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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76화 (76/249)

#76화

형주는 ‘쇼 픽쳐스’가 제공해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크리스티 경매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림들은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전시하는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책자에 없던 그림들도 볼 수 있었다.

전생에서 알고 있던 화가의 그림이 있나 둘러보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모르는 화가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형주가 그린 제비꽃을 보고 돌아가려는데 익숙한 한국 이름이 들렸다.

“어? 영빈!”

뒤를 돌아보니 갈색 곱슬머리를 한 백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긁으며 영어로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착각했어요.”

남자의 오른쪽 가슴에 위치한 명찰에는 영어로, ‘경매사’라고 적혀 있었다.

“괜찮습니다. 혹시 서영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 서영빈! 맞습니다. 혹시 영빈이 말하던 동생인가요?”

“맞습니다.”

“영빈이 가끔 당신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자신에게 아주 믿음직한 남동생이 있다고 말이죠.”

나에게 잔소리를 듣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밖에서는 칭찬을 하고 돌아다녔나 보다.

그보다 영빈과 내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하. 제 얘기까지 하다니. 꽤 친한 사이 같네요.”

“그럼요. 영빈이 크리스티 경매장에 얼마나 자주 왔는데요. 영빈은 우리 경매장의 큰손 중 한 명입니다.”

영빈은 재벌가답지 않게 어딘가에 돈을 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작품 투자에 대부분의 돈을 쓴 것 같다.

영빈이 갖고 있는 미술관은 가본 적이 없었는데, 경매사가 직접 큰 손이라고 하니 그곳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아! 영빈에게 들었는데 이 작품도 한국 화가가 그렸다고 하더군요. 이름이….”

“형주입니다. 김형주.”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하하. 제가 경매를 맡은 그림인데 민망하네요. 아, 저는 미술경매사 솝입니다. 반가워요.”

‘우연치 않게 만난 사람이 형주의 그림 경매를 맡은 경매사라니…’

“저는 강빈입니다. 작게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솝은 작가의 이름을 몰랐던 게 여간 머쓱했던지 제비꽃에 대한 감상을 읊었다.

“제비꽃.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저 또한 마음에 든 그림입니다. 그림 안의 저 아름다운 꽃밭을 보다 보면 빨려들어 갈 것 같습니다. 의도적인 색의 부조화가 틈을 만들어서 전시객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린다고 해야 될까요.”

“좋은 표현이군요.”

미술경매사라 그런지 표현이 남달랐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형주의 작품 경매를 맡았다고 하니 맞장구를 쳐주었다.

정리하자면 솝이 보기에도 제비꽃의 가치는 꽤 있을 거라는 소리 같다.

“당신은 투자를 한다고 했죠? 이번 경매에도 참여할 생각인가요?”

“맞아요. 그중 제비꽃 경매에 집중할 생각이긴 합니다.”

뭐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다른 그림 경매에 참여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내가 아는 유명한 그림이 온 김에 등장하면 좋으련만.

어쨌든 지금은 제비꽃이 가장 중요하다.

“음… 이 그림은 책자에 소개되지도 않았으니 비싸 봐야 5만 달러 정도 될 겁니다. 책자에 실리지 않은 작품 중 5만 달러를 넘은 작품들은 극히 소수거든요. 영빈의 친구라고 하니 드리는 작은 팁입니다.”

“하하. 이거 고마운데요? 그럼 저도 당신에게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솝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은 오늘 처음 왔잖아요. 무슨 팁을 주신다는 거죠?”

“저는 제비꽃을 최소 100만 달러 이상에 낙찰할 겁니다. 당신 주변에 이 경매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세요. 제비꽃을 갖고 싶다면 준비 단단히 하고 오라고 말이죠.”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고 말하는 나를 보며 솝이 살짝 웃었다.

“네? 강빈 씨. 아무리 좋은 작품이더라도 신진 화가에게 그렇게 높은 금액이 불리지는 않아요. 쇼 픽쳐스에 초대되었다고 해서 모든 그림이 높은 가격에 경매되는 것은 아닙니다.”

솝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틀렸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전생에서도 제비꽃의 경매가는 10억 원을 넘겼으니까.

그리고 오늘, 나로 인해 그 이상을 찍게 될 것이다.

“경매는 처음이지만 제비꽃의 가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두고 보시죠.”

***

크리스티 경매장의 지상은 경매 시작 전에 미리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지하로 실제 경매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크리스티의 경매방식은 영국식 경매를 따르며 흔히 알려진 공개 입찰 방식이었다.

출품자는 경매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형주는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고 들었다.

반원형태로 된 경매장은 층층이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내가 앉은 곳은 상단에서도 가운데에 위치했다.

무대는 하얀색을 바탕으로 빨간색 글씨로 ‘Christie's’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됐다.

“이번 달도 돌아온 쇼 픽쳐스! 오늘 진행을 맡게 될 크리스티 경매장의 대표 경매사. 솝 파커라고 합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솝이 앞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짧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럼 첫 상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요즘 주목받는 신예 화가죠. 올리버 가르시아의 ‘언덕, 소’입니다.”

처음 듣는 화가였지만 주목받는 게 사실인 듯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울렸다.

무대 옆에서 남자 한 명이 검은색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남자는 솝 옆에 있는 이젤에 녹색 천을 두른 그림을 올려놓고 퇴장했다.

솝은 두 손으로 천천히 녹색 천을 들어 올렸고 그림이 드러났다.

“올리버 가르시아의 ‘언덕, 소’입니다. 추정가 1만3천 달러! 천 달러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일괄 500달러입니다.”

아까의 함성 소리는 그냥 예의상 했던 것인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처음만 빠르게 넘어가고 7천 달러가 넘어가자 속도가 느렸다.

“... 7500, 8000, 8500달러.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8500달러. 8500달러. 8500달러.”

솝이 경매봉으로 단상에 놓인 나무판을 치며 마무리되었다.

8500달러를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약 천만 원 상당.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쇼 픽쳐스에서 이런 가격이라니…

심지어 추정가에 한참을 못 미쳤다.

모든 그림이 높은 금액에 낙찰되는 것은 아니라는 솝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다음 진행할 상품 역시 신예 화가입니다. 이 작품으로 아테네 미술상까지 수상했다고 하죠. 한국 화가인 김형주의 ‘제비꽃’.”

드디어 시작된 형주의 그림에 몸을 바짝 앞으로 붙이는데,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풍채가 거의 영균만 한 노신사였다.

차려입은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관심이 가긴 했지만 지금은 눈앞에 경매에 집중하기로 했다.

“추정가는 만 천 달러입니다. 천 달러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일괄 500달러입니다.”

솝이 추정가를 부를 때 내 쪽을 올려다본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인가.

솝에게 최소 100만 달러라고 하긴 했지만 추정가 자체를 내 한마디로 올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는 것이 더 극적이니까 오히려 좋았다.

‘언덕, 소’와 달리 제비꽃은 초장부터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술 분야에서 권위 있는 상인 아테네 상을 수상한데다가, 제비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점이 있었다.

눈에 띄는 사람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와 머리가 금발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여자, 온갖 명품을 걸치고 있는 앳된 남자 정도였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가격은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1000, 1500, 2000… 7000… 9500, 만. 이제부터 일괄 1000달러입니다.”

아까와는 비교되지 않는 속도에 사람들은 흥미롭게 제비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노신사는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만 3천, 만 4천… 2만 천… 3만. 이제부터 일괄 2000달러입니다.”

추정가를 넘기기 시작할 때부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내가 나섰다.

누군가가 패들을 들 때마다 87이 적힌 내 패들을 들었다.

내가 손에서 패들을 내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뒤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누구든 패들을 들기만 하면 내가 곧바로 패들을 드니 포기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빨간 립스틱을 칠한 여자가 한숨을 쉬며 떨어져 나갔고, 앳되어 보이나 한눈에 봐도 값비싼 옷을 두른 남자는 겉옷을 벗어 한 손에 걸친 채로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까지 고개를 저었다.

“16만 달러. 세 번 호가 하겠습니다. 16만… 다른 분이 계시네요.”

솝의 시선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옆자리를 쳐다보자 노신사가 조용히 88이 적힌 패들을 들고 있었다.

“다시 이어서 하겠습니다. 16만 5천, 17만 ….”

노신사는 나처럼 패들을 손에서 내리지 않았고 호가는 순식간에 100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솝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추정가가 잘못된 게 아니냐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신사는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포기하게.”

“이거 어떡합니까. 저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요.”

자극했음에도 나를 쳐다보진 않았지만, 옆모습만으로도 그가 불타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저 그림을 가질 생각이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둘 중 한 명은 파산하겠네요.”

그제서야 노신사는 나를 쳐다봤다.

입술 위로 기른 콧수염과 뭉툭한 코, 길쭉한 눈매를 한 노신사의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전생에서 형주의 그림을 낙찰해 간 사람이겠지. 그때 봤던 기사로는 단순한 졸부였었던가 아마?’

어쨌든 덕분에 제비꽃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으니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무대에서 솝이 계속해서 호가하는 동안 노신사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왜 제비꽃을 가지려는 겁니까?”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군. 젊어 보이는 친구가 무슨 조예가 있다고 저 그림을 노려?”

단순히 형주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제비꽃을 보는 척 고민했다.

형주의 후원자인 내가 제비꽃을 낙찰받게 된다면 뒷말이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그림은 노신사에게 넘겨야 한다.

전생에서 노신사가 최종적으로 낙찰했던 금액은 100만 달러 언저리.

얼마까지가 그가 부를 수 있는 최대치일까.

“저는 그림 그런 거 잘 모릅니다.”

“뭐라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노신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다. 심지어 지금 경매에 참여하고 있는 돈도 제 돈이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 돈이 아니라니. 설마 부모의 돈인가?”

노신사의 말에 피식 웃었다.

“부모 돈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쉽게도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회장님 돈입니다.”

그사이에도 호가는 계속 올라가고 있어서 150만 달러를 돌파하고 있었다.

빠르게 호가가 올라가는 경매 특성상 사람들은 지루해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노신사와 내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노신사도 슬슬 부담되기 시작했는지 내 얘기를 들으며 호가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네 돈이 아니라면 부를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겠군. 그래서 얼만가? 회장이 저 그림을 낙찰하라고 준 돈은.”

“500만 달러.”

노신사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을 뱉고 노신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포기하려는 기색이 보인다면 잘못 말했다고 할 예정이었다.

노신사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허풍떨지 말게. 그 정도 돈을 쓰면서 직접 오지도 않았다고? 대체 어떤 그룹의 회장이길래 그만한 돈을 맡긴단 말인가?”

자신이 그런 말에 속을 것 같냐는 표정으로 노신사는 이어 콧방귀를 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그룹이냐니.

한국 안에서 압도적인 재계 서열 1위이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그룹.

‘할아버지. 이번 한 번만 이름 팔게요.’

나는 태선증권사의 명함을 꺼내 노신사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태선그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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