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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67화 (67/249)

#67화

‘위대한의 위대한 아트갤러리.’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흔해빠진 허름한 건물이었다.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형주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람들은 왜 이 명작들을 몰라줄까요.”

형주가 뒤돌아보더니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빈 씨… 정말 와주셨군요.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객이네요.”

형주에게 다가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리아트리스, 튤립, 나팔꽃 등 열 종류가 넘는 꽃들을 한데 모은 꽃다발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꽃다발은 처음인데요?”

“꽃집에 있는 꽃들을 한 종류씩 달라고 해서 만든 겁니다.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모아 보니 꽤 볼 만하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한데 모여 작품이 되는 형주 씨의 그림처럼요.”

형주는 한참을 꽃다발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강빈 씨는 말을 참 듣기 좋게 하는 것 같아요.”

“저번에 주신 선물에 대한 작은 답례입니다.”

형주가 지난번 선물로 준 그림 ‘검은 나방’은 집에 잘 보관하고 있다.

“그 볼품없는 그림에 이런 화려한 꽃다발이 답례라니….”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그림을 전부 사신다는 제안 말입니까?”

“네. 지금도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형주의 그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화려하고 유행을 따르는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쯤이면 거듭되는 무관심과 그림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이 그를 끊임없이 옥죄어오는 시기였다.

결국 형주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린다.

‘비운의 천재 화가.’

형주의 죽음을 다뤘던 기사의 제목이다.

그는 죽기 1년 전에 ‘제비꽃’이라는 작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 중 하나라는 아테네 미술상까지 받지만, 그때는 이미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도 시꺼멓게 죽어있는 눈을 보면 얼마나 마음고생하고 있는지 알 법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형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그림 전부 강빈씨에게 넘길게요.”

“가격을 제가 정하는 실례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형주 씨가 생각하는 값어치를 말해주세요.”

“저는….”

형주가 자신의 그림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생활고에 허덕이며 변변치 않은 재료들과 장소 하나 받지 못하고 그린 그림들이다.

그런 그림들이 그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나는 모른다.

전시회에 있는 그림은 총 19점.

형주가 고민을 끝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었다.

“한 점에 20만 원에 판매하겠습니다.”

20만 원이라면 모두 합쳐서 38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미래에 갖게 될 가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가격.

그럼에도 형주는 내가 돌아서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형주 씨. 지금 장난하십니까. 형주 씨에게 값을 매기라고 한 제가 우스워지는군요.”

“네?”

전생의 가격 그대로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살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형주의 그림은 돈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점, 한 점이 수십억 원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집가에게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니까.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필요한 사람 중 그의 그림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다.

“20만 원도 비싸다고 생각하시면 그림을 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룟값이나 겨우 면하는 수준이거든요.”

“1억 원에 사겠습니다.”

“네? 그럼 한 점당 거의 500만 원에 사시겠다는 겁니까?”

형주가 놀란 눈빛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

“합쳐서 1억 원이 아니라 한 점당 가격을 말씀드린 겁니다. 저는 딱 내려가는 가격이 좋아하니 19점 전부 해서 2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강빈 씨가 미술시장 쪽을 잘 몰라서 그러나 본대 미술 경매에 가도 1억 원이 넘는 작품은 손에 꼽힙니다. 강빈 씨가 돈이 얼마나 많다고 한들 제게 호의를 베푼 분한테 바가지를 씌울 수는 없어요.”

내가 하는 생각을 알면 저렇게 말을 할 수가 없을 텐데 정말 정직한 사람이다.

노정환 같은 족속들을 상대하다 보니 형주 같은 사람이 신선했다.

“그냥 받기 싫으시다면 조건을 하나 걸겠습니다.”

“후… 말씀해보십시오.”

형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브로커와 관련된 일이나 모사 쪽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미술계는 잘 모르지만, 모사품과 관련된 브로커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아마도 형주는 나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내거는 조건은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려달라는 겁니다. 제가 형주 씨의 후원자가 되고요.”

“그럼 저보고 서대표님을 위한 그림을 그리라는 겁니까?”

형주는 자존심이 상한 듯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예술가를 착취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받아왔던 무시와 경멸을 생각하면 납득은 되었지만, 그는 지금 오해하고 있다.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닙니다. 형주 씨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세요. 온전히 형주 씨의 이상향으로요. 대신 당신이 그리는 모든 그림을 제가 구매하게 해주세요.”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럼 강빈 씨가 얻는 게 무엇입니까?”

“저를 그냥 돈 많은 팬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림 좋아하는 재벌이야 널리지 않았습니까. 형주 씨는 원 없이 그림을 그리고 저는 형주 씨의 그림을 소장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지 않나요? 작업실과 재료 등 필요한 것들은 저에게 청구하세요. 얼마가 됐든 전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형주에게는 너무 좋은 조건이었는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그를 포섭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때쯤이면 ‘제비꽃’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이기 때문이다.

제비꽃을 통해 아테네 미술상을 받으면 그는 더 이상 무명의 예술가가 아니게 된다.

“저를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주 씨는 그림을 왜 그리십니까?”

“그건….”

“좋아하는 것에 이유를 따지는 것부터 잘못된 겁니다. 게다가 저는 돈이야 차고 넘치는 사람이고요.”

형주는 그제야 이채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후, 강빈 씨한테는 못 당하겠군요.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그림 관련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이곳에 연락하세요.”

나는 형주에게 황비서의 명함을 건넸다.

황비서라면 성심껏 형주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강빈 씨의 말처럼 제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들을 원 없이 그리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제가 세상에 인정받는 그 날이 온다면 드릴게요.”

“저도 그날을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형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긴장감이 감도는 임원 회의가 열린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오늘 열린 임원 회의는 분위기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재만, 영만, 정순, 남순이 저마다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 경영하고 있는 기업의 자회사 사장들이거나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태선 계열사들의 사장들이었다.

혼자 외딴섬에 있는 것처럼 고고히 앉아있는 준만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각오는 되었습니까.”

“그래. 네가 걱정할 거 없다.”

그래도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듯 준만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의 시작까지 십 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준만이 다가왔다.

재만이 나를 흘끔 보더니 준만에게 말했다.

“준만아.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예? 이제 곧 회의입니다.”

“잠깐이면 돼. 나와.”

재만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준만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일어나서 재만의 뒤를 쫓았다.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준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랄 뿐.

범준은 재만이 나가는 것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곳으로 다가왔다.

“물산 쪽은 쳐다보지도 마라. 아버지께서 받으셔서 나중에 내가 운영하기로 했으니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해댔다.

거슬리기만 할 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밖으로 나간 준만 쪽이었다.

내가 무시하자 범준은 내 앞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너 무시하냐?”

“이런 자리까지 와서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

“이 새끼 말하는 거 보게. 내가 네 친구냐?”

이런 덜떨어진 놈한테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적당히 무시하면 떨어져 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귀를 닫고 생각에 잠겼다.

‘범준이 말했듯 서재만은 반드시 물산을 노릴 것이다. 태선전자가 세계시장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무엇보다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지가 중요한데.’

재만이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 유추할 때 준만이 안으로 들어왔다.

범준은 이어서 들어온 재만의 눈치를 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준만은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백부님이랑은 무슨 대화를 하신 겁니까?”

“물산 쪽 지분을 양분하자 더구나. 형님은 물산. 나는 건설이랑 중공업.”

“지주회사가 물산인데 그게 말이 됩니까? 결국 발밑에 두고 있다가 언제든지 회수하겠다는 소리잖아요.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진태가 들어왔다.

떠들썩하던 회의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진태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다들 자리 앉아라. 오늘 모인 이유는 다들 알지?”

오늘 회의를 통해 태선물산의 사장을 뽑고 그 사람에게 동만의 지분이 넘어갈 것이다.

진태의 말에 침을 삼키는 사람이 몇 명 보였다.

어차피 물산을 넘겨받게 될 사람은 진태의 자식 중 한 명이겠지만, 파이가 워낙 크다 보니 너도나도 꿈을 꿔보는 것이다.

정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회장님, 동만 오빠, 아니 서동만 사장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순순히 내려놓은 겁니까?”

“별것이 다 궁금하구나. 제깟 놈이 안 내놓으면 어떡할 거야? 네놈들도 명심해라. 쥐고 있는 건 나다.”

진태의 말은 자신이 줬던 것들은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지분을 상속받은 진태의 자식들과 범준이 긴장감에 목을 빳빳이 세웠다.

“그럼 동만이를 쳐낸 장본인이 먼저 얘기해 보자. 서강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진태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이 시선을 피하려고 지분도 나눠서 받았는데… 진태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진태는 이에 더해 한 번 더 각인시켜주었다.

“네가 보내버린 자리니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 생각이 있으니 공석을 만들어놓았겠지. 한번 말해 보거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재만은 초조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범준은 그의 옆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태의 말은 사실상 나에게 결정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내가 준만을 태선물산의 사장이라고 추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선의 어떤 계열사 사장도 아닌 내가 하는 말을 다른 임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내가 원했던 그림은 자연스럽게 진태가 준만을 지목하고, 준만은 그것을 수락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준만이 진태에게 인정받은 양상을 만들어 다른 임원들이 준만을 따르게 할 생각이었다.

진태는 과연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보겠다는 듯 아예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입술을 씹었다.

그러길 잠시, 입을 열었다.

“저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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