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 말에 진태는 재미있다는 듯 대놓고 껄껄대며 웃었고, 다른 임원들은 나를 보며 웅성대기 바빴다.
특히 태선물산계열의 사장들은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였다.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이해는 간다.
그동안 동만의 라인을 탔었는데 갑자기 나 때문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으니.
“회장님께 서동만 사장의 비리를 말씀드린 것은 도의에 의한 행동이지 어떤 대가를 위해서 했던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자리에서 욕심을 내비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대답을 포기하자 진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누가 말해 볼 테냐.”
정순이 살며시 손을 들자 진태가 얼굴을 구겼다.
“정순이 너는 네가 맡은 호텔부터 잘 관리해. 명동지점은 자신 있다더니 매출이 왜 그 모양이야? 쯧.”
진태의 말에 정순이 다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영만은 눈알을 굴릴 뿐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지는 않았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만에게 향했다.
많은 사람의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재만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래. 한번 말해 보거라.”
“태선물산은 태선그룹 안에 있는 지주회사들 사이에서도 규모가 큰 편입니다. 자회사 한두 개가 아니라 태선물산 전체를 이끄는 일에는 그만한 능력이 필요한 일이죠. 저는 이미 태선전자를 한국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력이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기업도 넘보지 못할 자리에요.”
재만 쪽 사람들은 당연하게 호응하고 있었고, 기존 동만에게 줄을 대고 있던 사람들도 재만이라면 인정을 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재만은 힘을 주며 말했다.
“전자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듯 물산도 전자에 버금가는 곳으로 키워내겠습니다.”
“그래. 재만이라면 부족함이 없긴 하지. 경영 능력도 이미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이대로라면 물산을 물려받는 것은 재만이 된다.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준만도 말을 꺼내야 한다.
초조한 심정으로 준만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준만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응? 준만이도 할 말이 있는 게야?”
“예. 회장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준만은 긴장한 듯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완고해 보였다.
진태가 그런 준만의 표정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놈도 내 밑에서 나고 자랐으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한번 말해 보거라.”
준만은 침을 한 번 크게 삼키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제 형님, 누님들이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회사들을 물려받을 때 제가 받은 것은 태선투자금융이라는, 작은 중소기업이었습니다. 태선물산에 인수된 작은 투자회사를 독립해서 제가 키워낸 곳이 지금의 태선증권사입니다.
진태의 자식들이 물려받은 기업들에는 계열사에 맞는 자회사들이 있었다.
전자 쪽을 물려받은 재만에게는 전기, 보안, 반도체 등이 있었고, 금융 쪽을 물려받은 영만은 생명, 카드 캐피탈 등의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 동만이 퇴출당하면서 공석이 생긴 태선물산은 자회사로 건설, 중공업, 중화학을 보유하고 있다.
진태의 자식 중 유일하게 자회사 없이 독립적인 태선증권사를 물려받은 것이 준만이었다.
진태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준만의 말을 경청했고, 이상한 기류를 느낀 재만이 준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같잖은 역사나 읊는 자리가 아니다. 본론이나 말해.”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형님이나 누님,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기업이었으니까요. 태선그룹에서 별 관심도 두지 않아 증권사 내에서도 겨우 중위권을 유지하던 회사였습니다. 저는 그런 증권사를 오직 제힘으로 한국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재만이 중간에 말을 끊은 것은 별다른 이유보다도 분위기를 한 번 꺾기 위해서일 것이다.
평소에 위축된 준만이라면 그런 재만의 말에 말이라도 더듬었겠지만, 오늘은 차분하게 제 할 말을 끝까지 이었다.
진태가 흥미롭다는 듯 준만을 바라보았다.
재만도 진태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준만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다들 최고를 물려받을 때, 저는 최고를 만들었습니다. 물산은 한국 제일의 기업이지만 아직 세계시장에서는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아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전자도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세계시장. 제가 노려보겠습니다.”
어딘가 어설프긴 하지만 해야 하는 말들은 모두 뱉어냈다.
그저 몇 마디를 툭 내뱉고 의사만 전달까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대 이상이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준만의 말에 재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진태가 넌지시 말했다.
“재밌는 이야기구나. 그래.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증권을 가져간 게 준만이 너였지. 한 기업을 끌어올린 네 경영 능력은 이제 의심할 바 없어. 그런데 증권이 치고 올라온 이유가 강빈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 내 말이 틀렸냐?”
“강빈이가 본부장으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한 건 맞습니다만. 그뿐입니다. 태선증권사를 키운 건 오로지 제 능력입니다.”
진태에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활강기업 인수전 때처럼 진태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준만은 내가 요구했던 대로 잘 수행해주고 있었다.
그때, 진태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강빈이 네 생각은 어떠냐. 태선증권사를 키운 게 너냐, 네 아비냐.”
진태의 말에 다시 한번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방금 진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의중을 깨달았다.
진태가 처음부터 나의 이름을 거론하며 회의를 시작했던 것은, 단순히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태선증권사가 증권사 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태선전자와는 체급이 달랐다.
준만이 어떤 감언이설을 갖다 붙인다 한들, 경영 능력은 재만이 몇 수는 더 위라는 말이다.
진태가 태선증권사의 성과를 높게 쳐준 이유는 그 성과를 나에게 돌리고 내가 태선물산을 물려받는 당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아직 서른도 안 된 핏덩이가 태선물산을 받게 된다면 반발을 사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로 진태가 판을 깔아 줬다면 내가 태선물산을 받는 것에 반발심이 일기는 해도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은 태선물산을 받고 싶지 않다.
태선물산을 내가 경영하게 되면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게 된다.
지금처럼 개인적인 투자가 아니라, 태선물산처럼 대규모의 기업을 움직이게 된다면, 미래에 대한 지식은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고, 나의 시간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수익적인 부분도 지금의 개인 투자처럼 독식할 수 없어서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태선물산을 받게 되면 딸려올 지분이 탐나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준만이 태선물산을 받게 된다면 언젠가는 결국 내 몫이 될 터.
결국 준만이 이어받는 것이 지금의 상황으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결과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미국 쪽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택배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태선증권사에 눈 돌릴 틈이나 있었겠습니까? 그저 본부장 자리를 지키며 가끔 일했을 뿐입니다. 서준만 사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태선증권사가 클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서준만 사장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으로 진태에게 내 뜻은 전달했다.
진태라면 충분히 내가 말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라는 이유로 남은 것만 가져가더니, 드디어 일을 잘 해내서 제 몫을 찾아가는구나. 좋다. 재만이도 능력은 출중하나 전자가 있으니 이번에는 준만이한테 맡겨보고 싶은데, 다른 놈들 생각은 어때?”
진태의 말은 판결문과 같았다.
욕심 많은 재만조차 입을 다물고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진태는 결론을 냈다.
“태선물산은 앞으로 준만이가 경영한다. 다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진태가 말을 이었다.
“없어? 나중에 가서 다른 말 나오는 놈 있기만 해. 이제부터 물산은 준만이가 맡는 걸로 다들 알고 있어. 준만이는 건설이랑 중화학, 중공업 사장들이랑 얘기해 봐. 윤지형이가 물산 쪽에 오래 있었으니까 도움이 될 게다.”
“예. 회장님. 감사합니다.”
준만은 아직도 긴장이 안 풀렸는지 경직되어 있었다.
하긴, 평생 욕심 없이 살던 사람이 물산 같은 거대기업을 경영하게 되었으니 이해가 가긴 했다.
진태는 쓱 둘러보다가 말도 없이 바로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진태의 뒷모습을 보며 전 임원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장관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준만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한 날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용기 내서 내 말대로 해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좋은 결정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옆에서 최대한 돕겠습니다.”
“강빈아. 나는 오늘 처음으로 네 백부에게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태가 들어오기 전에 준만은 재만과 대화를 하러 나갔었다.
물산을 재만이 가지고 자회사를 준만이 가지기로 한 대화였었는데 거절을 했다는 것이다.
준만은 몸을 떨고 있었는데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왠지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왜 빨리 이러지 못했을까. 어렸을 때부터 무시를 받으면서 왜 한 번도 싫다고 해본 적이 없었을까. 이렇게 쉬운 일을….”
“그때는 아버지도 어렸잖아요.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잘못된 거지. 어렸던 아버지에게 어떤 잘못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오늘은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거잖아요. 오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습니다.”
준만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하구나. 철없던 시절에는 대화 한 번 하기 어려웠고, 네가 바뀐 뒤로는 나를 늘 차갑게 대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낚시도 가고 이런 말을 해주는 아들이 있으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준만에게는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빈은 아들이나 조카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잘해주었고, 영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 반해 준만에게만은 늘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 준만의 모습을 보니, 가족을 위해서 나서지 않았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앞으로 더 좋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준만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중년의 남자와 몸을 밀착하고 있는 게 어색해 밀칠까도 싶었지만, 오늘은 가만히 두기로 했다.
오늘은 그가 아버지의 기분을 느꼈으면 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