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준만이 태선물산을 물려받게 된 후, 내가 임시로 태선증권사의 경영을 떠맡게 되었다.
에릭을 앉혀놓을까도 고민 해봤지만, 에릭은 GB인베스트먼트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상황이고 지금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태선증권사의 지분도 꽤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맡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게다가 내년이면 자람증권이 지점 없는 온라인 증권사로 출범하는 해이다.
전생에서 점포 없이 온라인으로만 영업하는 증권사가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자람증권은 영업 개시 2분기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몇 년 뒤 줄곧 브로커리지 점유율 1위라는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투자 비용 회수에만 3~4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기존의 예상을 깬 결과다.
자람증권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0.1퍼센트대였던 수수료를 0.025퍼센트까지 파격적으로 인하했던 것과 당시에는 불투명했던 HTS(가정용 투자 정보 시스템)를 제대로 만들어낸 것, 그리고 지금도 돌풍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박사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광고를 했다는 것이다.
수수료야 기업의 수익을 줄이면 되는 것이고, 광고는 사람을 쓰면 되는데 HTS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찰나, 채규기 금융 쪽으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다는 것이 생각나 곧장 연락했다.
“실장님. 저 강빈입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은 지금 다른 분과 만나고 계십니다.”
“하하. 이번에는 이실장님한테 용무가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한테 말입니까? 죄송하지만 강빈 군의 일을 제가 따로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채규는 진태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사적관계에 대해서 예민했다.
나뿐만 아니라 재만조차도 채규에게 개인적으로 도움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조언만 얻으려고 할 뿐입니다. 투자 정보 시스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투자 정보 시스템이라면…”
그때 수화기 너머로 진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규가 수화기를 떼지 않았는지 채규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아, 네. 회장님. 강빈 군입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강빈 군?”
“네. 이실장님.”
“회장님이 강빈 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저택으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회장님이 제 도움을요?”
이 시점에서 진태가 나를 필요로 하는 도움이 뭐가 있을지 전혀 예측되는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아마 손님으로 와 계신 천회장님과 관련된 듯한데… 자세한 건 오셔서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천회장? 진태를 찾아올 정도의 사람에다가 천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천일그룹의 천두완 회장.
“지금 가겠습니다. 혹시 가서 회장님과 이야기 나눈 뒤에 실장님과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어떤…아 아까 말씀하신 투자 정보 시스템 말씀이십니까? 하마터면 저도 까먹을 뻔했군요. 네, 알겠습니다.”
채규도 내가 건넨 이야기에 꽤 관심이 생겼는지 쉽게 수락했다.
“그럼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곧바로 출발했다.
영균은 익숙한 듯 차 앞좌석에 올라탔다.
경호팀 사이에서는 덩치가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꽤 거구인 몸이 올라타자 앞좌석은 미어터질 것처럼 좁아 보였다.
“차를 조금 더 큰 걸로 바꿔야겠네.”
“제가 몸이 커서 그렇습니다. 불편하시면 제가 따로 차를 구하겠습니다.”
“아니야. 듬직해서 그래. 그래도 차는 하나 따로 구하긴 하지.”
임기사는 처음 영균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농담도 건네며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차가 진태의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황비서가 정리한 자람증권에 대한 정보를 봤다.
집중해서 그런지, 시간이 별로 지난 것 같지 않은데도 금방 도착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영균이 자연스럽게 따라 내려서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차실장.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경호원은 못 들어오게 하는 거 알잖아.”
“아, 죄송합니다. 항상 자연스럽게 들어갔기에…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영균의 나이와 자리를 생각할 때 최소 5년은 넘게 근무했을 테니 아직은 이곳이 더 익숙한 근무처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사람이 되었으니 진태의 저택에는 함부로 들어 올 수는 없다.
진태는 허락받지 않는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
영균을 향해 손을 내젓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자주 봐서 익숙한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채규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어서 와요. 회장님은 지금 서재에서 천회장님과 만나고 계십니다.”
“아까 저를 부르신 이유가 천회장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셨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무래도 한국 5대 그룹의 회장 둘의 회동이다 보니 채규도 조심스러운 것 같다.
서재에 들어갔다 나온 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장님께 다녀오겠습니다. 나중에 봬요.”
“알겠습니다. 저는 거실에 있으니 끝나고 말씀해주십시오.”
채규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거실로 돌아갔다.
서재에 들어가니 진태와 천일그룹의 회장, 두완이 열을 내며 대화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이북에 관심이 많은 게야?”
“아, 글쎄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이 다르다니까.”
자본총액 기준 국내 재계 서열 5위 그룹, 천일그룹의 회장 천두완.
진태와는 막역지우로 알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진태와 교류를 통해 친해진 사업가이자 경영인이었다.
그가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위대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다. 노동자를 무시해서는 안 돼.’
시작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밑바닥에서 시작해 증권사 대표가 된 나는 누구보다 이 말이 와닿았다.
“내 고향을 어떻게 잊겠나.”
두완은 고향인 평양에 대한 그리움이 상당했고 남북경협사업에 늘 관심이 많았으며 사업권을 따내려 늘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평양에 아내와 첫째 아들을 놓고 왔으니 그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상당할 것이다.
지금은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에 대한 관심도가 수직상승할 때.
진태를 찾은 이유도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았다.
진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 정권만 해도 몇 번이나 엎어졌어? 남북사업은 이제 가능성이 없다니까. 이 사람아. 이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집착할래. 내가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준다니까.”
“평생을 기약한 사람의 소식도 듣지 못하는 마음을 자네가 알겠나? 하긴 그러니 자식도 내쫓지.”
내쫓은 자식은 동만을 말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재벌가나 관련 업계 쪽에 알만한 사람들은 동만이 퇴출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내가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천회장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서회장님의 손자,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언제 왔어? 기척도 내지 않고.”
“방금 왔어요. 하하. 오시는 것은 알고 계셨잖아요.”
굳어 있던 진태의 표정이 나를 보자 풀렸다.
두완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강빈이구나. 진태가 귀가 닳도록 얘기하기에 궁금했는데 드디어 보는구나.”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얘기하기는 뭘 했다고.”
“하하. 천 회장님이 궁금하셨다니 영광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셨다는데 혹시 천회장님과 관련된 일입니까?”
두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토속 신앙에는 관심이 없는데 말이야. 진태 말로는 네가 무당보다도 잘 맞힌다는구나.”
“그저 운이었을 뿐입니다. 혹시 어떤 일 때문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조만간 남북이 경제협력사업을 진행할지, 말지를.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2000년 4월에 있을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대답하려는데 진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북정상회담은 한번 어그러진 걸로 끝이야. 그리고 자네는 이미 소 떼 몰고 두 번이나 북한에 방문하지 않았나. 더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아야지.”
진태의 말을 듣자 나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태는 나를 통해 두완이 헛된 희망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태의 의도에 따라줄 생각이 없다.
진태의 뜻대로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면 당장 호감을 살지는 몰라도, 내게 이득 되는 것은 없다.
바꿔 말하자면 곧 있을 사실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당장 진태의 반감을 살지는 몰라도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이득을 미리 선점한다면 진태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께는 외람되지만 제 얕은 생각으로는 곧 남북경협사업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천회장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에 반해 진태는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
“두완이 그놈이 선을 넘을 때가 딱 한 가지 경우가 있는데 그게 이북 관련이야. 어찌 사람 마음에 그렇게 불을 질러?”
진태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완은 이북 관련 얘기만 나오면 초점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서 제대로 된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애초에 진태가 두완을 부른 이유도 다른 사업에 대해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통 이북에 관해서만 얘기하는 통에 나를 불러서 화두를 바꿀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남북경협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하자 두완은 더 들떠서 이북 얘기만 해댔다.
결국 진태가 두완을 돌려보내고 이렇게 둘이 남았다.
“제 생각을 물어보시길래 사실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연평도에서 해전이 벌어진 지 세 달도 안 됐어. 생각이 있으면 남북사업을 하겠나?”
“정부는 그걸 이용할 겁니다. 저희 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은 많지 않습니다. 대북화해협력정책을 더 강하게 진행하는 발판이 될 거예요.”
진태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봤다.
“청와대에 연락해보면 알겠지. 우선 네 뜻은 알겠다.”
지금쯤이면 청와대에서도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을 것이다.
대북화해협력정책, 다른 말로는 햇볕정책이라고 불리는 정책은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공조와 함께 일본, 러시아, 중국으로부터도 지지를 확보했다.
제2연평해전의 피해에 비해 올해 있었던 제1연평해전은 규모가 작았고, 햇볕정책은 그리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계속 시행하고 있었다.
물론 그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에서 내가 챙길 수 있는 이득이라면 분명 있다.
“곧 저를 부르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