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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73화 (73/249)

#73화

청와대 쪽에서는 이미 남북경협사업의 사업권 분배를 위한 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진태가 줄 대고 있는 신종도 비서실장은 자신의 수하를 사업권 분배 담당자 중 한 명으로 배정했다.

진태는 신종도 비서실장을 통해서 진행되는 일들을 낱낱이 듣고 있었다.

공단 조성과 관광사업에 대해서는 아침에 언질도 받아둔 상태였다.

언론에서는 북한이 중국의 원조를 받는다니, 한국과 교류하지 않을 것이라느니 떠들어댔지만, 일방적인 지원에 가까운 한국과의 경협사업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도 서재를 찾아온 두완을 보며 진태가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오라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안 오더니 제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네. 예끼! 이 사람아.”

“서회장.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딨나. 내가 명절 때마다 보낸 소만 몇 마리인지는 알고?”

“소 잡는다고 채규가 그 고생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 흐흐. 자네도 그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강원도 출신이었던 채규는 소를 잡아본 적이 있다며 두완이 보낸 소를 직접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그 소가 일반적인 소보다 가죽이 두껍고 크다는 것에 있었다.

한우 중에서도 천 마리에 한 마리꼴로 나온다는 귀한 소는 손질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두완도 그런 채규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껄껄대며 웃었다.

“그 소가 보통 소여? 돈 있어도 그런 건 못 구해.”

“아, 그래서 내가 자네랑 골프도 치고 좋은 거 있으면 가장 먼저 알려주고 그런 거 아니겠어?”

진태의 말에 채규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대답했다.

“좋은 게 소보다 좋은 건지는 까봐야 알지 알겠어? 청와대에서는 뭐래?”

“개성에 공단 조성, 금강산 관광사업. 내가 언질 받은 건 일단, 이 두 개네. 나머지는 아직 작업도 안 끝났다고 하니 기다려야지.”

“금강산이라… 관광 쪽도 괜찮긴 하지만 핵심은 공단이겠구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북한에 공단을 조성하자는 것은 1990년대 초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고 한국의 경쟁력 있는 상품들을 통해 북한 역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취지였다.

개성에 물산, 전자를 비롯한 공장들이 들어서게 된다면 세금 감면과 더불어 인건비 절감까지 장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상당했다.

“에헤이. 천회장. 그래도 먹는 데 명분이 있어야지. 개성에는 태선이 먼저 가서 판 깔아놓을 테니까 자네는 금강산 구경이나 하다가 들어오게.”

금강산 관광사업은 기업홍보와 대외적인 이미지를 챙길 수는 있겠지만, 배를 통해서 돌아가야 한다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두완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진태를 바라봤다.

“노른자는 홀라당 다 먹고 남은 흰자를 먹으라는 소리 아닌가? 서회장, 이러기야?”

“태선이 먼저 가서 단지 싹 다 조성해 놓을 테니까 그 뒤에 들어오라는 거야. 우리 공장 다 짓고 나면 그다음은 천회장한테 준다는 거니까 섭할 필요가 없지.”

“그 말 꼭 지켜야 할 걸세.”

진태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조성에 관해서 챙길 수 있는 이득도 수두룩했지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천회장 앞에서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천회장도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이득을 챙긴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보다 작년에 소 끌고 북한 갔다 왔지 않아. 가족 소식 들은 건 없고?”

“갔다 온 지가 언젠데 인제 와서 물어?”

“자네가 그 뒤로 말을 안 하니까 내가 알 턱이 있나. 궁금해서 그래. 말해 봐.”

진태는 젊을 때 첫 아내를 잃고 곧이어 재혼한 자신과는 달리, 두완은 이북에 아내를 두고도 재혼은커녕 첩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완은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말을 시작했다.

“북한에 가기 전에 이미 브로커 통해서 소식은 들었네. 아내는 죽었고 첫째 놈은 이미 옛날에 중국으로 탈북했다는데 그 뒤로 행방불명이라네. 사람을 보내긴 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고 있어.”

“쯧… 금강산 자네한테 넘길 거니까 죽기 전에 고향 풍경이나 많이 담아 둬. 그래야 죽어서 제수씨랑 한 마디라도 더 섞을 거 아닌가.”

“알겠네. 이 사람아.”

두완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겉으로는 진태와 터놓고 지내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끝없이 이익을 계산하며 수 싸움을 하던 인물이 두완이었다.

그런 두완이지만 진태는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천회장. 이거 미안하게 됐네. 이번에도 좋은 건 내가 다 먹어야겠어.’

***

진태의 저택을 나오자마자, 우수에 젖어있던 두완의 표정은 다시 사업가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이북이나 전처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어필이 진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것은 두완도 알고 있었다.

만약 남북경협사업이 진행된다면, 두완이 챙기고 싶었던 것은 공업단지 건설과 철도 사업.

금강산 관광사업이라 해봤자, 기업의 대외적 이미지만 높여줄 뿐 별다른 수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공업단지 건설은 진태가 가져가겠다고 못 박아두었으니 남은 것은 철도 사업이다.

차에 타고 휴대폰을 들었다.

“천두완이네.”

“처, 천회장님. 저 지금 청와대입니다.”

“짧게 하고 끝내지.”

통화를 받은 사람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다.

신종도 비서실장 밑에서 일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갖고 있지 않은 인물.

“남북사업에 관해서 얘기 나온 거 없어?”

“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비서관이 말을 이었다.

“지금 따로 얘기 나온 건 없습니다. 남북사업 관련해서 얘기 나오면 제가 먼저 연락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시간대에 전화하시면 곤란합니다.”

“비서관님.”

“예? 말씀하시죠.”

두완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높여 부르자 비서관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내가 찔러 준 돈이면 강남의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을 거요. 이게 틀린 말이요?”

“예? 그게….”

“근데 당신이 하는 게 뭐가 있어? 나 방금 서회장 만나고 오는 길이야. 다 알고 전화한 거라고.”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두완은 더 몰아붙였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 없네. 자네 집도 내 차명으로 돼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죄송합니다. 아직은 확정된 게 없어서 조심스러웠습니다. 확실하게 진행되는 걸로 분위기가 바뀌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두완은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수석비서관이 융통성이 없는 건지, 괜한 뒤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것인지 몰라도 뒷돈 먹인 값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서회장에게 듣지 않았더라면 다른 쪽에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회까지 처먹을 동안 나는 몰랐을 거야. 받은 게 있다면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명심하겠습니다.”

“공단 조성이랑 관광 사업권은 이미 넘어갔다며.”

“기획이 끝나가는 단계지만 아직 결정된 사안은 없습니다.”

“너 지금 나랑 말장난하냐?”

“….”

“남북사업하는 것도 서회장 한 명 알고 있고 준비도 혼자 다 할 텐데 결정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거 말고 철도랑 도로는 말 나온 거 있어?”

“논의는 되고 있는데 아직 확정이라고 말씀은…”

“야, 이 새끼야! 논의든 농이든 지금부터 뭐라도 나오면 전부 다 보고해. 네가 처먹은 돈 몇 배로 뱉어내기 싫으면 처신 똑바로 하라고. 너희 집안 통째로 날리는 거 나한텐 일도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대답도 듣지 않고 휴대폰을 던졌다.

진태가 먼저 사업권을 선정한다고 하더라도 가질 수 있는 사업의 수는 정해져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좋은 사업권을 따느냐다.

이미 진태가 단물을 빼먹은 개성공단에 얹혀서 천일그룹 공장을 유치해 봤자 큰 이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금강산 관광사업으로 만족하기에도 그동안 들인 정성이 있다.

남은 사업 중 큰 건은 철도와 도로 연결인데 그것만은 어떻게든 따내야 한다.

“서진태. 그놈을 어떻게 구슬린다….”

두완은 머리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네 말이 맞았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찾아간 진태의 서재에서 들은 말 또한 갑작스러웠다.

“할아버지. 저 방금 왔습니다. 사정은 설명해주셔야죠.”

“남북경협사업. 네 말대로 지금 밑바닥 작업 들어갔어. 청와대 쪽에 연락 돌리고 공단은 우리 태선이 먹기로 거의 확정되었다.”

진태에게 남북사업에 대해서 말을 꺼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공단 조성을 확정받은 모양이었다.

대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길래 이게 가능한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그렇게 큰 건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에서 할아버지밖에 없을 겁니다.”

“말 한마디는 무슨 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인데. 그리고 내가 못 먹는 사업도 있긴 있을 게다.”

물론 못 먹는 것은 사업성이 떨어지는 자질구레한 것들이겠지만.

그것보다 그런 엄청난 정보를 얻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진태에게 기가 찼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남북사업한다는 것도 알고 있던 놈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태는 평소와 같이 내가 정보를 이용해 무엇이든 준비를 해놓았을 거로 생각했겠지만,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남북경협은 몇 년 지속되지도 않고 개발 도중에 중단된다.

정부지원과 세금 감면을 깔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태선에서 개발에 참여한다고 해서 큰 손해를 보진 않겠지만, 중단될 개발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손해였다.

이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지금은 얻어내야 할 게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미 사업권 따내셨는데 제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인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득이라면 할애비고 뭐고 사리 분별도 하지 않고 달려드는 놈이.”

진태의 말에 QL반도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진태와 담판을 벌였던 것이 기억났다.

진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가 청와대에 줄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북한 쪽에 누구 하나 심어놓았겠어요? 저 같은 사람이야 테이블 열리면 그때서야 달려가는 거죠.”

“흐흐. 그럴 줄 알았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한 거였어. 청와대 쪽에 줄이 필요하다 이거지?”

“할아버지가 아니면 제가 어디서 그런 뒷배를 얻겠어요?”

진태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맞혔다.

돈만 많은 졸부는 권력을 쥐지 못한다.

재벌들이 가진 돈을 뿌려서라도 정계, 법조계에 줄을 대는 이유가 있다.

앞으로 기반을 더 단단히 구축하고 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진태의 연줄이 필요했다.

진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개해주는 건 어렵지 않아. 내 이름으로 만난다면 보증도 확실할 거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무슨. 대신 조건이 있다.”

하… 역시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진태는 무언가를 내줄 때마다 꼭 하나씩은 걸고넘어졌다.

“아까 태선이 공단을 먹었다고 했지? 그럼 이제 큰 건수 중에 남은 것은 철도 사업일 게야. 준만이 도와서 네가 따 와라.”

“그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진태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건방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다음 말을 들으면 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남북경제협력사업은 안 될 사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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