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조해관 별채 문밖에서 진태와 나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노친네, 재벌 위에 국회가 있는 것부터 영감탱이까지 경주가 한 말은 전부 다.
진태는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겠어. 뭣들 하나. 문 열게.”
진태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 둘이 양쪽 문을 잡고 벌컥 열었다.
마침 허공에 삿대질하고 있던 경주의 손가락이 진태를 향하고 있었다.
딸꾹.
진태와 눈이 마주친 경주는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확대된 동공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술도 꽤 마셨는지 책상 위에는 술병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회, 회장님….”
진태는 그저 같잖다는 눈빛으로 경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쯧쯧. 출신도 없는 것 데려다가 키워줬더니 뭐, 노친네?”
옆에 있던 마현그룹의 마현석은 조용히 일어나 빠져나가려는 것을 경호원에게 제지당했다.
진태가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뭔가?”
“아… 마현그룹의 회장, 마현석이라고 합니다.”
“누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물었어? 문경주랑 무슨 관계냐고!”
진태의 호통에 현석이 화들짝 놀라 눈을 깜빡이더니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문의원이 선거자금을 대달라길래 만난 것뿐입니다.”
“어디 댈 줄이 없어서 저런 거에 기대고 있어? 쯧. 별 볼 일 없는 놈이구먼. 당장 꺼져.”
“예, 예! 감사합니다. 회장님.”
현석이 허리를 90도로 숙이고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노정환은 눈알을 굴리며 서 있었고 경주는 무릎부터 꿇으며 진태의 다리를 잡았다.
“회장님… 그게 아니라 제 말 좀 들어봐 주세요.”
“네 말? 뭐, 나를 노친네라고 하던 거 말이냐?”
“회, 회장님! 제힘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태선가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믿어주세요.”
“이게 네 힘으로 하고 싶단 거냐? 뭐 듣도 보도 못한 그룹이랑 결탁하는 거?”
“이렇게라도 꼭 3선 달고 싶었습니다. 그, 그러고 나면 회장님도 제 노력을…”
“입 닥치거라.”
진태의 싸늘한 한 마디에 경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저 한심하게 생긴 사기꾼 녀석이랑 붙어먹은 거 다 들었다. 그리고. 물산에서 많이도 해 처먹었더구나.”
“그, 그걸 어떻게….”
“내가 정녕 모를 거로 생각했어? 사기꾼 자식은 강빈이에게 들어 알았지만, 물산은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기어오르나 그냥 두고 보니까 이제는 내가 뒷방 늙은이 같더냐?”
경주의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태의 말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행동에 열받았는지 경주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영균이 달려와 경주의 양팔을 잡고 제지했다.
“한심한 것아. 이 못난 것아. 쯧쯧. 제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면서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고 들어? 너를 태선가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진태가 영균에게 붙잡혀 무릎 꿇고 있는 경주를 보며 혀를 찼다.
영균은 조금 전까지 태선가의 일원이었던 경주를 제압한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영균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태선물산 건은 알아도 눈감아 줄 수 있었지만 내 뜻을 거스른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앞으로 태선가에는 발 한 짝도 들이지 말거라.”
“서회장님!”
경주는 이제 흐느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한 번만. 네? 다시는 그런 꿈 꾸지 않겠습니다. 포, 포기할게요. 제발 내치지만 말아주세요.”
“잡것아, 주는 거나 받아먹으면 오죽 좋았어? 그릇에 맞지도 않는 욕심을 품으니 이렇게 되는 거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원망하지 말거라.”
발버둥 칠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영균이 힘을 풀자 경주가 풀썩 주저앉았다.
경주는 손을 싹싹 빌며 눈물을 흘렸다.
“쥐 죽은 듯이 살게요.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대신 우리 아들들… 창호랑 창훈이만큼은 내치지 말아주세요.”
“허… 그래도 자식은 소중하다는 거냐? 헛소리하지 말고 입 닫고 있어. 그렇게 자식들 생각했으면 애초에 그런 짓을 말았어야지. 너는 그냥 내 결정에 따르면 됐다. 그 쉬운 것 하나 못 한 거고.”
그것이 진태가 경주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경주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제 노정환에게 향했다.
“네놈이 그 사기꾼 녀석이로구나.”
“예… 마, 맞습니다.”
“쯧쯧. 이런 맥아리도 없는 놈이랑 어울리니 그 꼴이 나지. 그래. 네 목줄은 강빈이가 쥐고 있다지?”
노정환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가 말했다.
“예. 맞습니다.”
“그래. 그럼 그놈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노정환이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저런 멍청한 새끼… 문경주보다 더하면 더하지, 네 미래가 밝지는 않을 거다.’
진태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경주를 한번 보고는 방을 나섰다.
노정환은 어차피 당분간 경호팀에 맡기면 될 문제니 나도 진태를 따라 나갔다.
별채를 빠져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앞장서서 걷고 있던 진태가 말했다.
“식사는 하였느냐.”
“아직입니다.”
노정환과 경주가 조해관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5시였고 지금은 7시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해가 슬슬 저물고 있었기 때문에 공기가 꽤 쌀쌀했다.
“이곳까지 왔는데 밥이나 먹고 가자꾸나.”
“제가 금방 다른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내 말에 진태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그냥 따라오기나 하거라.”
의아한 마음으로 진태의 뒤를 따라갔다.
진태의 말 한마디에 조해관은 VIP실은 물론 식당 전체를 내줬다.
기존 시간에 예약되었던 손님한테 진태는 음식 가격에 10배가 넘는 돈을 투척했다.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돈을 받고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허리를 굽혔다.
별다른 대화 없이 진태와 단둘이 식사를 끝내고 조해관을 나왔다.
진태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난 줄도 몰랐었던 고름을 짜내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직접 안 좋은 장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확실하게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너도 뒤통수에 칼 꽂으려는 놈이 나타나면 처신 잘하거라. 눈앞에 목표만 좇다 보면 정작 뒤통수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앞서 걷던 진태의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진태의 말이 더 와닿았다.
“후회되시는 겁니까?”
“그런 사치 어린 감정을 가졌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 그저 믿었던 자식 놈 하나를 잃었을 뿐이다.”
“나무 한 그루에 벌레가 들끓기 시작하면 숲 전체로 번지는 법입니다. 반대로 건강한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언젠가 숲을 이루지요.”
진태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계열사들 지분 정리해서 네놈 명의로 돌렸다. 한번 증명해봐라.”
오늘 태선가의 한 명을 쳐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진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
황비서가 준 커피를 마시며, 아침부터 바빴다.
당분간 태선증권사의 실적을 올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
동만의 집안은 아마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고, 동만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의 재분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선증권사의 실적을 올리게 된다면, 물려받은 것이 가장 적은 준만이 지분을 얻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작스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황비서가 곤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대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모르던 미팅이 있었나?”
“그게…”
황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년의 여자가 황비서를 밀치며 나타났다.
“서강빈. 얘기 좀 하자.”
“우선 앉으시죠.”
경주는 며칠 전 조해관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초췌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명품 정장은 며칠이나 다라지 않았는지, 심하게 구겨져 있어서 싸구려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경주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고 보니 경주의 얼굴에 발그레했다.
“거기 비서. 손님이 왔는데 물 한 잔도 안 내오고 뭐 하고 있어? 나 누군지 몰라!”
나를 쳐다보는 황비서에게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경주는 제집처럼 성큼성큼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대낮부터 술을 드시고 온 겁니까. 저 바쁜 사람입니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너지.”
악에 받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회장님께 일러바치고 노정환한테 내 자료 빼돌리게 한 거. 다 네가 계획한 일이지?”
질문이라기보단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경주가 정계 진출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의 방향이 한참은 잘못됐다.
노정환 같은 사기꾼과 결탁하지를 않나, 실권을 쥔 태선물산에서 비리를 저지르지를 않나….
거기에 더해 조카 앞에서 이런 추태까지 보이다니.
문을 열고 들어온 황비서가 경주의 앞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많이 흥분하신 것 같은데 물 한 잔 마시고 돌아가세요. 이런 모습 보인다고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네놈이!”
경주가 물컵을 집어 내 얼굴에다 뿌렸다.
황비서가 달려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았다.
“괜찮아. 손수건 줘.”
황비서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얼굴과 옷을 닦고 있는데 경주가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 아니 한 집의 인생을 망쳐놓고 여유로운 척, 침착한 척, 그놈의 척척 좀 그만해. 이 역겨운 자식아.”
나는 손수건을 내려놓고 경주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능력도 안 돼. 돈도 없어. 사기꾼 놈에게 빌어먹은 돈으로 정치하려던 큰어머니가 할 말입니까?”
그때 경주가 컵을 집어 들어내 쪽으로 던졌다.
쨍그랑!
컵이 깨지며 산산조각이 났고 내 앞에는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던 영균이 있었다.
영균의 손에는 작은 유리 조각 몇 개가 박혀있었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장님…. 괜찮으십니까?”
영균은 대답도 하지 않고 눈앞에 테이블을 건너뛰더니 순식간에 경주의 몸을 제압하고 무릎을 꿇렸다.
“대표님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내 말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 반문하는 영균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경주는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도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 우리 창호랑 창훈이까지 인생 말아먹게 생겼어.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아무래도 진태가 확실하게 처분한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경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영균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차실장님. 손에서 피가 많이 납니다. 지혈이라도 하시죠.”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경주를 잡은 영균의 손에서 계속 피가 흘러 경주의 하얀 블라우스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균은 전혀 괘념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제는 내 사람이 된 영균을 다치게 한 경주를 쏘아보았다.
“문경주 씨. 오늘만 봐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진짜 밑바닥이 뭔지 몸소 체험시켜드릴게요. 아까 창호 형이랑 창훈이 형 얘기하셨죠. 그 한심한 새끼들 끝까지 가는 거 보기 싫으면 쥐 죽은 듯이 사십시오.”
아들 얘기가 나오자 경주는 예상치 못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경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내.
“아이들은 안 돼… 아이들은….”
“끌어내.”
내 말을 듣고 영균의 옆에 있던 경호원들이 경주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창호 창훈이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지 경주는 반항할 생각을 잃은 듯 작은 몸부림 하나 없이 조용했다.
아까와는 너무 다른 태도였다.
술에 취해서는 사리 분별이 안 돼 보이더니, 이제야 정신이 든 건지.
“실장님은 바로 병원 가보세요. 오늘 경호는 다른 분들한테 맡길 테니 오늘은 푹 쉬시고요.”
“괜찮습니다.”
“명령이에요. 다녀오시죠.”
그냥 말하면 절대로 병원을 다녀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영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단호하게 말한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영균은 고개를 숙였다가 집무실을 나갔다.
곧장 병원으로 가겠지.
깨진 유리 조각을 정리하고 있던 황비서에게 물었다.
“황비서. 인천서에는 뭐래? 노정환 오늘 출국한다며.”
***
한편, 정환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강빈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에 도착하면 사람이 나와 있을 것이고, 돈과 신분을 증명할 서류들은 그 사람에게 받으면 된다고 했다.
방법이 꽤 구체적인 데다가 타지에서 사는 것은 자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서강빈 그 자식이 뒤통수치려면 어떡하나 했는데 생각보다 신의는 있는 놈이다.’
공항 라운지에 앉아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1시 10분. 김포발 베트남행이 2시 25분이었으니 정말 이제 곧이었다.
정환은 한국이 지긋지긋했다.
서강빈을 만나기 전까지는 경주를 앞세워 사기 치기 딱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빈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꿰뚫어 보는 것처럼 사사건건 막아댔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선물을 줬으니 악감정 가질 필요는 없겠지.”
강빈이 베트남에서 준비했다고 한 돈은 50억 원.
자신이 차명으로 매입했던 건물들을 판 돈이었다.
실가는 50억 원보다 조금 더 높아질 테니 강빈도 어느 정도 챙기긴 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 윈윈인 거래였다.
“노정환.”
그때 누군가 귓가를 속삭였고 뒤를 도니 묵직한 압박이 등에 가해졌다.
“뭐, 뭐야!”
“경찰이다. 이 새끼야. 윤 순경. 꽉 잡고 있어.”
전에 강빈의 신고로 인천경찰서에 연행되던 중 봤던 경찰들이었다.
분명 서강빈의 짓이다.
“이거 특진이다. 하하.”
경찰관들이 웃는 것이 보이자 이가 갈렸다.
“서강빈 이 빌어 처먹을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