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꿈’을 보면 구름과 바이러스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가도 노란색 통제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묘한 감정이 드는 그림이었다.
“아까 붓을 들고 있던데 그리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그림을 다 그린 지는 일주일 정도 되었으니 다 말랐을 겁니다. 붓을 들고 작품을 감상하는 건 제 오래된 습관일 뿐이에요.”
형주는 방금까지 부정적인 얘기를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빙긋 웃었다.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냥 받을 수는 없겠군요. 대금은 계좌로 보내겠습니다.”
형주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강빈 씨에게는 대가 없이 한 번쯤 그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꿈’은 구상할 때부터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렸던 그림입니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거든요.”
꿈은 원래 형주가 자신의 엄마에게 주었던 그림이었다.
지난 생에서 봤던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형주의 삶을 다루었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형주의 장례식장이 나오는데 형주의 엄마가 그 그림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모습이 처연하게 비쳤다.
그 이유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형주의 유일한 유산인 ‘꿈’을 미술관계자에게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할 말이 없군요. 잘 보관하겠습니다.”
“선물이라고 해서 갖고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꿈’의 의도는 한 사람, 한 사람 건네 가며 퍼져가길 바라는 의도도 있으니까요.”
퍼져나간다는 것을 보아 ‘꿈’이 바이러스처럼 보였던 것은 형주의 의도가 들어간 것 같다.
‘꿈’은 보면 볼수록 그 안에 빨려들어 갈 것처럼 기이한 마력이 있었다.
전에 두완에게만 그림을 줬다고 진태가 내심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있었는데, 이참에 이 그림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받으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밤도 늦었는데 술 한 잔 어떠십니까?”
형주에 말에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정말 그러고 싶지만 내일 아침 일찍 할아버지 댁에 방문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막 돌아와서 시차 문제도 있고요.”
“이런, 방금 한국에 들어오신 걸 제가 깜빡했군요.”
“대신 다음번엔 꼭 좋은 술을 들고 오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형주가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다음에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
진태의 서재에 있는 온실로 들어갔다.
진태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새로 심은 것처럼 보이는 구상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듬고 있는지, 아니면 진태가 올라타 있는 사다리를 잡고 있어서인지, 양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있는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못 보던 나무인데 크리스마스트리라도 꾸미시려고요?”
“오랜만에 보는데 농이나 치고 많이 컸구나.”
진태는 피식 웃으면서도 손질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고 온 것은 뭐냐? 생전 빈손으로 오던 놈이.”
진태가 자식들이나 손주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빈손으로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태가 나에게 요구했던 것이기 때문에 예외였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잖아요. 기왕 주는 거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걸로 드리겠다고.”
“그래?”
그렇게 돈도 많은 양반이 아직도 물질적인 것이 탐나는지 눈을 반짝이며 사다리를 내려왔다.
진태가 내려오자 사다리를 잡고 있던 아저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구씨는 나가 있어. 차 한 잔 내오라고 하고.”
“예. 회장님.”
구씨라 불린 중년의 남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온실 밖으로 향했다.
진태가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보다 가장 비싸다니, 얼마길래 그러냐?”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얼마 전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게 510만 달러입니다.”
“510만 달러면 60억 원 정도 아니냐? 한국 화가의 그림이 그 정도 값을 받아?”
진태가 놀랄 만도 했다.
60억 원이라면 적어도 한국 화가 안에서는 최고가였다.
“네. 확실합니다. 그리고 천회장님한테 드린 그림도 이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뭐? 천회장한테 준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줬단 말이야!”
진태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당근은 채찍질을 때리고 먹여야 효과가 가장 좋은 법이다.
속을 한 번 긁었으니 이제 보약을 먹일 때였다.
“같은 화가가 그리긴 했지만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인 법 아니겠습니까. 이 그림은 510만 달러에 낙찰됐다는 그 그림보다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회장님의 컬렉션으로 부족함 하나 없는 작품이지요.”
물론 형주가 510만 달러에 팔린 ‘제비꽃’보다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 팔렸으니 뜻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캔버스의 겉을 두르고 있는 포장지를 벗겨서 진태에게 보여주었다.
“어떠십니까?”
진태는 개인미술관은 물론 미술관에 전시되지 않은 고가의 미술품들도 개인 창고에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고 들었다.
과연 진태의 감상평이 어떨지 궁금했다.
진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떼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돈 냄새가 나는 그림이구나.”
“....”
그러고 보니 미술품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기도 한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다.
해외에 많은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태선재단이 실은 진태의 비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처럼,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게다가 두완의 말처럼 진태가 소장만 하고 직접 미술관을 가지 않는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진태는 감상평을 끝낸 건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끝인가요?”
“응?”
“선물 받은 그림을 보고 하신다는 말씀이 돈 냄새가 난다는 게 끝입니까?”
“야, 이놈아. 세상에 돈보다 좋은 게 어딨다고.”
“어쨌든 마음에는 드신다는 거죠?”
“그래. 꽤 마음에 드는구나. 흐흐.”
그때 아주머니 한 명이 차반을 들고 온실로 들어왔다.
“여기 놓고 이 그림 가지고 나가게. 귀한 그림이니까 조심하고.”
“네. 회장님.”
아주머니는 차반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캔버스를 갖고 나갔다.
찻잔에 적당히 담긴 차는 맑은 노란색을 띠었다.
진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나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마셨다.
씁쓸하면서 약간은 비린 맛이 딱 내 취향이었다.
“재만이도 이 차는 질색하는데 잘 마시는구나.”
“네? 이 맛있는 걸 왜 질색합니까.”
“그러게 말이다. 네놈은 입맛도 나랑 비슷한 모양이야.”
진태가 껄껄대며 웃자 나도 가만히 있기는 머쓱해서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을 멈춘 진태가 비어있는 내 잔에 차를 한잔 따라주며 말했다.
“태선택배가 일을 아주 잘했어.”
“저도 미국에서 기사 봤습니다. 나사장이 인터뷰도 잘했던데요.”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되었다.
관련 물자 운송과 한국 측 이산가족을 실어 나르는 것을 태선택배가 담당했다.
국제기사로도 나갈 만큼 이슈가 되었던 행사였기 때문에 태선택배의 인지도는 이제 GB택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이제 인지도만으로 먹고 사는 세상이 되었어. 똑같은 전자제품이라도 태선이 붙었나 안 붙었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니까.”
“태선택배도 이제 세계로 나아가야죠.”
세계라는 단어를 들을 때 진태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태선그룹은 이제 한국에서 경쟁할 곳이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진태의 야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GB택배는 더 안 키울 생각인 게냐?”
“처음부터 할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 시작한 일입니다.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기다려주세요.”
이미 GB택배는 최초이자 최고로 한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진태의 인정을 받았고, 태선가 내에서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하나의 사업을 키워냈다.
다른 경쟁택배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예전과 같은 수익도 내지 못하는 상황.
더 미련을 갖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거라. 미국에서는 또 어떤 일을 하고 왔어.”
“보유하고 있던 주식들을 전부 정리했습니다.”
“네 투자회사에서 갖고 있다는 주식들의 이름은 채규를 통해서 대충 들었다. 모두 알만한 곳들이더구나. 그래. 얼마나 벌었어?”
“들으시면 놀라실 겁니다. 청심환이라도 한 알 자시고 들으시죠.”
“태선의 회장인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게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한 번 말해 보거라.”
솔직하게 다 털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 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진태는 눈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숨겨야 될 정도 큰돈인 게야?”
“꽤 큽니다.”
“내가 뺏기라도 한다는 게야? 손주놈이 돈 벌어왔다는데, 어떤 할애비가 안 즐거워하겠냐. 내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말해 보거라.”
지금껏 들어온 진태의 어떤 말보다 부드러웠다.
진태는 적어도 나에게 말했던 말들은 다 지켜왔으니, 방금 한 말도 믿어 보기로 했다.
“달러로 갖고 있지만 한화로 치면 5조 원이 넘습니다. 재투자 들어간 것들을 빼고 현재 갖고 있는 돈만요.”
말을 듣고 있던 진태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돈이구나. 지킬 자신은 있느냐.”
“지켜야죠. 저는 절대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게 맞는 거다. 남의 걸 빼앗을 수는 있어도 내 걸 빼앗기면 안 되는 게 태선이야.”
그릇된 가치관을 설교하는 진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마존닷컴의 지분을 미리 매수한 것처럼 지금껏 해왔던 투자는 누군가가 했을, 그 누군가가 이득을 취했을 일을 내가 빼앗은 것에 불과했다.
직접적으로 짓밟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진태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 돈은 어디다 쓸 생각이냐. 그만한 돈이면 태선그룹의 한 계열사를 통째로 사기에도 충분할 텐데.”
“아직 제 투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미국에 갈 생각입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가?”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 공매도를 할 생각이었다.
공매도, 말 그대로 없는 것을 판다는 것이다.
주식과 채권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도하는 행위이며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시점에 시세차익을 내기 위해서 생긴 투자방식 중 하나.
IT버블이 꺼지고 아마존닷컴을 비롯한 기업들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게 된다.
이제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IT버블의 올라타 거품이 터지고 가장 밑바닥에 위치할 때 나는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호황은 이제 끝날 겁니다. 저는 뒤집어진 판에서 이득을 챙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