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490만, 495만, 500만 달러. 이제부터 일괄 10만 달러입니다!”
마이크를 잡고 큰 소리로 호가하는 솝에 사람들이 열광하며 박수를 쳐댔다.
노신사는 한 손으로는 패들을 들고, 한 손으로는 이마를 짚으며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가 말한 500만 달러일세. 이제 포기하지.”
“그럴 겁니다. 낙찰 축하드립니다.”
노신사에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패들을 내렸다.
태연한 내 태도에 노신사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말로 가지고 싶었는지 패들을 내리지 않았다.
“510만… 달러.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510만 달러. 510만 달러. 510만 달러. 아마 오늘 최고의 낙찰가일 ‘제비꽃’이 88번 참여인에게 돌아갑니다!”
솝이 경매봉을 내려치는 것으로 경매가 끝났다.
사람들이 노신사를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노신사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가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지출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패들을 내렸다.
“자네 표정이 밝아 보이는군. 회장의 지시라고 하지 않았나?”
“홀가분한 거죠. 회장님이 주신 돈이 5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긴. 태선그룹의 회장 정도면 뭐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겠군. 별 관심이 없던 모양이야.”
“신예 화가의 그림을 사는데 500만 달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겠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어차피 다른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노신사가 나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경매에 쓰려고 했던 돈은 400만 달러였어. 이 작품에 그 돈을 다 쓰고 추가로 쓸 줄은 몰랐네.”
“무리를 하셨네요.”
“뭐, 갖고 싶은 건 어떻게든 가져야 직성이 풀려서 말이지. 돈을 벌 만큼 벌고 난 뒤로 그림 수집하는 게 내 꿈이었지. 제비꽃 뒤에도 사고 싶은 그림들이 많았는데 아쉽게 됐어. 자네 페이스에 말린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도 작품이 좋으니 구매하신 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비꽃’은 전생에 형주가 그린 그림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작이다.
제비꽃의 낙찰가는 510만 달러로 한화 약 60억 원.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날이 갈수록 뛸 것이다.
내가 형주의 후원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그 배의 가격을 줘서라도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형주의 명성을 올리고 다른 그림들의 가치를 높이려면 나와 전혀 무관한 노신사에게 넘기는 것이 맞았다.
노신사는 힐긋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비꽃은 내 마음이 동해서 거금을 주면서까지 낙찰받은 거지. 돈으로 따져서 510만 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그 이상의 가치일 겁니다. 한번 믿어 보십시오. 제가 태선가 사람인 것은 맞지만 사업으로도 꽤 성공한 투자자니까요. 돈에 대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는 노신사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여전히 진행 중인 경매장을 나왔다.
***
크리스티 경매장이 보이는 노천카페의 경치가 좋아 앉아서 매도계획서를 검토하고 있는데, 솝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미국의 거리를 지켜보는 것도 즐거워서 저녁까지 기다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그 뒤에 형주에게도 연락이 와서 셋이 같이 저녁을 먹는 것으로 정했다.
경매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형주도 그 틈바구니 끼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형주를 향해 손은 흔들자 형주가 곧장 알아보고 다가왔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사야겠습니다. 510만 달러라니… 수수료를 제한다 하더라도 상상도 못 했던 돈이네요.”
형주는 아직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듯 두 손을 모아 떨며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낙찰받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내 말을 듣고, 형주는 한참 고민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
“저도 출품자 좌석에 앉아서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강빈 씨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부러 포기하신 것처럼 보였어요.”
“그게 보였습니까? 하하. 화가의 안목은 못 속이겠군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형주는 내가 진짜로 포기했다는 말에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걱정되는 얼굴로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일어나 그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누르며 일단 자리에 앉혔다.
“제가 후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지만 슬슬 알려질 테니까요. 형주 씨의 그림들을 아무리 비싸게 구입해봤자 그게 단 한 사람이라면 신뢰가 떨어지겠죠. 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형주 씨의 그림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끝내고 형주의 안색을 살폈다.
어떻게 보면 형주의 그림을 돈으로 본다는 말이었으니까.
형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돈과 예술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간에 제가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렸다면 그걸로 됐다고요. 세상을 외면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5년, 10년….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정말 좋은 그림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더군요.”
나는 말없이 형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강빈 씨를 만나기 전까지 안 좋은 생각들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아니,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강빈 씨가 제 그림을 모두 1억 원에 사간 뒤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파리만 날리던 제 갤러리가 사람들로 늘 붐비게 됐죠. 제비꽃이 상을 받은 것도 다 강빈 씨 덕분입니다.”
제비꽃은 내가 아니더라도 원래 형주가 그린 훌륭한 그림이었고 한국에 방문했던 아테네 미술상을 수상했기 때문.
나만의 공으로 돌리는 형주의 모습에 되레 당황하고 조금은 멋쩍었다.
“제가 한 거라고는 그저 형주 씨의 그림을 제값에 산 것일 뿐, 형주 씨가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은 형주 씨가 좋은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숙였던 고개를 든 형주.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에 사업가적 관점으로 제 그림을 모두 구입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때부터였습니다. 제 그림이 누군가에게 큰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무겁기만 했던 붓이 제 손처럼 가볍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형주가 할 말을 고민하는 듯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강빈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 이득을 바라보고 행했던 일이 이렇게까지 호의를 받을 일인가.
강현재의 삶에서도, 서강빈의 삶에서도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내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나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노을이 지고 거리가 노랗게 물들 때쯤 솝이 경매장의 입구에서 나왔다.
“강빈 씨!”
“경매 잘 봤습니다. 그런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영빈에게 물어봤습니다. 강빈 씨가 ‘쇼 픽쳐스’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더군요.”
“어, 그러고 보니 형주 씨. 영빈이 형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형주 씨의 그림이 경매에 출품한다는 것을 들었으면 오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요.”
형주는 재밌는 것이 생각했는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영빈이는 지금 몰두하고 있는 그림이 있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지금도 그때 지었던 표정이 눈에 선하군요.”
영빈의 표정이 상상돼서 재밌는 한편, 생각보다 유창한 영어를 쓰는 형주가 신기했다.
“형주 씨, 영어 실력이 유창하시네요. 유학을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하하. 외국에 온 것은 저번에 영빈이를 통해서 갔던 것뿐입니다. 그럴만한 형편이 안 됐으니까요. 미술 서적을 읽기 위해서 독학했어요.”
나 또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저 정도로 유창하게 영어를 쓰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솝도 발음이 좋다며 감탄했다.
“오늘 식당은 솝 씨가 소개해주시죠. 저도, 형주 씨도 뉴욕은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멋진 그림을 그린 형주씨와 그런 그림을 높은 가격에 파신 솝씨를 위해 제가 오늘은 계산하겠습니다. 비싸고 좋은 데로 가죠.”
“하하. 고급식당이라면 잘 알고 있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솝이 안내한 식당은 ‘장 쥬’로 요리사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곳이었다.
식당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 만큼 유명한 곳이라는 말에 기대가 되었다.
장 쥬는 ‘리브레이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봅니다.”
“영빈이 형이 데리고 가지 않나요?”
“하하. 제가 일방적으로 얻어먹는 건 싫어해서요. 보통 삼겹살집을 가서 소주를 기울이거나 사치를 부릴 때는 동네 횟집 가는 게 전부입니다.”
장 쥬 안으로 들어가자 돔 형식으로 된 천장과 벽 전체를 하늘색으로 도색한 것이 보였다.
파란 하늘에 구름들과 곳곳에 장식된 반짝이는 크리스탈들로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안내받은 곳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이곳은 루프탑의 전망이 끝내주는데 아쉽네요. 보시다시피 돔 형식이라 루프탑이 좁거든요. 자리가 몇 개 없어서 예약제로 받거든요.”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네? 어디를…?”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종업원이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프탑에 있는 분들과 잠시 대화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루프탑은 식사하고 있던 두 팀과 예약된 자리까지 합치면 모두 세 팀이었다.
그들에게 각각 만 달러를 지급하고 아래층에서 식사를 부탁하였다.
큰 금액이었던 터라 다들 흔쾌히 받아들였다.
루프탑에 올라온 형주와 솝은 반짝이는 뉴욕의 야경을 두 눈으로 담았다.
생각해보니 진태가 조해관을 통째로 빌렸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놀랐던 내가 이렇게 비슷하게 행동을 하다니, 진태를 닮아가나 보다.
“설마 루프탑의 모든 자리를 비우실 줄은 몰랐습니다.”
“버는 돈에 비해 쓸 일은 많이 없으니까요. 이러려고 돈 버는 것 아니겠습니까.”
솝이 감탄하며 말했다.
“재벌들이 사는 곳은 저희 같은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이군요. 우리밖에 없는 장 쥬의 루프탑이라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난간으로 다가가 뉴욕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밑에서는 비슷해 보였던 건물들의 높이가 루프탑에서 보니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엔 다 부러운 태선의 자제들도 태선가 안에서도 끊임없이 등수 매겨져 경쟁하는 것처럼.
어느새 노을마저 지고 까맣게 물든 배경 안에서 건물들이 한여름 별빛처럼 쏟아질 듯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차들이 보였다.
형주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무엇보다 조용한 게 좋네요.”
내 지시대로 음악까지 꺼버린 루프탑은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아까 형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그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난 이득만을 보고 움직이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