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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3화 (83/249)

#83화

그동안 잠도 줄이면서 투자계획을 짜고 일해왔기 때문에 정신은 맑았지만 몸은 늘 피곤에 절어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야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행기 안에서는 잠을 줄인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어쩌면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직항이었기 때문에 쭉 쉴 수 있어서 더 마음이 편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간이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수면안대를 차고 바로 잠들 줄 알았는데, 짧은 수면에 몸이 익숙해진 탓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럴 때라도 자둬야 한다는 생각도 스쳤지만, 오지 않는 잠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팔베개를 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강현재로서, 흙수저로서 가장 이루고 싶었던 증권사 대표 자리에 올랐지만 그 끝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상에 올라가봤자 윗선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금방이었다.

다시 태어난 이후로 계속 들었던 생각은, 서강빈이라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복수라는 목적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전리품이었다.

내 마음에 공허함이 자리 잡게 하지 않기 위해서 태선을 독차지하겠다는 목표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진태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쉴 새 없이 투자와 재투자를 반복했다.

이제 아마존닷컴까지 정리하면서 가늠도 되지 않는 부를 축적했다.

갖고 있는 자산만으로는 태선가의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목적은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다.

만약 목적을 이루고 태선을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높이 쌓아 올린다면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혼자서 산의 정상에 오른다면 무슨 느낌일까.

이런 사색은 나약하게 만들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단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

“직접 올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뵙는데 이 정도는 비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황비서가 들고 있던 겨울코트를 내 몸에 걸치며 말했다.

그러고선 내 캐리어를 넘겨받아서 끌었다.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2시간가량 늦어졌는데 그 시간 내내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보다 황비서의 분위기가 예전에 젊고 쾌활하던 모습과는 꽤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차분하면서도 나에 대한 배려가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는지 글자가 가득 적힌 수첩이 한 손에 들려있었다.

“증권사랑 다른 투자회사 일도 바쁠 텐데 왜 이런 일에 시간을 써?”

“대표님 오시자마자 확인할 수 있도록 정리 끝냈고 대표님 컨펌만 받으면 끝납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황비서에게 혀를 내둘렀다.

지금 황비서가 하고 있는 일은 5년 전 본부장대행으로 하던 일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았다.

그때만 해도 업무에 시달리는 것이 눈에 보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양의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다.

밑에 사람을 몇 명 붙여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과도한 양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 무리하게 하지 말고 몸 생각하면서 일해.”

“괜찮습니다.”

“황비서 쓰러지면 멈추는 일들 많으니까 책임감 가지라는 말이야.”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자 황비서가 당황하며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일하는데 추가로 필요한 인원 있으면 황비서 재량으로 차출하고 비용 청구해.”

“지금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언제라고 했지?”

“내년 2월 초입니다.”

“식장이나 그 외 드는 돈은 전부 회사 카드로 처리해. 그리고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아파트도 하나 알아보고.”

“네?”

황비서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충분히 그 정도 대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황비서가 아니었다면 태선증권사 일도, 다른 일들도 처리하는데 더 시간이 들었을 테니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정당한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리고 나는 내 사람한테 쓰는 건 아끼지 않아.”

“내 사람….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표님 곁에서 받는 대가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황비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밖으로 빠져나오자 황비서가 미리 언질을 했는지 임기사의 차가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겨울코트를 입었음에도 쌀쌀한 바람이 몸을 스쳤다.

시애틀도 꽤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비슷하거니 생각했는데 한국은 더했다.

임기사가 달려 나와 황비서에게 캐리어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대표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그럼요. 출장 가시면서 주신 휴가 덕분에 이사 잘 마쳤습니다.”

“아, 참. 이사는 잘 끝났어? 어디라고 했지.”

“분당 쪽입니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들이는 못 가겠지만 큰 거 하나 선물할게.”

“감사합니다!”

임기사가 재빠르게 허리를 숙이더니 차문을 열었다.

여전히 유쾌한 임기사에 웃음을 짓고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우선 집으로 가줘.”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강빈 씨? 저 형주입니다.”

“네. 형주 씨. 저 한국에 막 들어온 참인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직까지 미국에 계셨군요. 진작에 한국에 있는 줄 알고 연락드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형주 씨가 줄 거라면… 그림 말하는 겁니까?”

“하하. 강빈 씨야 돈이야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돈을 쓰는 것보다 그림으로 제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형주 씨가 선물로 그린 그림이라니... 기대되는데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형주가 나를 위해서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일지, 아니면 아예 새롭게 그린 건지.

아예 새롭게 그린 거라면 가치가 얼마나 될지 나로서는 예상할 수 없다.

전화가 끊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임기사가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위대한의 위대한 아트갤러리로 차 돌릴까요?”

“응. 거기 들렀다 가지. 황비서는 먼저 퇴근해.”

“알겠습니다.”

형주의 갤러리와 멀지 않은 곳에 황비서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들렀다.

황비서가 차에서 내리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밀린 일 전부 처리해보자고. 들어가.”

한국에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황비서에게도 휴가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해서 일을 시켜봤자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전생에 개같이 굴려지면서 깨달았다.

물론 내 일을 직접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겐 해당되지 않지만.

다시 출발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형주의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저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회사 카드로 커피라도 한잔하고 와.”

“하하. 그럼 저야 좋죠.”

임기사에게는 GB택배의 법인카드를 진작에 주어서 주유비나 차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해결하고 있었다.

갤러리로 들어가자 한가운데에서 붓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는 형주가 보였다.

눈앞에 있는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지, 내가 다가갈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은 노란색을 제외하고는 온통 흑백으로 명암만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림 안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형체 모를 물질은 구름처럼 보이다가도 바이러스를 확대한 것처럼 기괴하게 보이기도 했다.

일자로 가로지르는 유일하게 유채색을 가진 노란 줄은 그림 안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통제선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실제 가치만으로는 510만 달러에 낙찰된 제비꽃을 뛰어넘는 형주의 또 하나의 역작.

“이 작품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꿈…. 꿈입니다.”

형주가 붓을 떼고 일어섰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공항에서 바로 왔거든요. 형주 씨의 그림은 늘 설레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하하.”

처음에 비해 밝아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보다 아직까지 미국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는 강빈 씨와 장 쥬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바로 한국에 돌아왔거든요.”

“낙찰대금은 받으셨나요?”

“아뇨.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합니다. 저야 아직도 강빈 씨가 그림을 사준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급할 것 없지요. 솝 씨가 어련히 잘해주실 겁니다.”

먹고살 돈만 있으면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긴 처음 그림을 산 20억 원만 해도 사치만 안 부린다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지장 없을 테니까.

형주에게 돈이란 그저 자신의 그림이 평가받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낙찰대금을 받으면 무엇을 할지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까?”

“음… 미술재단을 하나 차리려고요. 재능은 있는데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발굴해낼 겁니다. 하하. 이제 막 떠오른 신예 화가치고 거창하죠?”

“전혀요. 형주 씨라면 가능할 겁니다. 여차하면 저도 도와드리구요.”

미래를 상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형주는 걱정 하나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형주 씨는 이미 그릴 그림들을 다 정해놓고 그리는 겁니까?”

지금 형주의 뒤에 그려져 있는 ‘꿈’은 전생에도 존재했던 그림이다.

나로 인해 형주의 성공이 앞당겨졌고 그의 가치관은 물론 삶마저 달라진 지금,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나의 의문은 형주의 대답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저는 작품을 어떻게 그릴지 미리 잡아 놓습니다. 그림이 어떻게 발화할지는 처음 구상할 때 정해지는 거지요. 물론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대개 생각했던 대로 그려집니다.”

“그럼 꿈은 언제 구상하신 겁니까?”

“음… 1년 전쯤 구상을 끝냈을 겁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얘기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형주는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1년 전이라면 내가 아직 형주를 만나기 전이었으니까 ‘꿈’은 다행히 그려질 수 있었다.

“1년 전에 구상이 끝났다면 그리는 데 1년이나 걸리신 겁니까?”

“아뇨. 구상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하는 거고 그리고 싶은 순서대로 그립니다. 물론 그리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는 구상안들도 많고요.”

그 구상안들은 마치 보물창고와도 같을 것이다.

나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고 그가 그렸던 그림까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그림이 달라진다면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강빈 씨. 저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강빈 씨를 만나고 바뀌었어요. 그림을 판 돈으로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 동생에게는 난생처음으로 명품가방을 선물했습니다. 엄마는 다그치고 동생은 장기라도 팔았냐며 울더군요.”

“제가 영수증이라도 끊어 드려야 했군요.”

형주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농담을 던졌다.

형주는 살짝 쓴 미소를 짓더니 이어서 말했다.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제게 그림을 배우라 말해주었고, 동생이 식당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연명하며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제가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온전한 자기기만이었던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부터는 안 좋은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책임감이란 삶을 연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겁니다.”

“좋은 말이네요. 하지만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겁니다.”

“결국 돌아왔다면 된 거죠. 영영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누가 감히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형주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뒤에 있던 캔버스를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도망갔던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 주신 강빈 씨에 대한 제 마음입니다.”

꿈이 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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