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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63화 (63/249)

#63화

노정환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알고 있어. 네가 문의원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거. 그렇다고 해서 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 너도 이득 한 번 챙기겠다고 사기 치고 다닌 건데 억울할 게 뭐가 있냐.”

축 처진 눈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저것마저 연기일 거라는 확신이 들자 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기회를 줄게. 너 문의원과 관련된 증거들 갖고 있지?”

“증거라뇨.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또 오리발이군. 대화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균과 사내가 노정환의 양팔을 붙잡았다.

“황비서. 노정환 관련 자료들 싹 다 경찰서에 넘겨.”

“네. 곧장 넘기겠습니다.”

노정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가 내가 돌아서자 아예 소리를 질렀다.

“갖고 있습니다! 전부 보관하고 있어요.”

“어디에 있지?”

“저만 아는 곳에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드린다면 없던 일로 해주시겠습니까?”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는 한국에 발붙이진 못해. 그래도 외국으로 나가서 살 기회는 줄게. 네가 굶지 않고 여생을 보낼 돈과 함께 말이야.”

적당한 당근은 상대에게 환심을 사지만, 너무 큰 당근은 상대로부터 의심을 산다.

한국에 발붙이지 못한다는 내 말은 노정환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노정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내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선택지를 없애면 그만이었다.

“다른 생각 할까 봐 말해두는 건데,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앞으로 네 모든 생활은 감시당할 거고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하는 게 보인다면 바로 감방에 처넣을 거야. 문경주가 도와줄 거라는 헛된 희망 품지 마.”

“그, 그런…. 알겠습니다. 자료를 넘길게요. 외국으로는 바로 출발하나요?”

“아니.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정환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

경주는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현그룹의 회장, 현석에게 자금을 받기로 약속받았고, 그 방법도 노정환을 통한다면 걱정할 것 없었다.

“그나저나 노정환, 이 새끼는 왜 연락을 안 해?”

경주가 고용한 브로커에 따르면 노정환이 탄 화물선이 상해항을 출발한 게 그저께였다.

지금쯤이라면 하룻밤 자고 연락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노정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신호음만 울려댔다.

세 번을 해도 받지 않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저번에 전화를 늦게 받았을 때도 화가 났는데, 이번에 단단히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석에게 선거자금을 받기 위해서는 노정환이 필요한데, 연락이 두절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고 불현듯 불안감이 스쳤다.

‘이 새끼 튄 거 아니야?’

노정환은 사기를 치며 벌어들인 돈은 거의 이천억 원이었지만, 지난번 강빈에게 걸리는 바람에 대부분 날리고 건진 돈은 겨우 이백억 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을 경주가 가로챘고, 노정환에게는 중국에서 보낼 생활비 명목으로 몇 푼 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면?

노정환이 남겨 먹은 돈이 크고 그 돈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떠났다면, 더 이상 노정환을 이용하는 방법이 없었다.

경주가 갖고 있던 노정환에 대한 약점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불안한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때, 대포폰이 울렸다.

대포폰과 연결된 사람은 노정환밖에 없다.

경주는 화가 났던 것도 잊은 채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뭐야? 도착한 지 꽤 됐을 텐데 왜 연락이 안 됐어?”

“하하… 호텔 들어오자마자 잠들었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는 경주는 괜히 빈말해댔다.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줄 알고 걱정했잖아. 한국에는 잘 도착했고?”

“하하… 그럼요.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응. 그런데 웬 호텔? 내가 전에 집 하나 구했다고 말했잖아. 주소 찍을 테니까 거기서 지내.”

“아, 집 말인데 저는 아무래도 호텔이 편해서요. 청소도 대신해 주고, 여기 룸서비스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노정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없어 보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피곤해서 그렇다 치고, 연락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그냥 넘겼다.

“알겠어. 불편하면 말해. 그것보다 정환아. 마현그룹알지?

“네. 보험사로 유명한 곳 아닙니까. 사장 이름이 마… 어쩌고 구요.”

“마현석. 그 사람이 줄 대기로 했어.”

“역시 서회장한테는 허락 못 받은 겁니까?”

“그것까진 네가 알 거 없고. 아무래도 마회장한테 네가 중간작업 좀 해줘야겠다.”

정환이 대답이 없자 경주는 재차 확인했다.

“정환아?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 네. 없습니다. 의원님이 까라면 저야 까야죠. 뭐. 제가 언제 시키는 일 안 한 적 있습니까?”

“그래. 근데 너 오늘따라 말투가 왜 그래? 죄지은 사람처럼.”

평소에 그렇게 원하던 고분고분한 태도였지만, 갑작스레 변하니 의아했다.

“아무튼 이번 주 일요일 5시까지 조해관으로 와. 거기서 마회장이랑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해 보자.”

“네. 알겠습니다. 그럼 끊을게요.”

정환이 서둘러 전화를 끊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너 또 여자랑 있는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흠… 아무튼 처신 똑바로 하고 다녀. 또 일 만들지 말고.”

***

지난번 초대장을 받았던 형주의 전시회에 도착했다.

전시회라고는 영빈의 전시회 말고는 가본 적이 없어서 거창한 곳일 줄 알았는데, 형주의 전시회는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었다.

도색도 안 된 콘크리트와 곳곳에 금이 가 있는 벽을 보니 아마 창고로 쓰던 곳 같았다.

한쪽에서 사람들과 있던 형주가 다가왔다.

“정말 오셨군요.”

“저와 같은 그림에 멈춘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했거든요.”

“하하. 그런 것도 좋지요. 처형은 좋은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처형과 결속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누군가는 평화를 얻으니까요.”

형주의 눈가가 반달처럼 휘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뭐 어려운 해석도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형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시회는 화려하긴커녕 낡고 좁았으며 사람들도 없었지만, 형주는 이 모든 것에 만족한다는 듯 행복해 보였다.

“이곳에서 전시회를 여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아… 이곳이 아니면 전시회를 열 돈이 없거든요. 제 그림을 받아주는 곳도 없어서 제 사비로 진행해야 합니다.”

“그럼 제가…”

“아,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영빈이도 갤러리를 빌려주겠다 했지만 거절했거든요.”

“거절한 이유가 뭡니까?”

사실 그에게 갤러리 한 채를 사주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 대가로 그림 한 점만 받아도 내게 이득이 되었으니까.

물론 한 점에 그치지 않고 열 점은 받아낼 생각이었다.

형주가 자신의 그림 한 점을 응시했다.

꽃과 물고기, 바위가 한곳에 엉켜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림의 제목은 ‘무명’.

“저는 제 상황에 맞는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위태로워 보입니다. 남자의 눈썹처럼 보이는 바위는 마치 절벽처럼 느껴지고 눈의 위치에 있는 붉은 꽃은 금방이라도 낙화할 것 같아요.”

“하하. 그런 해석을 주시다니 감사하군요. 그럼 이 그림이 걸린 곳이 이런 낡은 곳이 아니라 이번에 영빈이가 열었던 전시회처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곳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궤변을 늘어놓는 것 같았지만 우선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어울릴 것 같진 않습니다. 이 그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색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과 찰떡이거든요.”

내 말에 형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빈 씨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요. 맞습니다. 저도 강빈 씨와 같이 생각합니다. 제 그림은 이런 공간에 걸맞는다고요.”

형주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인정받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로도 형주의 뒤를 따라다니며 다른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다른 그림들도 처음 봤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든 그림이 그가 처한 상황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전시회라고 해봤자 50평 남짓 되었으니 다 도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형주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떠셨습니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업가의 관점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흥미로운데요. 말씀해주세요.”

“여기 있는 그림들. 제가 전부 구매하고 싶습니다.”

형주의 작품이 몇 배의 가치로 뛸지, 미래를 알고 있는 나조차 감히 예상되지 않았다.

형주는 지금의 삶을 영위할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긴 했지만, 예술가의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었다.

형주의 표정은 밝았다.

“그거 상당히 듣기 좋은 칭찬이네요. 강빈 씨는 세계적인 투자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살 정도면 저도 괜찮은 화가일까요? 하하.”

“저는 예술 쪽으로는 문외한이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형주 씨의 그림을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그의 그림을 볼 때면 힘들게 살았던 강현재의 삶이 생각났다.

미련 따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슴 한편에 묻고 있던 생이었다.

형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빈 씨도 이런 어려운 삶이 있었습니까?”

형주가 보기에 태생이 나는 재벌가 사람이었으니, 내 말에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누구에게나 어려울 때는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림을 다 사겠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사람은 거의 안 오지만… 아직은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편할 때 연락해주시죠.”

형주가 나를 보며 포근하게 미소 지었다.

“강빈 씨는… 영빈이와 형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인상입니다.”

“형제라고 해도 거의 떨어져서 지내니까요.”

“아뇨. 그런 말이 아닙니다. 뭐랄까… 영빈이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만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강빈 씨는…”

그림을 보며 자꾸만 강현재로서 말을 하다 보니 형주는 나를 다른 느낌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자 형주가 당황해하며 급하게 사과를 건넸다.

“이런 의미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하하…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가끔 이런 실수를 하네요.”

“괜찮습니다.”

형주는 그래도 미안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자기 가방을 뒤져 손바닥만 한 그림을 하나 건넸다.

“사죄의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큰 건 아니니 부담 느끼지 말고 받아주세요.”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그림은 작은 액자 안에 담겨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선들이 엉키고 엉켜 나비의 형상을 띄었다.

“멋진 그림이군요. 잘 간직하겠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혹시 이 작품도 이름이 있습니까?”

“정하진 않았지만 그리면서 떠오른 건 있습니다. 검은 나방.”

검은 나방.

이름을 듣자 기억이 났다.

이 당시, 형주가 힘들 때마다 방값 대신 내주기도 하고 라면과 쌀을 보내주던 지인에게 선물해줬던 그림.

본인도 어려운 형편에 형주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조금씩 도와줬던 그 사람은 이 그림 한 점으로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벌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실현되었던 우정의 스토리로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이 그림이 나에게 오다니.

“전시회가 끝날 때 꼭 연락해주세요.”

“저도 강빈 씨와 다시 만날 날이 고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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