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에릭. 네 집무실도 있으면서 왜 자꾸 여기로 오는 거야?”
“제 방이긴 해도 익숙하지 않아요. 회사 옮긴 이후로는 거의 한국에서 지냈잖아요. 차라리 대표님 옆에 있는 게 더 훨씬 편하죠.”
에릭이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볼펜을 돌렸다.
내 집무실이 꽤 넓었기 때문에 에릭의 책상과 컴퓨터를 배치한다고 해서 자리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에릭이 옆에 있으면 나도 편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고 에밀리가 들어왔다.
“대표님! 구글 사람들이 왔습니다. 대표님 방으로 안내할까요?”
“벌써? 생각보다 빨리 왔네. 바로 안내해 줘.”
워치츠키를 보고 온 다음 날 워치츠키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 회신이 올지 모르는 이메일을 기다리던 에릭은 잘됐다며 손뼉을 쳤었다.
이전과 같이 구글이 있는 팰로앨토로 다시 갈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는 자신들이 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반응 보니까 계약하는 건 거의 확정이겠네요.”
“워치츠키 씨가 두 사람을 잘 설득해준 것 같아. 아마존 관련 회계 쪽은 잘 처리됐어?”
“네. 각각 웰스은행에서 24억 달러, 모건은행에서 18억 달러, TD은행에서 18억 달러 지급했고 회계처리는 오늘 중으로 끝날 거예요.”
“그래. 끝나는 대로 보고해.”
에릭과 대화하는 사이 에밀리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서 순서대로 페이지와 브린, 워치츠키가 나타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금방 뵙네요.”
워치츠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페이지는 무례했던 저번의 상황 때문인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래리 페이지입니다.”
“워치츠키 씨를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굴었던 건 예의가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들으셨다시피 저희한테 투자자인 척 접근한 브로커들이 많았어서 의심이 많습니다.”
페이지는 정말 미안했는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서투른 사과를 했다.
나는 그런 페이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사를 마저 끝내고 집무실 한쪽에 비치된 소파로 그들을 안내했다.
에릭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페이지와 브린, 워치츠키 모두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눈빛에는 기대가 잔뜩 어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급하게 오셨을 텐데 직접 운전해서 오신 겁니까?”
“아뇨.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다행이군요. 오늘은 시애틀에서 주무시고 가시죠. 다운타운에 가장 좋은 호텔로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저희야 고맙죠.”
호의를 덥석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제안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모를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워치츠키의 반응을 보니 그럴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럼 계약 얘기로 넘어갈까요?”
페이지가 서두를 열자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이런 자리가 익숙한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가득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단숨에 진중하고 날카로운 빛으로 변했다.
에릭이 손깍지를 한 채 여유롭게 말했다.
“반가워요. 저는 GB인베스트의 총괄을 맡고 있는 에릭 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래리 페이지입니다.
페이지가 대표로 말을 하기로 했는지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에게 계약 조건과 상황은 전해 들었어요. 계약은 저를 통해서 진행될 예정이에요. 투자계획서 검토는 끝났나요?”
“네. 그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좋은 조건이더군요. 3000만 달러를 주는 대신 수익 지분의 20프로를 가져가신다고요.”
페이지는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계약조건을 언급했다.
나는 페이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구글이 상장하기 전까지의 조건입니다. 그 이후는 추가된 규모만큼 추가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은 수익 지분의 20프로를 드리고, 상장 후에는 기업가치만큼 기존 지분을 드린 뒤에 지분 20프로까지 우선매수권을 서대표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리고 왔기 때문인지 별다른 대화 없이도 계약은 쉽게 마무리 짓는 분위기였다.
에릭이 미리 작성해둔 계약서를 페이지의 앞으로 내밀었다.
“필요한 계약서들은 여기 있습니다.”
“빨라서 좋군요. 이 자리에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에릭은 브린과 워치츠키에게도 계약서 사본을 내밀었다.
페이지가 계약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에릭을 통해서 조건 설정부터 계약 이행까지 최대한 간소화하고 꼼꼼하게 했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전화 주세요.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그들이 마음껏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에릭과 자리를 비켜주었다.
복도로 나와 에릭에게 말을 걸었다.
“스타벅스랑 애플은 어디까지 매도했어?”
“워낙 큰 금액이라 투자자 몇 명한테 넘기고 남은 건 틈틈이 분할 매수해서 지금은 1할도 안 남았어요. 아마 남은 지분까지 처리하고 회계처리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스타벅스와 애플의 수익은 아마존닷컴의 비할 바가 되지 못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익은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 넣었던 100만 달러 외에 지속적으로 추가 투자를 진행했었기 때문에 세금을 제외한 수익금은 약 3000만 달러.
구글에 투자하게 될 돈을 고스란히 얻은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릭. 내가 구글에 투자한다고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네. 별말 안 했죠. 제가 볼 때도 구글은 투자할 만한 기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제 대표님이 진행하는 일은 그냥 믿으려고요.”
“무슨 계기라도 있는 거야?”
“대표님이 아마존 지분을 살 때가 생각났어요. 100만 달러로 지분 10프로를 매수하면서 제프한테 하신 말 기억나세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오래된 일인데다가 아마존의 지분을 매수한 시점에서 폐기한 기억이라 생각나지 않았다.
“수익률 십만 퍼센트 이상을 확신한다고요. 그리고 그 말은 지켜졌죠. 대표님.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 계산적인 사람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반문하듯이 말은 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에릭은 철저히 자신의 이득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는 이득은 다 챙기는 사람.
강현재로 살아가면서 에릭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구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를 믿고 따르는 것도 내가 에릭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 그래서 시간 아까운 일은 안 하려고요. 대표님이 지시하는 것에 이제 의문을 갖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늘 결과가 말해주니까요.”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싱거운 말에 피식 웃었다.
어쩌면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에릭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기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집무실로 들어가자 세 명 모두 표정이 밝았다.
“얘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페이지가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말했다.
“네. 서대표님만 괜찮으시면 바로 계약 진행하시죠.”
“좋습니다.”
서명 날인까지 끝내고 페이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투자 감사합니다. 성공밖에 없다는 서대표님의 투자리스트에 저희 회사가 오르게 됐네요. 그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쁜 듯 미소를 보이는 페이지와 악수를 나눴다.
브린과 워치츠키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워치츠키 씨가 아니었다면 투자를 못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두 분을 설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러닝하던 당신을 본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하하. 감사하긴요. 대표님이 저를 찾아오신 거잖아요. 저야말로 저희 회사에 투자해주셔서 감사하답니다.”
워치츠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들을 돌려보내려다가 아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데이엔드 호텔 측에 연락해두겠습니다. 모레까지 잡아 놓을 테니 편하게 보내시다 가세요.”
“저희야 감사하죠.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들을 보냈다.
이로써 당장 미국에서 해야 될 일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생 많으셨어요.”
“너도 고생했어. 급하게 미국에 와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녔을 텐데.”
“대표님만 할까요. 하하.”
나에게 부담 주기 싫은 듯 괜히 웃고 있는 에릭을 보자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에릭도, 황비서도 내 바쁜 일정을 분담하기 위해서 휴가 한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만 한번 없이 묵묵히 일을 해왔던 내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오직 돈만을 바라보고 할 수는 없었던 일들이니까.
“에릭. 휴가 가고 싶지는 않아?”
“휴가요? 음….”
에릭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에릭의 부모님도 시애틀에 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동안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님은 뵙고 왔어? 차로 두 시간 거리잖아.”
에릭의 부모님댁과 GB인베스트먼트는 모두 시애틀에 위치했다.
부모님댁이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 중심지에 있는 GB인베스트먼트에서 어림잡아 차로 두 시간 거리였다.
내 말에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왕복 네 시간이나 걸려서 엄두를 못 냈어요.”
“오늘 일만 마무리하고 내일부터 휴가 다녀와.”
“에이, 아마존 매도 자금으로 이제 재투자를 시작해야 되는데 쉴 시간이 어딨어요. 투자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다녀올게요. 그 뒤에 부모님이나 한번 뵙고 오죠, 뭐. 대표님이야말로 좀 쉬고 오세요.”
“그래. 나 휴가 갔다 올게.”
쉬라고 자신이 말은 했지만 내가 정말 휴가를 간다고는 생각 못 했는지, 에릭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휴일은 물론 주말까지 쉬지 않고 일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물론 말만 이렇게 하지 나는 쉴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도 쌓여있는 일들을 처리하기 바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에릭 역시 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빈말을 했다.
“대표님도 쉬고 오신다면 저도 갔다 올게요. 이번 주말까지만요.”
지금이 목요일이니 주말까지 쉰다고 해봤자 3일밖에 되지 않았다.
“이왕 쉬는 거 일주일은 갔다 와. 어차피 갔다 와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지금 쉬어 두지 않으면 후회할걸?”
“일주일은 너무 긴데요.”
“아까 내가 지시한 것에 의문을 갖지 않겠다며. 푹 쉬고 오라는 게 내 지시야.”
에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 없죠. 알겠어요.”
“그래. 카드 줄 테니까 백화점 들러서 부모님 선물도 사고 네 것도 좀 사.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나? 같이 어디 섬에 여행이라도 갔다 오고 또…”
“대표님! 저 대표님만큼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쓸 돈은 있어요. 제가 받는 돈이 얼만데요. 더 받으면 도둑놈 소리 듣습니다. 하하.
장난스럽게 얘기하는 에릭의 어깨를 툭 쳤다.
에릭이 받는 보수는 투자 수익의 1프로.
말이 1프로지 이번 아마존닷컴의 지분 매각만으로 에릭은 얻은 수익은 수백억 원일 것이다.
“알았다. 들어가서 쉬어.”
“네. 푹 쉬고 오세요.”
손을 휘휘 젓고 집무실을 나왔다.
에릭은 내 호의를 거절했지만 나를 위해 노력해주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도 쉽게 못 구하는 것들.
복도를 걸으며 혼잣말을 뱉었다.
“섬을 하나 살까, 아니면 전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