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프. 기사 보고 알았어. 강빈 씨 지분을 모두 양도받았다며.”
미쉘이 걱정스럽게 제프를 바라봤다.
강빈의 지분을 양도받는 과정에서 거대 은행들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응.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마존을 움직일 수 있어.”
강빈의 지분으로 경영권을 공고히 했다는 생각에 제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프의 말에도 미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닌 거 알잖아. 무려 60억 달러야. 그런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10프로라는 큰 지분을 양도받으면서 심지어 프리미엄까지 지불했다.
그만한 돈을 융자한 은행 입장에서는 어떤 빌미로든 경영권에 손을 대려고 할 것이다.
“아마존은 더 성장할 거야. 그렇게 되면 금리를 두둑이 챙길 은행들도 건들지 못해.”
“그래.”
미쉘은 더 말을 붙여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프는 아마존닷컴을 창업하기 위해서 건실한 기업의 부사장 자리까지 내려놓을 정도로 소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존닷컴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으니 그의 소신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보다 강빈 씨는 왜 주식을 다 양도한 걸까?”
“주주들의 반발이 거세기도 했고 이제 더 이상 아마존이 성장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지. 두고 보라고. 아마존은 무조건 더 성장할 거니까.”
IT주식들이 과도하게 기업공개를 하기 시작하면서 현재 형성된 주가 시장이 불안하다는 예측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강빈은 지금껏 실패해온 적이 없는 투자자다.
그런 강빈이 아마존닷컴을 내쳤다는 것에 미쉘은 불안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자신감 넘치는 제프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는 당신이 늘 해왔던 대로 잘해낼 거라고 믿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 미쉘.”
제프는 앉아 있던 미쉘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
“휴가는 잘 보냈어?”
“네. 대표님. 지금 오하이오에서 돌아가고 있는 길이에요.”
에릭의 목소리에서 나른함이 느껴졌다.
“대표님은 좀 쉬셨어요?”
일주일 동안 형주와 진태를 만난 것 외에 한국에 보유하고 있던 IT관련 주식들을 모두 정리했다.
거기에 미국 IT주 공매도를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굳이 쉬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에릭에게 말해서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잘 쉬었지.”
“뭐하고 쉬었는데요?”
에릭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자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오하이오에서는 뭐 했어?”
“GB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 진행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랑 빙상낚시를 즐기다 왔어요.”
“친해진 사람들?”
“같이 공동으로 투자했던 증권가 사람들도 있고, 투자했던 기업들 사람도 있고요. 제가 휴가를 냈다고 하니까 기꺼이 따라오더라고요.”
에릭의 친화력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월가의 증권맨들과 친분을 계속 유지한다면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 수월할 것이다.
“거기까지 가서 비즈니스하고 온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대표님 따라서 저도 일중독 된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정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순수하게 놀다 왔어요.”
“그래. 앞으로 그 사람들한테 비즈니스해야 될 텐데 잘했어.”
“네?”
수화기 너머로 에릭이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투자해야 될 거야. 아는 증권사들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어디야?”
“같이 낚시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MC파이넌스의 실장이 한 명 있어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니까 규모는 엄청나죠. 그런데 증권사 사람들과 비즈니스라뇨? 개인투자 말고요?”
“금액이 커졌으니까 이제 더 큰물에서 놀아야지. IT거품이 최고로 부풀어 올랐어. 공매도 형식의 투자를 할 거야.”
“규모는요?”
“최소 30억 달러.”
30억 달러면 한화 약 3조 6천억 원.
아마존 지분을 판 돈에 절반 가까이 되는 돈을 공매도에 투자한다는 말에 에릭의 벙찐 표정이 떠올랐다.
“공매도는 전부 다 잃을 수도 있는 거 아시죠? 차라리 풋옵션을 걸죠.”
하락장에 걸겠다는 것은 이미 받아들였는지 묻지도 않았다.
“IT버블이 꺼질 것을 예상한 건 우리뿐만은 아니야. 다들 확신이 없을 뿐이지. 30억 달러 규모의 풋옵션을 받아들일 곳은 없을 거야.”
“어디까지 하락장이 이어질지도 예상하긴 힘들죠. 그래서 공매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 조건이 일반적이진 않으니까. MC파이넌스 말고도 접촉할 수 있는 증권사들은 전부 다 미팅 잡아. 만기는 내년 9월로 잡고.”
“내년 이래봤자 한 달도 안 남았잖아요. 이제 곧이네요. 휴가 끝나고 눈코 뜰 새 없다더니 진짜였어요.”
말과는 다르게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게 즐거운지 에릭의 목소리가 밝았다.
하긴 에릭에게는 커미션이 따라오니 자신의 일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주일이면 잘 쉬다 왔잖아?”
“그렇긴 하죠. 첫 휴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앞으로도 몇 년에 한 번씩 이렇게 놀러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그래. 다음에 나랑 같이 가지. 너만 불편하지 않다면.”
“정말요? 저야 그럼 좋죠! 와이키키를 꼭 한번 가고 싶었는데 거기로 가요.”
상사와 같이 가는 여행을 반기는 사람이 어디 있나 했는데 에릭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목소리에 나도 즐거웠다.
“그렇게 하지.”
“좋네요. 일 얘기 마무리하자면 저희가 내걸 조건이 일반적이진 않으니까 최소한의 증거금으로 최대한 많이 뽑아내라는 거죠?”
“정확해. 공매도할 기업들과 자세한 투자방식은 메일로 보낼게.”
“알겠어요. 시애틀로 돌아가자마자 미팅 잡을게요.”
계약조건과 기업명을 에릭에게 보낸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미국 증권사 상대로는 나보다 에릭이 더 유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한국에서 처리해야 될 일들이 있었다.
***
GB인베스트먼트의 회의실로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모여들었다.
에릭은 휴대폰을 들어 한국에 있을 강빈에게 회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MC파이넌스의 실장 해리, TD은행의 이사 제이슨과 중국 화교 출신으로 중국자본의 투자회사, 루비인베스트먼트의 전무 자리까지 오른 타오까지 모두 각 기업의 실권을 쥔 인물들이다.
가장 먼저 들어왔던 해리는 에릭과 반갑다는 듯 하이파이브를 했다.
“에릭! 오하이오 낚시는 최고였습니다. 다음에 또 가자고요.”
“어릴 때 갔던 기억에 간 곳인데 다행이네요. 저야 바쁘지만 않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이어서 들어온 제이슨과 타오는 같이 들어왔다.
TD은행과 루비인베스트먼트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타오의 표정이 어딘가 안 좋아 보인다는 것.
에릭이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반대편에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직항이 있어서 비행기 타면 금방입니다.”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과 시애틀은 동서 방향으로 거의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곤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잊기로 했다.
지금은 거래 자체에 집중할 때였다.
타오에 이어서 제이슨까지 가볍게 악수를 마쳤다.
“우선 자리 앉으시죠.”
모두 자리에 앉고 에릭이 이번에 새로 뽑은 비서, 보니타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해리가 사람 좋은 웃음을 빙자하며 에릭을 슬쩍 떠보았다.
“그보다 ‘황소 시장’에서 공매도를 하고 싶다니 저의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해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주식시장에서 ‘황소’는 주가의 활황을 의미하고, 황소 시장(Bull Market)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장을 말한다.
황소가 뿔을 밑에서 위로 들어 올리듯이,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해리의 말대로 현재 거품은 끝없이 부풀어서 연일 우상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릭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야 대표님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곰이 발을 들어 올렸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황소가 활황을 뜻한다면, 곰은 그 반대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에릭도 이제는 거품이 곧 꺼질 것이라는 강빈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릭이 지금 보여야 할 것은 자신감 있는 태도가 아니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할 판단을 대표가 지시했다고 비쳐야 조건을 맞출 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릭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게다가 만기일도 전에 말씀드렸던 내년 9월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그때까지는 활황을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시기에 60억 달러 규모의 공매도라니요. 그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이 자리에 앉은 모두 눈앞에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눈을 뱀처럼 가늘게 뜨고 있었다.
에릭은 일부러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너무 대놓고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대표님의 지시라서 어쩔 수 없이 진행한다지만 제 생각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몇 년째 활황을 이어가고 있는 IT가 1년도 안 돼서 무너진다니….”
“에이, 에릭. 당신도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 아닙니까. 얼른 계약 끝내고 전에 말했던 바에나 갑시다. 시애틀에서 그렇게 죽여주는 바가 있다면서요.”
해리의 말에 에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득 하나만 보고 얘기하는 자리지, 친분을 과시할 때가 아닙니다. 해리. 사담은 나중에 하도록 하죠.”
“아, 알겠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에 같이 웃으며 빙상낚시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에릭의 모습에 해리는 기가 죽었다.
“전에 증거금 30억 달러로 공매도에 건다고 한 것은 제 의견이었습니다. 대표님은 증거금으로 10억 달러를 더 높이라고 하더군요.”
“그, 그럼 40억 달러? 우리 은행은 말씀드렸던 대로 5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TD은행의 제이슨이 놀라운 금액에 몸을 떨며 말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득을 보고 진행하고 싶은 거래지만 그것과 감당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런 큰 규모의 공매도를 진행할 때 지급능력에 대한 조사가 실행될 것이고 제이슨은 이를 염려한 것이다.
에릭은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존 지분을 팔면서 갑자기 늘어난 자산에 대표님이 판단력을 잃은 것 같아요. 제 고집으로 겨우 증거금 30억 달러로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지급할 능력이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어쩔 수 없군요.”
타오는 입맛을 다시며 에릭을 훑어보고는 이어서 말했다.
“결제 불이행은 되면 어떻게 할 거요? 거의 9개월에 가까운 기간인데. 지금 활황이 계속된다면 50프로 상승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요.”
30억 달러를 공매도한다면 증거금 50프로를 기준으로 공매도액은 60억 달러다.
50프로가 상승한다면 증거금 30억 달러가 허공으로 분해되는 것이고, 그 이상 상승한다면 증거금 외에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게다가 현재 에릭이 공매도하려는 IT기업들 대부분의 주가가 두 달 만에 20프로가 상승했다.
“후… 저는 마음에 들진 않지만 대표님의 의견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공매도한 주식을 모두 합해 50프로 이상 상승한다면 만기일이 아니더라도 곧바로 결제 진행하겠습니다. 추가금이 얼마가 되든지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듯 허망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에릭의 연기와 달리 세 명의 월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을 인센티브를 생각하며 희망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