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79화 (79/249)

#79화

제프와 찰스가 돌아온 것은 나간 뒤 1시간 후의 일이었다.

금액을 고려했을 때, 최대한 빠르게 결정하고 온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제프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짙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이전에 그를 보았을 때처럼 맑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릭이 내 손을 불끈 쥐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양도 이후에 은행에서 대용을 실행한다고 하셨죠. 언제가 좋겠습니까?”

“저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번 주 내로 양도계약서를 작성하고 지급일을 다음 주로 하면 어떻습니까?”

이미 은행과의 합의도 맞춘 듯, 제프는 지금 당장이라도 계약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계약서 검토는 에릭 총괄이 맡을 겁니다.”

“찰스. 계약서 갖고 와.”

제프의 말에 찰스가 계약서 사본을 갖고 와 에릭에게 건네며 말했다.

“서 대표님. 아까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도 회사에 이득을 가져가는 방향으로 그런 방법을 택한 거니까요.”

내 말이 의중을 찔렀는지 찰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뒤에서 제프가 나를 불렀다.

“강빈 씨. 오늘 제 태도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라도 당신의 지분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존경은 여전합니다.”

“괜찮습니다. 결국 저는 원하는 양도액을 받았고 당신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까요. 다음에는 얼굴 붉히지 않고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프는 오늘 거래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이제 내 손은 떠났다.

그를 위해서 가질 죄책감은 없다.

***

난생처음으로 GB인베스트먼트사의 실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이전하기 전의 모습은 보지도 못했다.

투자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직원들이 더 필요했고, 아예 건물 한 채를 사들였었다.

“직원들이 몇 명이라고 했지?”

“음… 약 60명 정도 돼요. 이사는 총 두 명인데 저희 회사가 이전하고 규모를 늘리기 전, 초기 멤버들이에요.”

심지어 이사가 있다는 말까지 오늘 처음 들었다.

그동안 투자 제안을 해오기만 했지, 회사 실무에는 관여를 거의 안 했으니 알 턱이 없었다.

GB인베스트먼트는 시애틀 시내에 위치했고, 5층짜리 건물이었다.

건물 왼쪽 귀퉁이에 ‘GB’라는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네가 단 거야?”

“하하. 당연하죠. 대표님이 방문을 안 하시니까 저렇게라도 해야 애사심이 생기지 않겠어요?”

에릭의 말을 듣자 이제야 회사를 방문한 게 조금 미안해졌다.

“일단 들어가시죠. 대표님 방도 있어요.”

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안내받다니.

‘태선증권사에 첫 출근 하던 날도 이랬지.’

에릭의 뒤를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있던 건물을 매입한 것이지만, 지어진 지 얼마 안 됐는지 내부는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다.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에 복도 중간중간마다 놓인 화분들로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주었다.

“대표님 방으로 바로 모실까요?”

“아니. 좀 더 둘러보다가 가지.”

복도와 사무실을 가른 것은 투명한 유리창으로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보았다.

직원들 모두 눈앞에 모니터를 두고 열중하고 있었다.

4층까지 비슷한 양상이었다.

“이제 대표님 방이 있는 5층이에요.”

“올라가지.”

4층까지 다 둘러본 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5층은 대표님 방이랑 제 방이 가장 안쪽에 있고 회의실이 있어요. 그리고 에밀리와 비앙카가 함께 일하는 이사실이 끝이에요.”

“이사실 먼저 들르자. 아마존도 처분했으니까 새로운 투자처 찾아봐야지.”

에릭을 따라 이사실로 들어갔다.

“누, 누구세요?”

갈색 머리를 한 백인 여자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

에밀리는 처음 입사한 날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대표님이 회사에 오는 일은 거의 없을 거라구요?”

“응. 대표님은 투자 제안을 하시고 실질적인 분석과 투자 진행은 내가 맡아서 할 거야.”

에릭 장이라는 동양인은 나이도 어려 보였는데 자신을 총괄이라고 소개했다.

심지어 대표라는 인물이 회사에 올 일은 거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뽑힌 직원이라고는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인 비앙카뿐.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대표를 빼면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에릭장과 비앙카를 포함해 세 명에 불과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대표가 투자 제안한 기업들을 분석하고 에릭 총괄에게 보고하는 것이 끝이었다.

스탠포드 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월스트리트의 어디든 일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월가에서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기를 가지러 고향으로 돌아온 찰나, 우연히 GB인베스트먼트의 공고를 보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회사이기 때문에 걸었던 기대도 없었으며 임금이나 제대로 나올까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버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을 겨우 버티고 비앙카에게 낙담하며 말했다.

“비앙카. 여기서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없을 거야. 말단부터 시작하더라도 일단 뉴욕으로 가자.”

“언니…. 우리가 매수했던 주식들 확인 안 했어?”

떨리는 비앙카의 목소리에 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주가를 확인했다.

“이… 이게 뭐야?”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그들이 분석하고 투자를 진행한 주식들의 평균 상승률은 200프로가 넘었다.

어떤 투자회사를 가더라도 이만한 수익률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앙카. 월스트리트가 아니고 이 회사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몰라.”

“최선을 다해보자.”

그 뒤로 에밀리는 회사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직원 수가 불어날 때쯤, 에릭이 뜬금없는 선언을 했다.

“앞으로 나는 거의 한국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 에밀리. 너랑 비앙카가 이사를 맡고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을 맡아 줘.”

“네…? 그게 무슨. 저희도 이제 입사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요.”

“부탁할게. 간단한 실무는 알아서 처리하고 주요계약 관련 내용은 메일로 보내.”

“....”

에릭이 한국에 갔다고 해서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큰 규모의 투자를 진행할 때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될 때마다 에릭은 곧장 비행기를 타고 회사로 왔다.

말도 안 되는 것은 대표와 총괄이 출근하지 않는 회사가 연일 흑자를 갱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가 고문하고 직원들이 분석, 에릭이 결정하는 이 시스템이 미국 시장에서 통했다.

얼마 전에 직원들을 추가로 고용하면서 회사는 아예 건물을 사들일 정도로 커져 가고 있었다.

이런 폭풍 같은 5년을 보내면서도 에밀리는 아직도 대표의 얼굴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훤칠한 동양인이 예고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온 것이다.

“누, 누구세요? 어, 에릭 총괄님!”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얼굴이었다.

에릭과 거의 동시에 들어왔지만 에릭과 같이 들어온 남자는 시선을 뺏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짙으면서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눈썹과 그 아래 얇은 속눈썹 사이로 맑고 투명한 갈색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날 서 있는 콧대와 붉은 입술은 한 떨기 장미를 연상케 했다.

“설마… 대표님?”

“반갑습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서강빈입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대표가 에밀리의 눈앞에 나타났다.

에밀리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에릭이 모든 업무를 다 떠넘기고 떠나면서부터 정신없이 일해왔기 때문에 옷차림이 후줄근했다.

“저, 저는 이사, 에밀리라고 합니다. 비앙카 너도 빨리 와.”

뒤를 보니 비앙카는 여전히 경악한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 둘이 놀란 이유는 이사 자리까지 올라가는 동안 보지 못했던 대표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진으로 볼 때부터 매력적이라고 느꼈지만, 실제를 보니 배우 뺨을 칠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다.

넋을 잃고 쳐다보던 비앙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강빈에게 다가갔다.

“비앙카 이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강빈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대표를 맡고 있는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에릭 총괄을 통해서 운영에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았는데요, 뭘.”

따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에릭이 적당한 보수를 지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의 양이 많겠지만 비앙카와 에밀리의 얼굴빛을 보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자주 오시는 건가요?”

“하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한국에도 일이 많아서.”

에밀리는 아쉽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보다 여기엔 어쩐 일로…?”

“아마존의 지분을 정리했거든요. 여유자금이 50억 달러가 넘게 생겨서 앞으로 바빠질 겁니다.”

“5, 50억 달러요?”

강빈이 개인소유로 아마존의 지분 10프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지분을 매도할 줄은 몰랐다.

아마존닷컴이라면 지난 한 달만 해도 15프로 이상 급등했다.

지금의 기세를 볼 때,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더 크다고 생각하는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릭에게 들었던 강빈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회사의 전반적인 결정이나 큰 수익을 거둔 것이 모두 대표님의 판단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을 눈앞에서 보다니… 영광이에요.”

“하하. 내 회사 직원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에릭?”

“에밀리, 비앙카. 전에 지시했던 포트폴리오 준비됐지?”

“네 준비됐습니다.”

“대표실로 들고 와.”

***

비앙카는 넋이 나간 듯 멍한 모습을 보였지만 밑의 직원들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정리하고 간소화하는 데에는 능력이 있었다.

에밀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료들을 갖고 오길래 기대를 했는데 자료들을 살펴보니 충분히 자신할 만했다.

그들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기업은 역시나 ‘구글’

1996년 1월, 스탠퍼드 대학와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래리 페이지가 연구 프로젝트로 시작한 것이 바로 구글이었다.

얼마 뒤에 같은 과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세르게이 브린도 연구에 합류하게 되었다.

래리 페이지는 특정 키워드가 얼마나 많이 출현하는가에 따라 웹페이지의 순위를 매기는 기존 검색 엔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 의문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관련 있는 웹페이지로부터 가장 많은 링크가 들어오는 걸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후 1997년, ‘google.com’이라는 도메인을 등록하고, 그다음 해인 1998년에 구글을 수전 워치츠키의 차고에서 공식 창립하게 된다.

그리고 올해, 구글은 실리콘 밸리의 경제 중심지인 팰로앨토의 한 사무실로 회사를 옮겼다.

여기까지가 에밀리와 비앙카가 갖고 온 자료를 요약한 내용이다.

“생각보다 자세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투자하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차고에서 시작했던 기업이 단숨에 실리콘 밸리로 진출했으니까요.”

에밀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고, 비앙카는 여전히 대표라는 내 직책 때문인지, 긴장한 기색이었다.

저런 모습이 당장 사라질 것 같진 않아서 구글을 투자하러 갈 때는 비앙카가 아닌 똑 부러지는 에밀리와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밀리. 내일 시간 괜찮아?”

“네, 네? 괜찮습니다.”

에밀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가지 않아도 돼.”

혹시 감기라도 걸렸으면 나한테 옮길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말해두었다.

방해가 될 거라면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나았다.

“아닙니다! 꼭 같이 가서 대표님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래. 운전은 할 줄 알지?”

“네. 고등학생 때부터 해와서 자신 있어요.”

“내일 9시. 회사 앞에서 보지. 에밀리는 오늘 먼저 퇴근해.”

운전기사를 미리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아쉬운 대로 에밀리와 가게 되었다.

에밀리와 비앙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에릭과 함께 가는 것이 가장 편했지만, 에릭은 회사의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에밀리를 골랐다.

드디어 내일, 차고에서 또 한 번의 신화를 만들어낸 구글의 두 공동 창업자를 만나게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