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젊은 묘화(妙畫)’로 불리는 젊은 화가들을 위한 전시회가 열렸다.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화가를 발굴하려는 목적으로 열리는 젊은 묘화는 신진 화가들을 소개했고, 예술가들과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한국 미술의 미래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형주는 ‘제비꽃’을 드디어 완성해 젊은 묘화에 초대받았다.
오늘부터 형주는 언론을 타고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며, 곧 있을 아테네 미술상 후보에 오르고 수상까지 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을 때겠지만, 내가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니 그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오늘도 와주셨군요.”
형주가 밝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추레한 행색이었을 형주는 꽤 이름있는 명품의 정장과 나비넥타이를 매고 서 있었다.
“명색이 팬인데 찾아와야죠. 그보다 형주 씨 인상이 아주 깔끔해지셨네요.”
“강빈 씨가 사신 금액이 워낙 어마어마해서요. 하하. 어울리지 않게 사치 좀 부려봤습니다.”
내가 형주의 그림 19점을 사는 데 쓴 돈은 총 20억 원이다.
나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이지만 형주에게는 인생을 바꿀 정도의 돈일 것이다.
“훨씬 보기 좋습니다. 그보다… 형주 씨에 관한 관심이 엄청난데요? 저번 전시회와는 전혀 다르네요.”
한두 명, 많아 봐야 서너 명이 서 있는 다른 그림과 달리 형주의 그림, 제비꽃 앞에는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무래도 강빈 씨가 사가신 제 그림의 가격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형주 씨의 그림을 산 것이 알려졌습니까?”
“네.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그림을 판매하게 되면 협회에 다 기록이 남습니다. 기자 몇 명이 찾아왔었는데 그 이후로 관심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이럴 의도로 협회에 기록을 남겼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형주의 명성이 오르는 것은 나로서 좋은 일이었다.
형주의 옆에는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려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바쁘신 것 같으니 저는 좀 더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가세요.”
형주에게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온 목적은 형주도 있었지만, 형주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었던 주요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더 컸다.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든 그림 앞에서였다.
화사하면서도 모순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내는 그림, 제비꽃.
그리고 그 앞에는 이제 안면을 겨우 튼 사람이 서 있었다.
“천회장님. 또 뵙습니다.”
두완은 형주의 장례식에도 방문했을 정도로 형주의 그림을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그 관심을 두게 된 날이 오늘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다행히 맞았다.
두완은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홀린 듯 제비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두완이 내가 옆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십 분도 더 지나서였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을 본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서회장 손자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하하. 전시회에 온 사람한테 무슨 일이냐니요. 당연히 그림 보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두완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서회장은 맨날 사람들을 시켜 사기만 하지, 직접 오지는 않거든. 너는 다른가 보구나.”
두완의 말처럼 진태는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품에 관심이 많았으나, 직접 보러 오거나 하진 않았다. 예술적으로 바라본다기보단, 귀하고 비싼 걸 가져야겠다는 소유욕뿐이었다.
어쨌든 사람을 시켜 원하는 것은 뭐든지 매입했고 진태의 개인 전시관에 있는 예술품의 가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지만, 상상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저는 이제 막 그림에 관심을 가졌는걸요. 이곳에 온 이유도 제가 후원하고 있는 화가가 이곳에 참여하고 있어서입니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 기대가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후원하고 있는 화가?”
“네. 지금 저희가 보고 있는 작품을 그린 사람이에요. 김형주 화가.”
두완이 제비꽃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내 손을 잡았다.
“저 그림에 대한 소유권이 자네한테 있는 건가?”
“소유권은 없지만 가장 먼저 그림을 살 권리는 저한테 있습니다.”
형주가 아직 유명하지 않아서 쉽게 구매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지, 두완은 내 말에 매우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내 이,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네. 돈은 얼마든지 주겠네. 저 그림을 살 권리를 나에게 주게.”
진태에게조차 당당하게 말하던 두완이 고작 그림 한 점에 말을 더듬었다.
그가 얼마나 이 그림을 사랑하고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난 삶으로 알고 있는 ‘제비꽃’의 가치는 어마무시하다.
실제로 형주는 아테네 미술상을 받은 뒤 제비꽃을 미술 경매에 넘겼다.
미술 경매에서 형주의 그림을 산 사람은 이후 판매하지 않고 소장했기 때문에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미술전문가는 100억 원은 훨씬 웃돌 것이라고 예상했다.
내가 굳이 지금 제비꽃을 사지 않는 이유도, 그 경매에 나감으로써 얻을 형주의 명성 때문이었다.
형주가 명성을 얻을수록 그가 그린 작품들은 새롭게 평가되어 가치가 매겨질 테니까.
그림이란 게 그림 자체만으로 비싸지는 것은 아니니까.
넘쳐나는 돈이 있는 두완에게 그림의 값을 이야기하면 결국 그는 어떻게든 높은 금액을 제시해 산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두완 같은 사람에겐 예술적인 동감을 표하는 방법이 맞았다.
“말씀하신대로 높은 가격에 그림을 사신다고 하신다면, 누군간 혹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저 돈으로만 이 그림을 생각해 팔고 싶진 않습니다. 이 그림은 제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해는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제비꽃은 시기가 맞지 않아서 줄 수 없지만, 두완은 앞으로 알아두면 분명히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걸 던져주어야 했다.
“대신 천회장님에게는 작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선물?”
“저 그림은 어떠십니까.”
내 손은 제비꽃 옆에 걸려있는 그림 한 점으로 향했다.
‘창해(滄海)’라는 이름의 그림은 물에 잠긴 도시에 검은 물결이 치는 것을 묘사하고 있었다.
창해는 지난 전시회에서 내가 형주에게 사고 아직 가져가지 않은 그림 중 하나로, 젊은 묘화가 열리기 전 형주는 나에게 출품해도 되냐는 허락을 구했었다.
제비꽃만큼은 아니더라도 창해 또한 훌륭한 수작이었다.
“오늘 처음 김형주 화가의 그림을 보지만, 나는 김화가가 분명 세계에서도 통할 것으로 생각한다네. 수백, 수천의 그림들을 봐왔지만 김화가의 그림보다 나의 심금을 울린 그림은 없었어. 이 그림도 좋네. 대가로는 얼마를 주면 적당하겠어?”
나는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그림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천회장님께서 얼마를 주시든 저는 이 그림이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냥 주겠다고? 나는 5억 원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어.”
10년쯤 지난 뒤에 형주의 그림은 최소 10억 원은 불렸고, 창해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아직 무명 화가에 불과한 형주의 그림을 5억 원에 사겠다는 말로 두완의 애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작 5억 원에 이 그림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림으로 얻어진 인맥. 그 이상의 가치를 두완에게서 뜯어낼 것이다.
“그냥 천회장님을 위한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시죠.”
“우리의 관계라고 말할 것도 없는데 그냥 준다는 말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역시 진태의 막역지우답게 눈치가 상당했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꿍꿍이가 있다뇨? 저는 그저 천회장님께서 김형주 화가의 그림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같아서 드리는 것뿐입니다.”
“흐음…”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은 듯 두완은 가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림은 잘 받겠네. 그리고 혹시라도 자네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내 빚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야.”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듣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 그림의 가치는 반드시 오를 겁니다. 제가 선택한 화가의 그림이니까요.”
“허… 자신감이 엄청난 친구구먼. 듣자 하니 미술 쪽에는 크게 관심은 없어 보이는데 김화가를 알아본 거라면, 자네가 능통한 투자 쪽은 말할 것도 없겠군. 예술과 사업은 종이 한 장 차일세. 모든 것은 바라보는 이 두 눈에 달린 것이니까.”
두완이 한 손을 들어 자기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회장 저택에서 했던 말도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네.”
그러고 보니 진태가 청와대 측에 연락해본다고 했었다.
지금쯤이면 남북경협사업에 관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것이다.
“제 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천회장님께서도 미리 준비하신다면 손해 보실 것 없을 겁니다.”
“크하하. 아주 마음에 드네. 그림에 대한 건 별개로 자네의 말대로 해서 이득을 본다면 내가 크게 보답하지.”
두완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두완은 평생의 소원이었던 북한을 다시 가고, 가장 원했던 남북경협사업을 따내겠지만 바라던 성과는 내기 힘들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에게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
진태는 서재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강빈이 던져놓고 간 말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께는 외람되지만 제 얕은 생각으로는 곧 남북경협사업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강빈이 틀린 말을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강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북경협사업을 비롯한 사업권을 미리 선점해야 했다.
그때 책상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회장님.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연결해.”
청와대에서 온 연락이라면 신종도 비서실장일 것이다.
수화기 너머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회장님. 저 신종도입니다.”
“예. 비서실장님 그간 잘 계셨습니까?”
아무리 진태라 하더라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신종도 또한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하하. 서회장님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에 보내주신 가방이 참 멋지더군요.”
얼마 전 종도의 사촌 형에게 보낸 가방 안에는 차명으로 돌렸던 계좌에서 뺀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종도의 반응을 보니 금액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오늘 연락드린 이유는 혹시 제가 알면 섭섭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 허허. 맞습니까?. 신종도 비서실장님.”
“하하… 설마 서회장님 섭섭한 일을 하겠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 햇볕정책이다 뭐다 말들이 많잖아요. 청와대 안에서는 말 없습니까.”
“그, 그게…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 보니 말하기가 조심스러웠을 뿐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종도가 당황한 게 보이는 듯했다.
강빈의 감이 이번에도 맞은 것 같다.
“비서실장님. 저희가 오고 간 정이 있는데 왜 일을 서운하게 만드십니까.”
“아닙니다. 서회장님. 다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건 청와대 내에서도 극히 소수만 아는 사실입니다.”
“말씀해보시죠.”
“각하께서는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연락책으로 북한 측과 지속해서 교류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업권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있고요.”
“기업은 제가 처음이겠지요?”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허허. 아무튼 확정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진태는 눈을 감았다.
자기 손자가 도대체 어디까지를 보고 있는 건지.
대단하기도 하면서 뭐랄까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도 진태의 머릿속에는 남북경협사업이 진행될 때 생길 각종 사업으로 가득했다.
“채규야.”
“네. 회장님.”
“천회장이 이 사실 알게 되면 어떻게든 따내려고 발광하겠지?”
“천회장 성격에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강빈의 감이 이번에도 통했다.
진태는 이 정도면 무당의 신기라는 게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먼저 선점할 수 있는 사업들 가리지 말고 일단 다 가져와. 목 좋은 건 우리가 다 먹고 천회장한테는 남은 거 몇 개 던져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