아마존닷컴은 5년 동안 천 배 이상 성장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제프의 표정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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