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논현동에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고급 한정식당, 조해관.
본관과 분리된 별채 안에서 남몰래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중국에 갔다 오더니 허튼 생각하는 거 아니지?”
경주의 톡 쏘는 말을 들으며 정환이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사실 정환은 이번 회동을 하기 전까지 영균의 경호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덩치가 큰 사내는 순둥순둥한 인상이었지만 어찌나 힘이 세던지, 창밖으로 도망가려던 자신을 몇 번이나 내동댕이쳤다.
그 때문에 몸 곳곳이 멍이 들었지만, 얼굴은 다치지 않아서 멀끔해 보였다.
정환은 타고난 사기꾼답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보다 마현그룹의 회장이라니… 건들기에는 너무 거물 아니에요?”
“누가 뒤통수치자고 했어? 그냥 네가 맡아서 돈만 세탁하면 돼. 다 얘기된 거니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알아서 분위기 맞춰.”
“여부가 있겠습니까.”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는 경주를 보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경주에게 버림받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럴 바엔 차라리 강빈의 말대로 경주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문경주만 보내면 무조건 해외로 뜬다. 중국은… 좀 위험해 보이고 동남아 쪽으로 갈까? 이제 뒤 봐줄 사람도 없고 숨겨둔 돈도 많으니까 서강빈만 조심하면 돼.’
정환은 틈을 봐서 조해관 밖으로 도망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영균을 비롯한 경호팀이 조해관 근처를 감시하고 있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한번 기회를 노려보고, 안되면 경주를 일단 넘긴 다음 어디로든 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주가 톡 쏘듯이 말했다.
“요즘 연락도 잘 안 받고 아주 빠졌지? 요새 긴장 다 풀린 것 같은데, 정신 좀 차려. 내가 네 약점 쥐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무서워서 제대로 일하겠습니까? 정신이야 언제든 차리고 있죠. 하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환은 지금도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쉽네. 창문 밖에는 바로 우물이고… 소리가 클 텐데. 다른 방법은 없나? 나중에 화장실 갈 때도 살펴야겠다. 여차하면 천장으로라도…’
경주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 정환. 노정환!”
“예? 아, 네. 생각 좀 하고 있어서요. 하하.”
“너는 마대표 만난다는데 긴장도 안 되냐? 하여튼 사기꾼 기질이 타고나긴 했나 보다.”
그때, 문이 열리며 마현석이 들어왔다.
“이거 제가 늦게 온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경주가 일어나서 밝게 맞이했다.
“아니에요. 호호. 저희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노대표님. 여기 인사드려요. 마현그룹의 마현석 회장님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국 쪽에서 작게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노정욱이라고 합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노정환이 익숙하다는 듯 경주 역시 태연하게 웃었다.
지금쯤 잠잠해졌다고 해도, 노정환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꽤 알려졌기 때문에 이름을 속였다.
아직 거래하지도 않은 현석에게 거부감을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노정욱’은 정환의 사촌 형으로, 얼굴마저 비슷했기 때문에 정환이 가끔 써먹는 이름이었다.
심지어 얼굴까지 비슷했기 때문에, 노정환과 착각해 잡혀간 적이 있다고 한다.
현석이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중국에서 오셨다는 그분이시군요?”
“네. 여기는 제 명함입니다.”
정환이 건넨 명함은 정말 그럴싸했다.
경주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우선 저희 문의원님을 위해서 먼 길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이제 각별한 사이가 될 사이인데 멀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하. 그보다 노대표님은 문의원님과 많이 가까워 보이시는군요.”
“제가 힘들 때 문의원님 덕을 크게 봤습니다.”
정환이 자신의 넓은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멈춰서 다행이지, 문의원님 아니었으면 스트레스로 뒤통수까지 벗겨졌을 겁니다? 하하.”
“이런… 저도 요새 탈모가 걱정인데 문의원님 덕을 봤으면 좋겠네요.”
정환의 이마는 태생부터 넓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현석은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그보다 정환 씨가 명의를 돌리는 데 전문가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제가 중국 쪽에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때 묻은 돈도 새것처럼! 저 자신 있습니다.”
“어머, 벌써 본론으로 가시려고요? 우선 한잔하세요.”
경주가 느긋하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평화로운 식사 자리였지만 정환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강빈과 약속한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태선증권사에 출근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노정환에게 받은 자료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서류를 읽을수록 경주가 생각보다 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 이 정도면 그냥 돈으로 국회의원을 샀다고 해도 믿겠는데요?”
함께 서류를 읽는 내내 에릭의 감탄이 이어졌다.
노정환이 잡힐 때마다 빼내 준 것은 약과일 정도였다.
노정환을 통해 받은 돈만 수백억 원으로, 그 돈이 모두 정계 청탁과 선거자금으로 쓰였다.
그 외에도 태선물산에서 빼돌린 돈에 대한 정황도 적혀있었다.
“태선물산과 관련된 건 노정환이 어떻게 갖고 있을까요?”
“돈세탁하는 데는 전문가니까 도움을 받은 거 아닐까? 애초에 물산이 무역업을 중점으로 하는 곳이니까 노정환이 돈 빼돌리기도 수월했겠지.”
노정환이 경주에 대한 자료를 이렇게 방대하게 가진 것을 보자, 왜 경주가 잡혔을 때도 노정환은 잡혀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태선물산에서 이 정도까지 손댈 수 있다니. 서동만 사장이 허락해 줬을까요?”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을 거야. 태선물산을 이렇게 키울 수 있었던 것도 문경주가 실권을 쥐었기 때문일 테니까.”
능력도 없는 동만이 태선물산 사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경주 덕분이었다.
그러니 경주가 노정환과 결탁하고 정계에 나아가려는 일에도 손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사업적인 능력만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하고 싶은 게 정치였나 보지.”
에릭의 말처럼 경주는 정계가 아니라 사업 쪽으로 진출했다면 대성했을지도 몰랐다.
태선물산을 그렇게까지 키운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어쨌든 나로서는 이번 건만 잘 터트리면 경주는 물론 동만까지 보낼 수 있으니 흔치 않은 기회였다.
잘하면 둘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자 속이 다 시원했다.
준만을 제외한 나머지 진태의 자식들은 내가 태선가를 먹기 위해서 언젠가 없애야 할 경쟁자들.
이렇게 좋은 먹이를 준 경주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회장님 모시고 가야 해서 일찍 가볼게.”
“다녀오세요. 저는 밀린 일 좀 처리할게요.”
에릭이 내가 앉던 의자에 앉아 펜을 굴렸다.
증권 관련 일이라면 누구보다 믿음직했기 때문에 걱정은 사치였다.
“그래. 부탁해.”
차를 타고 영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실장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노정환과 문경주 의원이 지금 막 조해관에 들어갔습니다.”
“계속 예의주시해주세요. 노정환, 그 인간이 언제 도망갈지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경호팀 전원이 조해관 근처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게 잘 감시하겠습니다.”
“차실장님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 되네요.”
진태의 저택에 도착하자, 이미 진태가 경호원 넷을 대동하고 나와 있었다.
다들 풍채가 좋고 한가닥 할 것처럼 생겼다.
그나저나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나와 있다니 성질도 급하시긴….
“할아버지. 안에 계시지 왜 벌써 나오셨어요.”
“뒤통수가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문경주… 내가 오늘 끝장을 내야지 속이 편할 거다.”
진태는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이 허공을 노려봤다.
어제 진태를 찾아가서 노정환에게 받은 문경주 관련 자료들을 넘겼다.
진태는 서류 몇 장을 읽더니 당장이라도 경주를 부르라고 했지만 내가 확실한 장면을 보여주겠다며 뜯어말렸었다.
“아무튼 출발하지. 그보다 차실장은 어때, 마음에 드느냐?”
“네. 확실히 차실장이 오고 든든해진 것이 있습니다.”
“그래. 돈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은 잘해야 장사꾼이지만,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명심하거라.”
진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명심하겠습니다.”
***
조해관 별채에서는 깊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경주는 선거자금을 확보했다는 기쁨에 술을 꽤 마셨는지 얼굴이 벌겠다.
“마회장님이 우선 중국 쪽 투자를 명목으로 이백억 원까지는 투입할 수 있죠? 정… 아니, 노대표님이 적당한 데 물색해주세요.”
“그럼요, 그럼요. 문의원님 말이라면 제가 다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겉으로는 빙긋 웃고 있었지만, 정환은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제 곧 강빈과 약속한 시각이 되어갔지만, 도무지 탈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 화장실을 가며 탈출구를 모색해봤지만, 화장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경호팀 때문에 오히려 좌절감만 더 늘었다.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자 일단은 강빈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제 돈도 아니고 회삿돈이니 부담은 없겠군요. 이백억 원 우선 중국 쪽으로 돌리고 이후 경과를 지켜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머, 마회장님이 이렇게 쿨하신 분인 줄 알았으면 진작 다가갈걸. 호호. 후회되는데요?”
“하하. 그런데 문의원님. 어차피 서회장님 모르게 한다고 해도 나중에 당선되면 다 알게 될 일 아닙니까? 유세하는 것만 봐도 대충 자금 있는 거 보일 텐데 왜 숨기시는 겁니까?”
경주는 한순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노친네 얘기는 말도 마세요. 정치하지 말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그래도 제가 3선 달면 뭐 어쩌겠어요? 일단 당선만 되면 아무 소리 못 할 거예요. 서민 위에 재벌이 있고 재벌 위에 국회가 있는 법인데.”
술에 취해 벌겋게 된 얼굴로 저런 소리나 하다니… 정환은 한심해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알게 된다면 저런 말도 지껄이지 못할 텐데.’
갑자기 경주가 손을 들어 자신과 마회장을 삿대질했다.
“아무튼 지금은 영감탱이가 알면 안 되니까 때가 될 때까지 절대 함구해주세요. 들키면 잘못되는 거 저뿐만 아니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벌컥!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