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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0화 (80/249)

#80화

“왜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겁니까. 저보다 좋은 조건이라도 있는 겁니까?”

3000만 달러를 투자해주는 대가로 지분의 단 20프로만 원한다는 조건에도 구글의 공동대표 중 한 명, 페이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저희는 아직 투자받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페이지….”

또 다른 대표인 브린은 그래도 고민을 좀 해보자는 입장이었지만 주요 결정권자인 페이지에게 결정을 맡긴 듯 보였다.

앞으로 몇달 뒤에 구글은 2500만 달러를 투자받기 때문에 지금 시점의 투자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사이에 어떤 심정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나기 전에 투자를 하고 지분을 받아야 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단호하게 말했다.

“구글이 야후를 이기고 검색 엔진 시장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이 투자금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

페이지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투자계획서는 두고 가겠습니다. 한 번 살펴보시고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로 확고하다면 여기서 더 설득해봤자 시간 낭비다.

투자를 받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두 사람에게 짧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에밀리도 나를 따라서 나왔다.

자연과 건물들이 한껏 어우러진 실리콘밸리의 풍경 속에서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내 몸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차를 타지 않고 한낮의 거리를 걸으며 어떻게 두 대표를 설득할지 고민했다.

에밀리는 내 뒤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에밀리. 일단 근처에 숙소를 잡아야겠어.”

“네. 근방에 있는 호텔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햇볕을 쬐며 걷고 있다가 문득 에밀리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네 생각은 어때? 페이지는 왜 거절했을까.”

“음… 꽤 괜찮은 투자처로 포트폴리오에 올리긴 했지만, 아직은 신생 기업인데 그런 기업에 3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하겠다는 대표님께도 놀랐고, 그런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는 래리 페이지한테도 놀랐네요. 먼저 접촉한 투자자들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내 조건보다 좋을 수는 없을 텐데.”

이제 막 활황기가 지나가고 거품이 꺼져가기 시작하는 IT산업에다가 아직 자리를 잡지도 못한 기업이 구글이었다.

그런 기업에 고작 20프로의 지분을 받고 3000만 달러나 지원해주겠다는데 거절당하다니.

“조사할 때 구글 측과 접촉한 투자자들은 없는 건 확실해?”

“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파견했던 직원들 말로는 회사를 찾아오는 사람은 있어도 페이지와 브린이 누군가를 찾아간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이미 투자를 받았다면 몰라도요.”

아직 투자를 받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찾아왔는데, 만약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투자자가 있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내내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맞은편의 인도에서 백금발에 짧은 눈썹을 한 여성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러닝을 하며 나를 지나쳤다.

낯익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에밀리. 저분이 누군지 알아?”

“아뇨, 누군지 모르겠네요. 어? 저 방향은 구글이 있는 곳 아닌가요?”

에밀리의 말대로 그 여자는 구글을 향해 러닝하고 있었다.

만약 저 사람이 구글의 직원이라면…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구글과 나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키.

의아해하고 있는 에밀리를 뒤로하고 곧장 그녀를 쫓아 달려갔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네. 헉헉. 안녕하세요.”

그녀는 가벼운 인사 정도로 생각했는지 대답을 하고는 계속해서 달려갔다.

“수전 워치츠키 씨.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네? 제 이름은 어떻게….”

그녀는 당황해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나도 달리기를 멈추고 그녀 앞에 섰다.

“저는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워치츠키에게 GB인베스트먼트의 명함을 건넸다.

워치츠키는 당황스러워하며 명함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GB라면… 그보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구글의 주축 중 한 명인데요. 구글이 당신의 차고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전 워치츠키.

그녀가 자신의 차고를 페이지와 브린에게 선뜻 임대해 주면서 구글이 시작되었다.

이후 인텔의 홍보 직원이었던 수전은 업무 중 자신이 얼마나 구글 검색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깨달은 직후 구글의 16번째 직원으로서 합류하게 된다.

차고지부터 구글에 입사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며 사람들은 그녀를 ‘구글의 어머니’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후에 인터뷰에서 ‘페이지와 브린은 밤늦게 피자와 초콜릿을 먹으면서 나에게 자신들의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들려줬다’고 말할 정도로 구글의 두 대표와의 관계가 남달랐다.

수전은 이후 구글이 인수한 유튜브를 이끌어나가면서 유튜브의 최고경영자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말에 워치츠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차고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그때부터 투자를 하고 싶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구글의 검색 엔진 시스템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투자에 대한 얘기라면 저는 환영입니다.”

페이지와는 다르게 워치츠키는 투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투자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치츠키를 공략한다면 페이지의 생각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저는 당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도 상관없어요. 샤워야 일이 끝나고 하는 걸로 하죠.”

“좋습니다. 그럼 카페에 가서 마저 얘기를 나누실까요?”

“네. 그럼 회사로 가서 차를 끌고 올게요.”

“아닙니다. 에밀리. 차 갖고 여기로 와 줘.”

뒤늦게 우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던 에밀리는 방금 막 내 앞에 도착해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지 조금 달렸음에도 숨이 가빠 보였다.

“네. 금방 갖고 올게요.”

에밀리가 발걸음을 반대로 돌렸다.

수전은 러닝용 파우치에서 물병을 꺼내어 마시고는 말했다.

“그보다 서강빈 대표라면 아마존닷컴의 최대 주주 아닌가요? 주주총회에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하하.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랬죠. 아마 이번 주 안으로 기사가 날 겁니다. 동양인 투자자가 아마존닷컴의 지분을 매도하고 억만장자가 되었다고요.”

GB인베스트먼트에서 계약한 회계법인이 부리나케 계산 중인 세금을 제하더라도 지급 받은 돈은 엄청났다.

세후 추정가가 최소 50억 달러를 넘겼으니까.

“세상에… 이제 샌드위치를 사 먹을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미국식 농담인지 워치츠키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그러더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존이라면 연일 주가가 오르는 곳인데 지분을 판 이유가 있나요?”

“더 좋은 투자처들이 있으니까요.”

워치츠키를 보며 씨익 웃었다.

에밀리가 오른쪽에 있는 차창을 내리며 말했다.

“대표님. 출발하시죠.”

에밀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는 팰로앨토 외곽에 있는 한 카페로 갔다.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워치츠키가 먼저 서두를 열었다.

“대표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먼저 말씀해주시죠.”

“저는 3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구글의 지분 20프로를 희망합니다.”

“페이지와 브린에게도 똑같은 조건을 말씀하셨죠? 그 둘은 거절했구요.”

“맞습니다. 제 조건이 어딘가 잘못됐습니까?”

워치츠키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씁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워치츠키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저희 구글은 이미 계약을 세 번 진행했었습니다.”

“예?”

세 번의 진행이라니?

워치츠키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시기에 구글은 어디와도 계약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워치츠키는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건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계약들은 모두 허위였어요. 약속받은 투자금은 지급 받지 못했고 저희의 기술만 유출됐죠. 그들이 그 기술들을 갖고 어떻게 할지는 모르는 일이고요. 그들도 처음에는 서대표님과 비슷한 제안을 하더군요.”

지금은 감옥에 있을 노정환이 생각났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기꾼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말인가.

페이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제가 투자하려던 회사도 구글처럼 사기를 당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당할 뻔’이요? 어떻게 됐죠?”

워치츠키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기를 치려던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고 제 투자를 받은 회사는 승승장구하며 한국 워드 시장을 차지하고 있어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유일하게 장악하지 못한 나라가 한국인 이유가 바로 이 회사 때문이죠.”

“그거참 보기 좋은 사례네요. 사기꾼은 벌을 받아야죠.”

“물론입니다. 그보다 확실히… 두 대표분들이 투자 자체에 회의를 느낄 만하군요. 워치츠키씨는 괜찮으십니까?”

워치츠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물론 가짜 투자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제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은 아니지만, 제집처럼 생각하는 회사가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제 투자를 받으시려는 이유가 있나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구글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투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서대표님을 보자고 한 이유는 이미 검증받은 투자자이기도 했지만, 저희가 차고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 진실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차고와 워치츠키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을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 겁니다. 에밀리. 투자계획서를 워치츠키 씨한테 전해줘.”

에밀리가 워치츠키에게 투자계획서를 건넸다.

페이지와 브린에게 주었던 투자계획서의 사본이었다.

이것을 다 읽는다면 내가 구글 투자에 대해서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투자계획서를 읽을수록 워치츠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가서 페이지와 브린을 설득해야겠네요.”

***

강빈과 헤어지고 워치츠키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강빈이 워치츠키에게 보여주었던 투자계획서대로라면 구글 입장에서는 손해는커녕 이득만 남는 장사였다.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워치츠키는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페이지와 브린을 설득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걸리는 건 그동안 투자자들도 비슷한 제안을 했었단 말이지.”

지금까지 만난 사기꾼들에게 질린 페이지는 투자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강빈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강빈이 보여준 투자계획서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경영권 양도.

매력적인 조건임에 틀림없지만, 구글에게 접근했던 다른 사기꾼들이 제시했던 조건도 경영권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달콤한 말로 두 대표를 유혹했고, 페이지는 투자조건을 면밀히 따지지 않은 채 받아들였다.

계약서가 진행되기 직전에야 워치츠키가 계약서의 허점, 기술 공유 조항을 발견했기에 겨우 제안을 막았다.

계약 전에 기술에 대한 유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로 몇 번이나 같은 경우가 생기자 페이지는 투자자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컴퓨터를 켜고 검색창에 ‘Seo Kang-bin’을 입력했다.

맨 윗줄에 있는 정보는 역시 아마존닷컴의 최대 주주라는 것이었다.

기사를 클릭해 들어가 보니 나오는 사진 역시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던 강빈의 얼굴과 동일했다.

아직 아마존닷컴의 지분을 매각했다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 주 안으로 기사가 난다고 했으니까 거짓말은 아닐 거야. 그런 억만장자에게 3000만 달러는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고.”

기사에는 강빈의 한국식 이름도 같이 적혀 있었다.

워치츠키는 그 이름을 보고 현재 한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야후’에 검색해보았다.

상단에 뜬 기사의 제목들을 번역해보았다.

태선의 날개를 단 천재 투자자, 병도 주지 않았는데 약을 건넨 유일한 재벌, 외환위기의 최대 기부자 등 기사들의 내용을 전부 번역하진 않았지만 강빈의 그간 행보가 어땠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보를 알면 알게 될수록 매력적인 투자자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구글의 두 대표가 그간 투자로 인해 얼마나 심적으로 괴롭고 힘든 기간을 보내왔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워치츠키는 결심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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