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태선전자의 최상층에 있는 이사회실에 각 계열사의 실권자들이 모였다.
나도 태선그룹의 대주주 겸 경주 사건에 관여되었기 때문에 진태의 호명을 받아 처음으로 임원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왔어?”
앉아있던 나에게 범준이 다가와 물었다.
범준은 태선식품을 물려받고 꾸준히 임원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형도 오는데 나라고 못 올 게 뭐가 있겠어?”
“허… 쯧. 그래.”
범준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말을 더하지는 못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진태에게 지분을 받아 대주주가 되었다는 걸 알면 범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10억 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나는 태선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T마트의 지분 25%와 태선 증권의 지분 18%, 태선건설의 지분 12%를 양도받았다.
거기에 추가로 받은 태선반도체의 지분까지 합한다면 태선그룹 전체 지분의 약 2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 정도의 지분을 보유한 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잡힌 임원 회의에도 빠짐없이 모여줘서 고맙네. 이렇게 급하게 소집한 이유는 태선물산 때문일세.”
진태의 말에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더니 그제야 동만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동만 사장은 이제 이 자리에 나올 일 없을 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영만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자기 형이 집안에서 퇴출당하였다는데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던 정치를 하려고 뒤통수에 칼을 찌르더구나.”
“감히 회장님을요?”
“그래. 태선물산에서 돈 빼먹는 것은 물론 사기꾼의 손까지 빌리려고 했으니 말 다 했지. 동만이 녀석 지분은 알아서 토해내게 했고, 여생 보낼 돈은 쥐여줬으니 이제 관심 꺼라. 태선에 무능한 새끼는 필요 없다.”
모여있던 임원들 대개는 고개를 숙인 채 진태의 눈치를 봤다.
제 자식마저 필요에 따라 내치는 사람이니, 자신들은 얼마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톱니바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누군가 동만이한테 100억 원이 입금됐더라. 계좌를 추적해보니 차명이던데 이 중 한 놈 짓이지?”
혹시나 해 재만을 바라봤는데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선의로 동만을 도와줬을 리는 없고, 약점을 캤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진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정적이 흘렀다.
“이유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다. 앞으로 나 몰래 동만이한테 손 벌려주는 놈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회장님. 그럼 태선물산 자리는 현재 공석인가요?”
정순의 말에 진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태의 반응에 두려움에 떨던 눈빛들이 순식간에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들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진태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래. 이게 태선가 아니겠느냐. 윤지형이. 무능한 사장놈 만나 부사장 자리 힘들었지?”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초로의 남자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태선물산의 부사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윤지형이다.
“아닙니다. 회장님. 제 할 일만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윗대가리에 썩을 놈 앉혀놓고도 그 자리 유지한 거 보면 자네가 대단한 거야. 물산 사장 뽑을 때까지만 고생하고 중공업 자네가 맡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지형은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기존 중공업을 맡고 있던 전 사장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중화학이라면 몇 년 전 태선물산이 분리했던 자회사 중 하나였다.
현재 태선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는 건설, 중화학, 중공업으로 총 세 개다.
태선전자는 10개가 넘는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자잘한 것들로 자회사의 규모면은 태선물산과 비슷했다.
“조만간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물산 뽑을 테니까 행동 똑바로 해.”
“예!”
***
퐁당!
낚시찌가 물에 닿아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파동이 낚시찌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상쾌한 바람이 기분 좋게 옷깃을 스쳤다.
“갑자기 낚시라니 무슨 바람이 든 거냐.”
“아들이 아버지랑 낚시하고 싶은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준만과 함께 찾은 곳은 경기도 하남에 있는 한 낚시터였다.
잔교 끄트머리에 앉아 대형 텐트를 쳤다.
통째로 임대했고 황비서와 임기사도 대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둘만 있을 수 있었다.
“좋아서 그런다. 늘 이런 걸 꿈꿨거든.”
소박하기 그지없는 준만의 꿈은 한때 나의 꿈이기도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아닌 가끔 한적한 곳에서 낚시하는.
전생에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기 때문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낚시를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나쁘지 않았다.
“어, 강빈아! 이거 흔들리는 게 뭐가 문 것 같다. 어떻게 하는 거냐.”
낚시찌가 흔들리고 준만은 당황하며 낚싯대를 그저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영혜는 가끔 엄마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준만을 볼 때면 여전히 철없는 동년배 친구를 둔 느낌이었다.
“저도 낚시 처음인데… 일단 몸 좀 뒤로 빼시고 손잡이 돌려보세요.”
“이, 이렇게 말이냐?”
자세를 잡고 본격적으로 돌리기 시작하니 자세가 꽤 괜찮았다.
준만이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물가에 파동이 일어나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어? 이거 왜 이러냐?”
“떡밥만 먹고 도망갔나 보네요.”
준만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낚싯줄을 당겼지만 돌아온 것은 텅 빈 낚싯바늘뿐이었다.
이내 다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끼우고는 강가로 던졌다.
준만이 둥둥 떠 있는 낚시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형님… 네가 그런 거냐?”
동만이 퇴출당한 이유와 내가 관계되었다는 것은 태선그룹 임원진들 대부분이 눈치챘을 것이다.
동만은 그런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고.
이런 이야기를 피할 줄 알았던 준만이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다니 의외였다.
진태의 다른 자식들은 자회사가 딸린 거대기업들을 물려받았지만 준만은 외딴 태선 증권사를 물려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준만은 태선증권사의 위치를 높임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았다.
준만이 의욕만 보인다면 태선물산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하며 준만을 쳐다봤다.
“저는 그저 알고 있는 걸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래. 너도 다 뜻이 있었겠지. 다만… 네 걱정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야.”
적을 만들며 살지 말라, 이것이 준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좌우명이었을 것이다.
태선가에서 가족 취급받긴 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말을 삼켰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가 태선물산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슬쩍 보니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아버지가 터트렸으면 했습니다. 둘째 큰아버지를 보내면 아무리 정당한 이유라 할지라도 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테니까요.”
적을 만들기 싫어하는 준만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에게 맡길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준만이 제 뜻을 꺾고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조용히 묻어두고 살 수는 없었던 거냐.”
여전히 답답한 태도를 보이는 준만에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화를 참고 말했다.
“아버지. 저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걱정되면 안 하는 게 답이다. 그나저나 네 덕분에 태선증권의 입지가 많이 올라갔어. 증권사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계속해서 상승세다.”
준만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갑자기 태선증권사 얘기를 꺼냈다.
한심하다는 생각에 결국 차갑게 말했다.
“겨우 그런 것을 성과라고 하십니까?”
준만이 하던 말을 멈췄다.
“아버지는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까.”
“나는… 그저 우리 가족이 온전히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준만의 답변은 소박했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나 겨우 한다는 말이 행복이라니.
“그럼 저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면서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누군가의 밑에서 복종하면서 주는 거나 받아먹겠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그리고 복종이니 받아먹는다느니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준만은 표정을 굳히고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 겁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고 그제야 행복하다고 말할 겁니다.”
그때, 찌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는 낚싯대를 바짝 들어 손잡이를 돌렸다.
잔교까지 낚싯줄을 끌고 온 뒤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노란빛을 띠는 강 붕어가 잔교 위로 떨어졌다.
펄떡펄떡 뛰는 붕어의 몸을 붙잡고 입에 걸린 바늘을 뗐다.
그리고 준만의 물통에다 던져넣었다.
그 좁은 물통 안에서도 붕어는 생기있게 돌아다녔다.
“네가 잡은 것을 왜 내 물통에다 넣어?”
“아버지는 못 잡으셨잖아요.”
“…무슨 뜻이냐.”
내가 하려는 말은 짐작한 듯 진태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아버지가 못 잡으시면 제가 잡아넣어 드리겠습니다. 밑바닥에서 제가 끌어올린 태선증권사. 전부 아버지의 성과라고 임원 회의에서 말하세요.”
“네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 공은 제가 알아서 챙깁니다.”
“나보고 지금 아들 걸 뺏으라는 말이냐. 물산을 노리기 위해서?
이제 곧 임원 회의가 다시 열릴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준만을 천천히 설득하고 싶었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준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집안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몰라도 저는 더 이상 제 두 눈 뜨고 그런 꼴 보기 싫습니다. 아까 행복이라고 하셨죠. 아버지가 말하는 행복이 그런 겁니까?”
“몇 년 만에 모인 자리였다. 그 순간만 참으면 끝날 일이었어.”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셨던 패션사업. 단칼에 거절하신 겁니까? 그런 순간이 모여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됩니다. 아버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외면한 거고요.”
준만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강빈아. 태선물산을 내가 받게 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아버지가 마음먹기 달린 일입니다.”
준만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면에 비친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후… 알았다. 네 말대로 그 욕심. 내가 한번 부려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