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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75화 (75/249)

#75화

“아니. 나는 자네가 한 말이 믿기지 않아서 그렇지.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달리 할 말이 뭐가 있겠나?”

“알아들었으면 됐네. 대신 조건 두 개만 들어주게.”

“그럼 그렇지. 말해 보게.”

두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태가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협상이든 진태는 항상 이득을 쟁취했다.

“자네가 최근에 받은 정부 사업권 있지 않나. 그걸 태선에 넘기게.”

진태가 말하는 것은 천일그룹이 최근에 따낸 ‘디젤기관차’ 관련 사업권이다.

사업 규모는 약 3,000억 원.

엄청난 금액이기는 했지만, 공단 조성과 더불어 철도연결까지 따낸다면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두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는 가능하지. 다른 건 어떤 건가?”

“남북경협이 언론에 공개되면 이산가족도 상봉하지 않겠어? 북한에 소 떼 방북이다 뭐다 하면서 자네가 그 행사를 맡게 될 것 같은데, 그걸 우리 태선택배에서 담당하는 걸로 하자고.”

“뭐? 그게 끝이야?”

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완은 이 거래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라 봤자 떨어지는 이득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대외적인 이미지니까.

공단 조성이나 철도연결 사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회장.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거야? 자네 성격에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텐데… 혹시 내 고향 사업이라서 그래?”

두완은 혹시 모를 기대감에 진태를 쳐다봤고 진태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야, 이 사람아. 우리가 뭐 보통 인연인가? 입에 거미줄 칠 때부터 코를 맞댄 사인데 말이야. 다음에는 자네가 양보해. 이번에는 내가 할 테니.”

두완이 일어나서 진태를 끌어안으려는 것을 진태가 밀어냈다.

두완은 진태의 말 바뀌기 전에 확실하게 해놓고 싶었다.

“이거 오그라들게 왜 이래? 아무튼 얘기는 이걸로 끝내지. 자네는 남북경협을 먹고 나는 대신 기관차 사업을 먹는 걸로.”

“알겠네. 내 매번 말로만 빚 갚는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약속하지. 그런데… 청와대 쪽이랑은 얘기된 건가?”

진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같은 사업가끼리 이거 왜 이래? 기관차 사업 먼저 넘겨. 주는 건 그다음이야.”

두완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 알았네. 하하. 내 금방 처리하지. 곧 연락하겠네.”

“그래. 좋다고 쓰러지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게.”

진태는 돌아가는 두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쓰러지지 말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남북경협사업이 중단되고 피해가 고스란히 두완에게 향한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게 뻔하니까….

“천회장. 미안허이.…”

***

지금 눈앞에서 진태가 전화하고 있는 상대방은 김종필 국무총리였다.

“예. 저는 손 떼기로 했으니까 대신 천 회장 잘 좀 부탁합니다.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양보했는데 천회장이 먹어야 되지 않겠어요?”

전에 들은 바로 비서실장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총리까지 닿아 있을 줄은 몰랐다.

진태는 말 몇 마디로 손쉽게 남북경협사업의 핵심 기업을 태선에서 천일그룹으로 바꿨다.

진태가 가진 힘의 진면모를 눈앞에서 목도하니 감탄만 나왔다.

“누구라고? 아. 김총리님 조카 이름을 대뜸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허허. 아무튼 알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전하세요.”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 진태는 나를 바라봤다.

“기관차 사업은 손에 들어왔고 남북경협도 천회장한테 넘겼어. 뭐 당장에 결과는 나오는 건 아니지만 네 말대로 되었으니 전에 말한 걸 들어주마.”

“제가 말했던 거라면…”

“위쪽 뒷배 말하는 거 아니냐. 내가 너를 아낀다고 하면 다 알아들을 게다. 처음 연락은 채규 통해서 하고 청와대 쪽은 쉽게 만날 수 없으니까 전화로만 통해.”

“예. 감사합니다.”

진태의 뒷배까지 얻었으니 이제 한국에서 당분간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겼다.

***

한국은 외환위기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었고 달러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했다.

기업들은 부족한 달러에 시달리고 있었고, 쓰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업들이 연달아 부도를 냈다.

달러를 보유하는 것만으로 한국 안에서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5년간 재워놨던 독을 깨기 위해 미국으로 가고 있다.

창밖은 맑은 하늘 안에서 양떼구름이 줄지어 펼쳐져 있었다.

“에릭. 지금 쉬어 둬. 미국에 도착하면 쉴 시간도 없을 거야.”

대답이 없자 에릭이 앉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에릭은 창틀에 기대어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신없이 달려온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릭 장, 황미연 비서도 나와 같이 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내 일을 도왔다.

‘미국 일만 정리되면 휴가라도 보내줘야겠네.’

미국으로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현재 아마존닷컴의 주가는 내가 목표로 했던 주당 110달러에 거의 근접했다.

시가총액 510억 6천만 달러.

내가 가진 지분이 10퍼센트니 50억 달러가 넘는 달러를 받으러 미국에 가고 있다.

에릭은 미국에서 가장 바쁜 CEO 중 한 명으로 제프가 뽑혔다며, 제프와 미팅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예외다.

지분 10퍼센트나 보유한 대주주니까.

거기다 이번엔 형주의 그림 경매에도 참석한다.

바쁜 일정이 예상되는데, 어느덧 차가 공항 주차장에 도착했다.

“에릭. 일어나.”

“에… 예?”

에릭이 비몽사몽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웃음이 나왔다.

***

드디어 미술 경매 중 최고가가 나왔다는 미술 경매, 쇼 픽쳐스가 개최될 크리스티 경매장에 도착했다.

에릭에게는 아마존닷컴과 GB인베스트먼트가 위치한 시애틀에 미리 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쇼 픽쳐스의 원래 이름은 ‘쇼 유’로 시카고에서 진행된 희귀하고 가치 있는 중고 서적 경매가 그 시작이었다.

이후 보석과 다양한 물품들을 선보이다가 미술 경매로 완전히 전환한 뒤에 쇼 픽쳐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쇼 픽쳐스는 매달 다른 경매장에서 개최되었음에도 단골이 많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경매가 시작되기까지 3일이 남았음에도 사람들이 들끓고 있는 게 인기를 증명했다.

쇼 픽쳐스의 전문가가 나서서 직접 검증한 작품들만 경매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라면 누구나 성공의 발판으로 꿈꾸는 무대이기도 했다.

미리 연락받았던 형주가 크리스티 경매장 입구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강빈 씨! 연락은 받았지만,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유일하게 후원하는 화가가 나오는데 구경은 해야죠.”

물론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은 건 아니었다.

쇼 픽쳐스에 참여한 목적은 형주의 그림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다.

내가 보유하고 있고, 앞으로 갖게 될 형주의 그림들이 선물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그 가격을 높이는 방법이 가장 쉽다.

“그보다 경매 시작까지 3일이 남았는데 사람들이 상당히 많네요. 경매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꽤 많나 봐요?”

“미리 와서 자신이 사들일 그림들을 미리 살피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관광의 목적이죠. 이 정도 금액의 경매를 진행하면서 공개 경매하는 곳은 많지 않으니까요.”

형주 또한 나처럼 이곳에 처음 왔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자세하게 알고 있어서 놀랐다.

“형주 씨는 쇼 픽쳐스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

“영빈이가 여행비를 대줘서 같이 한 번 왔었습니다. 저는 돈이 없어 경매에 참여하진 못하고 구경만 했지만요. 하하.”

형주는 괜히 머쓱했는지 웃어 보였다.

그보다 영빈은 그림만 그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곳도 찾아오는 것을 보니 꽤나 활동적인 모양이다.

“이게 이번 달에 나온 책자입니다.”

형주가 쇼 픽쳐스라고 적힌 책자를 건넸다.

크리스티 경매장이 뉴욕이기 때문인지 이번 달에 열린 이름은 ‘쇼 픽쳐스 인 뉴욕’이었다.

화려한 책자 안에는 실제 경매에 나올 그림 중 화제를 불러 모은 그림들의 사진과 예상 낙찰가가 적혀있었다.

그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형주의 그림을 보려고 책자를 넘기는데 끝까지 넘겨도 형주의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어? 형주 씨의 그림이 없는데요?”

“아, 책자 안에 소개된 그림들은 쇼 픽쳐스에 한 번 이상 출품했던 화가들이나 추정가가 높은 그림들이에요. 저는 아직… 하하.”

“이거 괜히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그림의 가치가 돈으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곳에 오게 된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싱긋 웃는 형주는 전혀 괘념치 않아 보였다.

“여기서 가장 높은 낙찰가가 예상되는 작품들이 뭐죠?”

“음… 이번 쇼 픽쳐스에서는 눈에 띄는 작품은 없습니다. 매달 개최되기 때문에 늘 값비싼 그림이 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형주 씨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네요. 형주 씨가 그린 제비꽃이 최고 낙찰가를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책자에도 실리지 않은 작품이 최고 낙찰가를 받은 전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형주는 그럴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늘 그를 경매가 최고의 낙찰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돈이야 차고 넘쳤다.

다음 주에 매도할 아마존닷컴의 지분만 해도 한화로 수조 원은 되었으니까.

“들어가시죠. 제가 소개라도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크리스티 경매장 안에는 그동안 거래되었던 물품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익숙한 그림들도 꽤 보였다.

이름을 알만한 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 정도였다.

크리스티 경매장 자체는 미술 경매만 취급하는 것은 아닌 듯, 보석이나 옷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 와서 놀란 게 저 드레스의 가격이었습니다.”

형주가 가리킨 곳에는 드레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파란색 바탕에 수많은 다이아들이 드레스 곳곳에 박혀서 반짝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요.”

“네. 마를린 먼로의 이브닝 드레스라고 하더군요. 낙찰된 가격이 2,100만 달러라고 합니다.”

“2,100만 달러요? 그럼 저 다이아들이 다 진짜입니까?”

“하하. 아니에요. 전부 모조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가격은 진짜 다이아몬드 수준이었지만요. 원가는 10만 달러도 안 되었다고 하네요.”

2,100만 달러라면 지금 한화로 약 260억 원이었다.

아무리 ‘마를린 먼로’라지만 원가의 200배도 넘는 가격에 낙찰하다니…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재력도 보통은 아닌 모양이었다.

“형주 씨 그림은 얼마에 낙찰될 것 같습니까?”

“음… 강빈 씨가 제 그림을 1억 원에 사 가셨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분에 넘치는 가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하. 2만 달러 정도에만 낙찰받아도 성공 아닐까요?”

천진한 형주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저랑 내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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