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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62화 (62/249)

#62화

“강빈아! 여기.”

계단을 올라가자 입구에 서 있는 영빈이 보였다.

내가 찾아온 곳은 영빈의 전시회였다.

영빈의 그림은 색상의 오묘한 조화와 감정의 표현으로 최근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에 휩쓸려 유행하는 것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만을 그리며 차별화를 둔 영빈의 그림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는 갖고 온 꽃다발을 영빈에게 건넸다.

“축하해. 형. 첫 전시회지?”

“뭘 이런 걸 다. 하하. 고맙다. 그럼 들어갈까?”

“99년 가장 기대되는 신예 화가께서 일부러 마중까지 나와준 거야?”

“부담스럽다. 인마.”

영빈과 관련된 기사의 제목을 읊자 영빈은 민망한 듯 주먹으로 내 등을 쳤다.

주식들을 처분하고 놀고 있는 돈들이 많아서 바쁜 시기였지만, 영빈이 꼭 전시회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영빈의 부탁도 있었지만, 예술계통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교양이라도 쌓을 겸 해서 왔다.

안에 들어가자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교계 행사에 자주 참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경영인의 밤은 가끔 나갔었는데 그때 보았던 얼굴들이 몇 보였다.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꽤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도 있었다.

재벌가의 관심을 한 아름 받고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어, 서대표님 아니세요?”

“저 사람이 서강빈이야?”

몇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귀찮지만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간단한 묵례 정도로 끝냈다.

대충 손을 내젓고 앞으로 걸어갔다.

“못 들으셨나….”

뒤에서 뭔가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네가 유명 인사가 맞긴 하는가 보다. 이런 데서도 알아보고.”

“그래봤자 돈놀이하는 사람인데 뭘.”

내 말에 영빈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영빈의 안내를 받으며 그림들을 구경했다.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세계적인 상을 받았다는 제목에 호기심이 동해 보았던 전생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당시 영빈의 작품은 한국은 물론 세계경매까지 진출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서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어떤 작품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가격으로 책정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그를 보고 돈독이 올랐다고 비판하는 대중들도 많았다.

영빈은 인터뷰에서 자신을 돈만 보는 예술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그림에 스스로 높은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 내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정한 것이다.’

그때는 그저 예술병에 걸린 재벌이 마음대로 지껄인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본 영빈은 그 누구보다 순수했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영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있었다.

동행은 무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가이드라인을 따라 움직이는데 조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영빈은 그림만 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작가의 것인가 싶어 밑에 적힌 글을 찾았다.

[서영빈. 처형]

설치미술에도 관심이 있다는 걸 들어본 것 같긴 하다.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흘려들었던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밑에는 설명이 적혀있었는데, ‘결속과 단결’이라고 간결하게 적혀있었다.

작품 설명이 제목과 모순적이라 더 흥미를 느꼈다.

손가락만 한 고무 인형들이 손을 위로 해서 유리를 받치고 있었다.

고무 인형들은 족히 백여 개는 되어 보였는데 키도, 얼굴도, 피부색도 제각각이었다.

그들이 받치고 있는 유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더 공허했다.

‘처형… 그리고 결속과 단결.’

조형물을 보며 이제는 모습도 흐릿한 나의 전생, 강현재가 떠올랐다.

내가 죽음으로써 서범준은 모든 것을 가졌겠지.

그러고 보면 처형과 결속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서로 맞닿아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았다.

남자 한 명이 서서 자신과 같이 처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죄다 명품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남루한 행색이라 더 눈에 띄었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나이를 알기 어려웠지만, 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와락 어깨를 감싸며 어깨동무했다.

“빠져나오느라 혼났네. 처형이 마음에 들어?”

영빈이었다.

“응. 혼자 조형물이라 그런지 시선이 가네.”

“저 인형들 하나하나 내가 다 제작한 거야. 시간도 꽤 들었고… 그러다 보니 정도 많이 가는 작품이야.”

영빈은 흐뭇하게 처형을 바라보다가 내 옆에 있던 남자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형주 형! 못 온다면서 왔네. 강빈아 인사해. 이쪽은 나랑 같이 미술 하는 김형주 형. 형주 형 이쪽은 내 동생 서강빈.”

김형주?

영빈이 갑작스레 소개해준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들었다.

김형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전 세계를 아우르는 천재 예술가인데?

이 사람이 영빈의 친구였다고?

놀라서 인사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는데 형주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화가 김형주라고 합니다. 저랑 같은 작품에서 멈추셨군요.”

“네. 안녕하세요. 사업가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의 남루한 행색이 이해되었다.

지금은 이름도 알리지 못한 무명의 화가에 불과하지만 지금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들은 나중에 수십, 수백억 원대에 팔리게 된다.

특히 형주의 작품 ‘선’은 드림웍스의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게펜이 한화로 400억 상당의 돈을 주며 경매에서 낙찰받아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형주 형도 조만간 전시회를 열기로 했어.”

형주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형주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고 나서 몇 년 뒤의 일이었다.

37세의 나이로 자살을 선택한 그는 생전에 남겼던 백여 점의 작품들로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화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이 뛸 가격을 생각한다면….

“형주 씨도 ‘처형’ 앞에서 멈추신 걸 보니 취향이 비슷하신 듯한데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하군요. 제게도 전시회의 초대장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형주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

태선증권사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대표님. 찾았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의 영균이었다.

“찾았다니. 설마?”

“네. 노정환입니다.”

노정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길고 긴 추격전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위치는 어디입니까?”

“지금은 종로구 쪽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노정환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CCTV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나타났다고 하네요.”

“회사로 데려오실 수 있습니까?”

“그건 쉽지만, 범죄자를 대표님 건물에 들이는 건 좋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쓰지 않는 공사장을 알고 있으니 그곳으로 와주시겠습니까?”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짚어주자 더욱더 영균에게 믿음이 갔다.

“알겠습니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주십시오.”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와 황비서와 함께 차에 탔다.

그나저나 얼굴도 안 고친 인간이 대낮에 카페라니….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사기를 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인가.

아직 한산한 시간이라 그런지 영균이 노정환을 끌고 간 공사장에 도착하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임기사를 밖에 대기시키고 황비서와 공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균과 노정환이 있는 곳은 건물 2층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무릎을 꿇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정환과 뒤에 서 있는 덩치 큰 사내, 그리고 그 앞에 깍지를 끼고 서 있는 영균이 보였다.

노정환의 목덜미를 잡은 사내는 아마 영균의 경호팀 중 한 명일 것이다.

“차실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제 일이니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정환은 기절해있었다가 깼는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당신들. 경찰 부르는 수가 있어!”

벌떡 일어나려는 노정환을 덩치 큰 사내가 손으로 눌러 다시 무릎을 꿇렸다.

그보다 노정환이 경찰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

노정환은 신음을 흘리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서강빈?”

“그래. 노정환. 그때는 잘도 빠져나왔더라.”

노정환은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이거 왜 이래? 그때 나 경찰서 간 거 두 눈으로 확인했잖아. 나 죗값 다 치른 사람이야!”

아무래도 경주의 힘을 믿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를 대비해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해왔다.

“황비서.”

황비서가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노정환 앞에 쌓아 올렸다.

노정환이 차명으로 진행해 온 계약서들, 구체적인 사기 방법과 투자계획서들, 그리고 그가 얼굴을 바꾸기 전 사진들과 사기를 친 정황 등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이, 이게 뭡니까?”

“뭐겠어? 네가 얼굴 바꿔가면서 사기 친 흔적들이지. 궁금하면 보던가.”

노정환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어 읽어보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걸 다 어떻게….”

“알아서 뭐 하게?”

황비서가 이용하던 흥신소의 고객 중 한 명이 문경주라는 말은 구태여 할 필요 없었다.

노정환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라지자 할 말을 잃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경찰에 잡혀도 금방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증거불충분.

하지만, 이 정도 자료면 아무리 경주라 해도 노정환을 서에서 빼낼 수는 없을 것이다.

채찍을 때렸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다.

“걱정하지 마. 경찰에 넘길 거였으면 이렇게 널 직접 찾아왔겠어?”

노정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문경주 의원이랑 어떤 사이야?”

노정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지만, 곧 제 얼굴색을 찾았다.

헛기침을 한번 한 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문경주 의원이라면 국회의원 아닙니까?”

“한 번 더 헛소리하면 거래 자체를 없던 일로 하지.”

이제 와서 오리발이라니… 사기 본능이 뼛속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노정환은 망설이다가 이내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도 다 문의원 선거자금으로 들어갔고요. 저는 그저 문의원의 여러 장기 말 중 하나일 뿐입니다.”

노정환은 얼굴을 한껏 구겨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성형을 많이 했던 얼굴이라 그런지,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 표정을 지어봤자, 나는 경주가 정계에서 퇴출당하고도 노정환의 사기행각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벌인 사기로 인한 피해액과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그를 이대로 내보내는 것은 못 할 짓이었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의 심정을 모르는 사기꾼 자식에게는 사기로 응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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