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을 만한 사람과 정치계, 법조계와 관련된 사람들.
형주의 그림은 그런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형주가 아테네 미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위대한의 위대한 아트갤러리.’
여전히 구린 이름에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이전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곳곳에 금이 가 있던 벽은 깔끔하게 도배되어 있었고 전에는 없던 소파와 환풍기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전과 같은 점이라면 갤러리 중앙에 앉아서 그림을 바라보는 형주였다.
형주에게 다가가서 꽃다발을 건넸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한국에는 일찍 들어오셨네요.”
“어? 강빈 씨! 오랜만입니다. 또 꽃다발을 들고 오셨네요. 하하.”
“이전에는 첫 전시회기념, 이번에는 수상 기념입니다. ‘제비꽃’으로 수상하셨잖아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센스가 없어서 제비꽃으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들고 왔습니다.”
“아닙니다. 마음에 들어요. 꽃은 화병에 꽂아둘게요.”
꽃다발을 받아든 형주는 한쪽에 비치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곳에는 이미 꽃다발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그의 명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무명 화가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다 강빈 씨 덕입니다. 강빈 씨가 저를 후원해주신 뒤로 정말 모든 게 바뀌었어요. 가끔은 금이 간 벽을 보며 느꼈던 감성이 그립긴 하지만요. 너무 궁상맞나요? 하하.”
형주의 얼굴에는 예전에 느꼈던 수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아 보였다.
“이전에는 형주씨의 그림이 도색되지 않은 벽과 어울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매 순간 달라지듯 그림도 매 순간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지금은 그때와 다른 감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형주 씨가 매 순간 어떻게 달라지는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형주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매달 미국에서 열리는 미술경매인 쇼 픽쳐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비꽃을 출품하지 않겠냐고요. 제가 강빈 씨에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형주 씨의 후원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통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강빈 씨….”
형주는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물론 형주가 그리고 판매하려는 모든 작품의 구매우선권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도 제비꽃을 내가 구매하지 않고 경매장에 넘긴 이유는, 형주 그림을 세간에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19개의 작품 역시 새롭게 평가될 테니까.
“형주 씨는 작품활동에만 전념해주시면 됩니다. 그 외에 필요한 지원은 말씀드린 대로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영빈이를 만난 것도, 그래서 강빈 씨를 소개받은 것도 모두 천운이군요.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형주는 이내 솔직한 이야기까지 전해왔다.
영빈은 자신을 인간적으로 좋아해서 하는 제안이었다면 나는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본 것 같았다고.
그래서 후원을 받아들인 거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신뢰가 잘 느껴졌다.
그렇게 형주와의 한참 대화를 마치고 다시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제비꽃 앞에 서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홀린 듯이 제비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천일그룹의 회장, 두완이었다.
“천회장님. 또 뵙습니다.”
두완이 돌아보더니 반갑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금방 보는구나. 김화가의 후원자라는 게 사실이었어. 젊은 묘화가 끝나고 김화가에게 그림은 잘 전달받았네.”
형주에게 따로 말해둔 대로 젊은 묘화가 끝난 뒤 두완에게 ‘창해’를 잘 넘긴 모양이었다.
두완이 뒤쪽을 바라보자 형주가 아는 체를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또 이 그림을 보고 계시는군요.”
“뒷방 늙은이가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집에 있기 적적하니 산책이나 나온 게지.”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도 회장님께 잘 보이려 애쓰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 아무튼 이 그림.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이 창창한 꽃밭 뒤에 그려진 그림은 뭘까 상상하게 만든다네.”
두완의 말대로 형주의 ‘제비꽃’은 화려한 꽃밭을 그려놓았지만 기이하게도 꽃밭 뒤에 무언가 더 그려져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꽃들의 배치와 흙의 색 때문에 그러한 착시를 주는 것이겠지만 아무리 봐도 의도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하시면 형주 씨한테 물어볼까요?”
“됐네. 뭐든 개인적인 해석이 가장 아름답고 오래가는 법이야. 감상을 깰 필요 없지. 그나저나 이 그림이 경매 쇼에 나간다지?”
“네. 미국에 있는 쇼 픽쳐스라는 미술 경매에 출품한다는군요. 들어보셨습니까?”
두완은 이채가 띄는 눈으로 놀랍다는 듯 뒤에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는 형주를 쳐다봤다.
“쇼 픽쳐스라면 미술 경매 중 최고가가 나온 곳으로 유명한 곳 아닌가! 그곳의 초대를 받았다면 이제 이름을 알리는 것은 순식간이겠어. 저 젊은 화가는 곧 명망 높은 화가가 될 걸세.”
“그렇다면 천회장님께서 갖고 계신 그림의 값어치도 올라가겠네요.”
“하하. 내가 전에 빚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라고 했잖나. 값어치는 내 톡톡히 치름세. 그보다…”
천회장의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고는 말을 이었다.
“김화가는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보잘것없는 화가라고 들었네. 그런 사람을 찾아내다니 정말 대단하군그래. 사업도 다를 바 없어. 장사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목 좋은 자리라면, 예술과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목이야. 자네가 성공한 이유를 알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칭찬하는 것을 싫어해. 이것만은 진태 그놈과 똑같지. 허튼 말은 하지 않는다는 소리네. 그것보다…. 흠흠.”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마는 두완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알았다.
“자네 혹시 점찍어 둔 처자가 있나?”
“네?”
“요새 말로 여자친구가 있냐, 그 말일세.”
“없긴 합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내 대답에 두완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었네.”
괘념치 않게 넘기려는 두완의 태도에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
진태는 최근 들어 두완과의 만남이 잦아졌다.
“자식놈 중에 믿을 만한 놈 하나 없어.”
“이거 보게, 서회장. 명실공히 태선전자라는 왕좌를 유지하고 있는 재만이가 있잖은가.”
자식 중 가장 많이 성과를 가져온 재만도 이제는 욕심에 눈먼 자식새끼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태는 이러한 이야기를 두완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준만이 그놈은 요새 달라 보이기는 해. 물산 맡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지켜봐야겠지만. 기대가 안 되는 건 사실일세.”
“이 사람아. 지금까지도 자식들을 평가하고 능력 따라 차별하고 있나? 나를 보게. 손주들이 제집처럼 놀러 오질 않나.”
“그러니까 천일그룹이 밑바닥에 박혀서 못 올라오는 거 아니겠어? 사업은 정으로 하는 게 아니야.”
“이 사람이 지금 누굴 놀려?”
두완에게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털어놓은 말은 진심이었다.
자식들 모두 어렸을 때부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녔고, 사업의 눈을 키워줬다.
그나마 재만이를 제대로 된 사업가로 키워내기는 했는데 재만은 받은 것에 안주하려고만 하지, 자신처럼 공격적으로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태선이 내 대에서 성장을 멈추고 쇠락하는 거. 내가 걱정하는 건 그거 하나야. 평생을 일궈온 내 회사, 내 그룹일세. 이대로는 눈 못 감지.”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될 문제 아닌가.”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자네가 못할 게 뭐가 있냐는 말일세? 자식 중에 인물이 없으면 손주한테 물리면 될 테고, 손주 중에서도 없으면 외부에서 데려오면 되잖아.”
“내 아무리 자식들을 치대도 후계는 핏줄로 이을 생각이야. 그리고 손주를 언급했어? 자네도 범준이 알지 않나. 제 아비에 대한 열등감으로 뭉쳐서 의욕만 많은 어리석은 놈.”
두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이리 말을 빙 둘러서 할 때도 다 있군. 할 말은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 하고 끝내게.”
“응? 할 말이 정해져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이럴 건가? 지금까지 불평불만 쏟아낸 게 결국 강빈이 얘기 꺼내려고 그런 건 아니고?”
“뭐?”
진태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완은 그런 진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칭찬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사업 얘기로 넘어가자고.”
두완은 칭찬이라면 남이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질색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진태는 머쓱해졌다.
두완이 기대감 서린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청와대 측에는 연락해봤나?”
“사업 얘기는 무슨 결국 자네도 원하는 걸 듣고 싶었던 모양이구먼. 연락이야 했지.”
“그래서?”
진태는 천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작년에 소 떼까지 이북에 보냈다가 뒤통수 맞고 또 그러고 싶어?”
작년 두완은 두 차례나 소 떼를 북한에 기부하며 햇볕정책에 이바지했지만 남북공동 사업은 직전에서 계속 엎어졌다.
이후에도 지속해서 북한에 기부하며 원조하는 두완을 보며 종북주의자라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 찌라시는 한동안 세간을 달궜다가 두완의 고향이 평양이었음이 밝혀지고 나서야 좀 잠잠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를 뭘 물어. 소 한 마리 끌고 사업을 시작한 내가 한평생 소원했던 일이네. 큰 이득은 바라지도 않아.”
진태가 두완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완이 하는 말이 진심일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남북경협사업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상상 이상이었다.
관광사업과 공단 조성, 철도 및 도로 연결 사업 등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고 그에 따른 이익과 여론에 비치는 이미지 형성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실제로 두완의 소 떼 방북 당시에만 해도 천일그룹의 주가가 소폭 상승할 정도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두완은 철저한 계산 하에 남북사업을 노리고 있다.
진태는 이미 채규를 통해 청와대 측에 연락해서 관광사업과 공단 조성에 대한 사업권을 일부 보장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자네도 청와대 측에 줄은 있지 않나? 들은 거 없어?”
“자네랑 나랑 같아? 들이는 돈도, 입구도 다른데… 내 측은 들은 바가 없대. 뭐 언론발표 전에 미리 알 수야 있겠지만 그때 가서는 이미 늦었겠지. 에잉, 망할 놈들.”
두완의 말대로 두 사람이 청와대 측에서 접촉하는 사람은 달랐다.
진태가 듣는 정보에 비하면 두완이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태는 피식 웃었다.
“나한테는 연락이 왔네.”
“그럴 줄 알았어. 뭐라고 해? 진행한대?”
어차피 두완도 곧 알게 될 정보다.
미리 알려줘서 생색이나 내보자는 심정으로 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이면서 나한테는 비밀로 했단 말이지…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네. 한번 빚진 걸로 하지.”
“그놈의 빚은 왜 맨날 지고 앉아있어? 갚기는 하고?”
“에헤이. 자네야 가진 게 워낙 많으니까 천천히 갚는 거고. 다른 사람 빚은 재깍재깍 다 갚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게. 그보다 경협을 한다는 말이지. 서회장. 이번에 천일이랑 태선이 싹 다 먹자고.”
큰 이득은 바라지도 않는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태의 눈앞에는 이득만을 바라보는 사업가, 천두완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자네만큼 사업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어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