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샤워하고 나오는데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주머니? 점심에 출근하는 거 아니에요?”
영빈이나 나는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고, 준만은 태선물산에 출근하게 된 뒤로 아침은 밖에서 먹는 경우가 잦아서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는 점심 이후 출근으로 바꿨다.
대답이 없어 주방으로 가니 영혜가 된장찌개를 국그릇에 담고 있었다.
“웬일로 아침부터 요리하세요?”
“어머, 강빈이 나왔구나. 호호. 오랜만에 솜씨 발휘해 봤지. 다들 출근하기 전에 든든하게 아침 먹으라고.”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라니. 좋네요.”
된장찌개를 담은 국그릇을 하나씩 테이블로 옮기고 반찬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통은 아주머니가 해주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반찬을 거의 다 옮겼을 때, 영빈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너 또 그림 그리다가 밤새웠어?”
영빈은 배를 긁으며 맑게 웃었다.
“밤에 그림이 더 잘 그려지는 걸 어떡해요. 아무래도 제 감성은 밤에 있나 봐요.”
“으이구. 진짜 내가 못 살아.”
영혜의 말에 거들어 나도 한 소리를 뱉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거야. 건강 좀 챙겨.”
“이제 너까지 잔소리냐?”
영빈의 볼멘소리에 고개를 젓고 있는데 준만이 밖에서 들어왔다.
“아버지,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영빈의 질문에 준만이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있긴 하지만 산책이라도 할 겸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준만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아침은 된장찌개와 조기구이와 오첩반상이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아침을 먹네요.”
“너희가 아침을 빼먹어서 그렇지. 이렇게 다 같이 하루를 시작하니까 얼마나 좋니.”
영혜의 말에 준만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준만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가자 영혜가 말을 꺼냈다.
“당신이 태선물산을 맡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무슨 생각이에요?”
태선증권사 하나만 받고 욕심 하나 낸 적 없던 준만이었다.
그런 준만이 임원들과 진태가 모인 임원 회의에서 욕심을 내비쳤고 결국 태선물산까지 받아냈다.
사실 자극을 주긴 했으나 준만이 그렇게까지 의욕을 내주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영혜가 지금 와서 얘기를 꺼낸 이유는 나와 영빈 앞에서 준만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준만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회장님의 자식이긴 한가 봐. 임원회의 전까지는 확신이 없었는데 회의에 들어가고 나니 갑자기 욕심이 생기더라.”
“회의 때 아버지의 모습을 다들 보셔야 한다니까요. 백부님이 먼저 태선물산에 대한 뜻을 내비치고 다음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시더니 좌중을 압도하면서 그 카리스마가…”
“하하. 그만해라. 강빈아.”
준만은 부끄러운 듯 손을 내저었지만 내가 한껏 치켜세워 주자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영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만에게 말했다.
“솔직히 저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에요. 재만 아주버님도 뜻을 내비쳤다 하시니 다른 임원분들 중 당신이 태선물산을 맡는다는 거에 반감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나도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그리고… 자식이 꿈을 크게 꾼다는데 애비로서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영혜는 말없이 눈을 빛내는 준만을 바라봤다.
“다 잘될 거니까 당신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보다 강빈이는 밥 먹고 내 방에서 좀 보자.”
“네. 아버지.”
준만이 먼저 신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영빈은 준만을 바라보다가 마저 밥을 먹었다.
방에 들어가는 준만을 보고 영혜가 말했다.
“강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아버지, 어머니 생각보다 더 강한 분이에요. 그리고 제가 있잖아요. 옆에서 잘 보필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래… 네가 있으니까 안심은 된다. 잘 챙겨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버지 뵙고 출근할게요.”
“그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렴.”
“어머니도요. 형은 얼른 자고 내일부터는 일찍 일찍 일어나. 다크써클이 입까지 내려오겠어.”
“알겠어. 인마.”
영빈의 말에 피식 웃고 준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준만은 나를 보고 옆자리를 툭 쳤다.
옆자리에 앉자, 준만은 신문을 내려놓고 입을 뗐다.
“예전에는 망나니처럼 허송세월하는 네가 미웠다. 회장님댁으로 가서 한 소리 듣는 것은 늘 내 몫이었으니까.”
“지금은요?”
“말해봤자 입 아프지. 태선물산을 막상 받게 되니까 내가 욕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더구나.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고맙다.”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순수한 준만의 말에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이용하려고만 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앞으로는 잘해 드릴게요.’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준만은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가 해내신 일입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것보다 활력이 넘쳐 보여서 좋네요.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봐요.”
“… 이제는 네 꿈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괜찮겠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
대답을 조금 미룰까도 고민해봤지만, 그냥 말하기로 했다.
준만은 오늘 솔직한 모습을 내게 보였다.
더 이상 준만을 이용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태선입니다.”
“뭐?”
“태선을 갖는 게 제 꿈입니다.”
“태선을 갖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알다마다.
목표를 정하고 지금까지 실행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태선가가 보유하고 있는 그룹 지분을 제가 모두 갖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준만의 눈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대체 언제부터냐. 내가 태선물산을 이어받았을 때? 아니면 낚시를 갔을 때…? 그게 아니면…”
“서강빈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제 목표는 그거 하나였어요.”
준만이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 진심이 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준만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보였다.
“힘닿는 데까지 밀어주마.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함이 없이 말해. 그리고 힘들 때는… 이 아비에게 의지하거라.”
의지하라니… 준만은 전생의 나보다 어렸다.
미약하게 미소를 지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IT 관련 미국 주식들의 거품이 최대치에 가깝게 부풀어 있었다.
아마존닷컴의 시가총액은 거의 500억 달러에 이르렀고, 스타벅스와 애플은 아마존닷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미국 IT 종목들 정리할 거야. 당사 쪽에 먼저 연락하고 매수할 만한 투자자들 알아봐.”
“네? 지금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벨류에이션이 잘못 측정되어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거품이 가장 크게 부풀어왔을 때 정리해야지.”
갑작스러운 내 결정에 에릭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에릭의 심정이 이해되기는 했다.
IT 관련 기업들이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에릭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뽑아낼 수 있는 이득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5년 전에 시작된 아마존닷컴의 신화는 지금도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00만 달러로 매수했던 아마존닷컴의 지분 10퍼센트는 지금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거품은 터지면 순식간에 사라져. 때가 되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소리야.”
“미국 자본가들이 그걸 보고만 있을까요?”
“근거 없는 희망으로 이루어진 거품은 실체를 알게 된 사람들의 공포로 터질 거야.”
“하지만… 알겠어요.”
에릭은 못내 아쉬웠지만, 그보다 나를 더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첨단 IT주들이 폭락한 이유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덮여있던 포장지가 조금이라도 벗겨진다면 그 순간이 바로 IT버블의 종착지다.
“우선 제프한테 먼저 연락해. 지분 10퍼센트나 되는 지분, 시장에 내놓는다고 하면 펄쩍 뛸 사람이니까. 자기가 그 정도 다 살 금액 없어도 일단은 달려들 거야.”
“아마존닷컴부터 매도하시려고요? 연일 우상향하고 있는데… 스타벅스나 애플 먼저 정리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일부만 우선 매도하고…”
“에릭.”
“알겠어요.”
억 달러를 넘는 단위다 보니 에릭도 결정하는 데 쉽지 않아 보였다.
나 또한 미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처럼 단호하게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IT버블이 꺼질 것이라는 징후는 이미 도처에 산재해 있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금리를 몇 차례나 인상했고, 과도한 기업공개가 이어지고 있다는 거, 너도 느끼고 있잖아. 우리가 같이 예측했던 거품이야. 꺼질 때도 같이 털자.”
“네. 사실… 불안한 감은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수익률에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표님 말대로 할게요.”
IT버블이 꺼지는 것은 연쇄적으로 일어나지, 특정일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한 기업이 무너지고 커진 공포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쓸어버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에 그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었다.
“제프한테 연락해보고 미팅 잡아. 내가 직접 미국으로 갈 거야.”
“알겠어요. 이번에도 그럼 같이 가는 거죠?”
“그래야지.”
의기소침해져 있던 에릭은 나와 함께 미국에 간다는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보다 너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더라. 태선그룹에 환전한다고 주식들 정리했을 때 챙긴 커미션이 쏠쏠해서 그런가?”
“어마어마했죠.”
“얼만데?”
“들으시면 놀라실걸요?”
장난기 가득한 에릭의 표정을 보면 어떻게 기연수 회장이나 채규 같은 사람과 협상에 성공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얼만데 그래?”
“대표님 먼저 알려주시기 전에는 안 알려드릴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내가 보유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나조차도 가늠이 잘 안 되었다.
투자를 한 곳이 워낙 많고 흩어지어 있어서 정확한 금액을 알기가 어려웠다.
연말정산 때마다 정리하긴 하지만 그때마다 투자한 곳들이 늘어나 있어서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곧 2000년이네. 정리를 한 번 하긴 해야겠다. 그나저나 정말 안 알려줄 거야?”
“대표님 상상에 맡길게요. 아무튼 저는 바빠서 먼저 가볼게요.”
이렇게 나와 있을 때는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도 보이지만, 투자 이야기가 시작되면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진중한 사람으로 바뀌니,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순수한 모습 때문에 더 믿음이 가는 것도 있긴 하지.’
에릭은 벌써 몇 년째 나와 함께 하며 경험을 쌓다 보니 점차 하나의 증권사를 이끌었던 대표로서의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았다.
에릭은 그렇다 치고, 내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태선물산은 준만에게 돌아가게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 나머지 태선그룹 계열사들은 계획대로만 된다면 하나둘 내 손아귀로 들어올 것이다.
황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본부장님. 김형주 화가가 아테네 미술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형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