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시애틀로 돌아가자 에릭이 회사 앞에서 나와서 반겼다.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고생 많았죠.”
“고생은 에밀리가 했지. 올 땐 비행기를 탔어도, 갈 때는 급하게 가느라 15시간은 운전한 것 같은데.”
에밀리가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옆에서 대표님의 협상을 지켜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다음에도…”
“사안이 급해서 그런 거지. 운전기사는 따로 뽑아야겠어.”
내 말에 에밀리는 그제서야 화색을 띠었다.
“에릭. 일은 잘 해결했어?”
“네. 비앙카랑 에밀리가 다 처리하고 최종 승인만 하면 되는 거라 금방 끝났어요. 아마존닷컴 지분 매각 관련 회계처리도 곧 끝나가구요. 그보다 저는 대표님이 궁금한데요?”
에릭의 말에 나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에릭은 내 표정을 보며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말로 말했다.
“역시.”
“역쉬…?”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에밀리에게 에릭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에밀리도 그제서야 같이 웃으며 ‘역쉬’를 남발했다.
“아직 확정된 건 없는데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것 같아.”
“팰로앨토까지 다녀오셨는데 확정된 게 없다니요?”
“대표들한테는 대차게 까였거든. 대신 그들과 가까운 사람 한 명은 확실하게 설득한 것 같으니 두고 봐야지.”
대표한테 거절당했다는 말에 당황할 법도 한데, 에릭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튼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이메일 계속 주시하고 있어.”
워치츠키에게 알려준 이메일은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이메일이었기 때문에 에릭과 내가 같이 사용하고 있는 이메일이었다.
“네. 오는 대로 보고드릴게요.”
“그래. 너도 하던 일 마무리하고 푹 쉬어 둬. 그리고 에밀리.”
“네.”
에밀리는 밝게 대답하긴 했지만 거의 밤을 새우며 운전했기 때문에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지금 당장 퇴근해서 내일까지 푹 쉬고 그다음 날 출근해. 그리고 이번 일 수당은 알아서 챙겨줄게.”
“알겠습니다!”
에밀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
“페이지. 어제 사무실에 동양인 투자자가 왔었지?”
워치츠키의 말에 페이지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러닝 하다가 마주쳤어.”
“그 사람이 너한테까지 가서 투자하라고 한 거야? 무시해. 그만한 투자금에 경영권을 전부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너한테 투자계획서를 줬다는데 읽어는 봤어?”
페이지는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읽어봤자 그럴싸한 말들로 가득 차 있겠지. 이제 그런 식의 투자는 지긋지긋해. 지금 시행 중인 ‘페이지랭크’만 체계화가 끝나면 세쿼이아 은행에서 공식투자 해주기로 했어.”
워치츠키는 인텔에서 다년간 근무한 이력을 토대로 허위 투자자들이 내민 계약서의 허점들을 짚어내며 반대했었지만, 당장의 투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페이지가 감행했었다.
페이지가 워치츠키를 더 신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투자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허점을 집어내던 워치츠키가 두 손 들고 찬성하는 투자 계약이라니 조금은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은행에서 받는 투자는 조건이 까다로운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우리한테 기술만 훔치고 달아난 놈들이랑 소송싸움 하려면 돈이 필요해.”
“워치츠키. 네가 그 사람한테 투자금을 받으라고 종용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조금 늦더라도 나는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고 싶은 거야.
“투자계획서를 읽어보기만 해줘. 그리고 서강빈이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본 적 없어?”
“어제 왔던 그 투자자? 누군데 그래.”
“아마존닷컴의 최대 주주였던 사람이야. 지분을 매각하고 이제는 억만장자가 됐대.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로 알려져있는 사람인데 몰라?”
“G, GB?”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브린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페이지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져 있던 명함을 꺼냈다.
서강빈이라는 이름은 생경했지만 GB라면 모든 투자를 성공시킨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린이 목소리 톤을 높이며 말했다.
“아마존닷컴이라면 우리가 투자를 제안하려던 회사 중 하나잖아. GB라면 그런 대기업의 최대 주주인 회사고. 그럼 이전 투자자들처럼 한탕 하려고 우리에게 제안한 것은 아닌 거 같은데?”
페이지는 그제서야 관심이 생겼는지 투자계획서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워치츠키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어제 강빈 씨에 대해서 검색해봤어.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을 때 천만 달러나 되는 돈을 기부했대. 거기에 자기가 속한 그룹이 정리해고를 감행할 때 피해보상까지 직접 할 정도로 양심적인 인물이야. 그리고 그의 손을 거친 투자는 모조리 성공했다는데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아?
강빈과 헤어진 후 워치츠키가 잠깐의 웹서핑으로만 알게 된 정보가 이 정도였다.
강빈이 그동안 쌓아온 업적은 한 번의 실패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더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지자 페이지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읽어볼게.”
페이지는 투자계획서를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영권 일체 양도? 이건 다른 투자자들과 같은 조건이네.”
“더 읽어봐.”
워치츠키의 재촉에 페이지는 다음 장을 넘기고 계속해서 읽었다.
“우리가 상장한 이후에 어떻게 할지까지 정하자는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네. 이 계약서가 사실이면 우리가 손해 볼 건 전혀 없는데? 우리를 알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신뢰하는 거야.”
페이지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투자계획서를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다 읽은 서류를 덮었다.
“아직 시행하지도 않은 애드센스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애드센스는 현재 구글에서 기획 중인 배너형 광고 중개 서비스다.
정확한 단어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강빈의 투자계획서가 제시한 방향성 중 하나가 애드센스와 거의 흡사했다.
“구글에 관심이 많다면 에드센스같은 수익모델을 생각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이야. 믿을 만하지 않겠어?”
투자를 받지 않겠노라, 페이지는 굳게 결심했었지만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강빈의 투자계획서를 보면 IT기업에 대한 이해도와, 현재 구글의 재정 상태도 파악이 된 것 같았다.
천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기부라는 명목으로 쾌척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아마존의 지분을 매각한 상황.
삼천만 달러는 강빈에게 큰돈이 아닐 것이다.
생각을 끝낸 듯 고개를 든 페이지는 워치츠키를 똑바로 응시했다.
“워치츠키. 강빈 씨 지금 어디 있어?”
“어제 나와 만나고 바로 떠났어. 듣기로는 시애틀에 사무실이 있다고 하는데?”
수락의 의미가 담긴 말을 듣고 워치츠키는 환하게 웃었다.
페이지가 가끔 괴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일을 진행하거나 확신을 가질 때는 바로바로 진행하는 타입이었다.
강빈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앞으로의 구글이 기대되었다.
“직접 찾아가겠다고 연락해 줘.”
***
한국이 IMF의 관리 체제로 들어간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IT버블로 한창 경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경기침체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에릭. 재밌는 이야기 해줄까.”
“좋죠. 어떤 이야기요?”
에릭은 대표실에 있는 또 하나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화면만 쳐다보고 있길래 물었더니 곧장 대답했다.
“시골의 주지사에 불과했던 빌 클린턴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지 알아?”
“월 가의 지지가 있었잖아요. 갖고 나온 정책도 그렇고.”
1991년,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를 1년여 남기고 골드만삭스의 회장이자 월 스트리트가의 거물, 루빈을 만나게 된다.
클린턴은 루빈에게 받은 정치자금을 기반으로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고, 이후 1995년에 루빈을 재무장관으로 채택한다.
“그중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건 지금 역임 중인 미국의 재무장관이야.”
“로버트 루빈 말하는 거죠? 골드만삭스사의.”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말했다.
“그 재무장관과 미국이 한국의 금융위기를 야기했다면 어떨 것 같아?”
“관계가 있다고는 늘 생각했어요. 자세히 말해주세요.”
“월 가의 금융자본들이 미국 재무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내 쪽으로 끌고 왔다.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예측해왔던 에릭이어서 그런지 이해가 빨랐다.
“미국 금융산업에도 크게 발을 걸치고 있는 루빈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 장사를 할 지역과 상품을 찾았어. 그런 와중에 고성장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의 자본시장은 탐나는 재물이었지.”
“그 당시 한국은 자본시장을 닫고 있었구요. 클린턴 정부가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게…?”
“그래. 투자하고 싶은데 투자를 할 수 없다면 시장을 열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어.”
에릭이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올리고 눈을 감았다.
1996년 작성된 미국 재무부의 비망록에 따르면 한국을 시장 자유화 우선대상국에 포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이 OECD에 가입한 해와 맞물린다.
나는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정부는 OECD 가입을 위해서 미국 재무부의 요구에 따라 무리하게 시장을 개방했어.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
“그럼요. 해외 은행의 한국 진출은 물론, 한국 기업이 해외 금융시장에서 자유롭게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허가도 내렸고요. 주식 시장의 외국자본이 크게 확대한 것도 이때였잖아요.”
“자본시장의 개방으로 한국 경제는 급격하게 성장했었지.”
“물론 그 기간이 턱없이 짧았고 되돌아온 피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맞아. 그리고 미국 재무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장을 개방하면 한국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걸 몰랐을까?”
“네? 대표님 말씀은 모든 게 계획된 일이었다는 말이에요?”
에릭이 눈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무부를 배경으로 둔 월가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까. 자본시장 개방으로 잠깐 부풀어 오른 한국 시장이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공황을 맞게 된 거지.”
“그리고 미국 정부는 IMF를 통해 한국 경제 구조에 손을 댄 거군요.”
에릭은 전생대로였다면 지금 몸을 담고 있었을 월 가를 향해 분개했다.
“이득을 위해서 나라의 경제까지 움직이다니… 선을 넘었어요.”
“그게 자본의 무서움이지.”
나는 손으로 볼펜을 딸각거리며 말했다.
“에릭. 한국이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에릭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하다가 말했다.
“최소 2년은 걸린다고 생각해요. 미국과 한국 자본이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결국 주체적인 해결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요.”
한국에 대한 신용도 자체에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마다 엇갈리긴 했지만 보통 예상하는 기간은 앞으로 3년 내외였다.
그리고 나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앞으로 2년이야. 그동안 최대한 많은 자금을 끌어모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