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흥신소 사람을 만나러 간 영균이 돌아온 것은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영균은 내 앞에 우뚝 선 채 말하기 시작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황비서가 이용하던 흥신소의 의뢰자는 저라고 밝혔습니다. 계약서에 사진까지 남겼으니 앞으로 대표님이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믿음직스럽네요. 흥신소 사람이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전에 진행했던 의뢰에 진전이 있어서 왔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직접 간다고 전달했으니 불편하게 하는 일 없을 겁니다.”
단순한 경호를 떠나서 내 모든 안위를 위해 일하는 영균의 모습을 보자, 진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진태의 말처럼,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을 일이다.
“그보다 진전이 있다면 무슨 일입니까?”
“노정환과 거의 흡사한 인상의 남자가 한국에 밀입국한 것이 CCTV에 찍혔습니다.”
“흡사하다고요? 성형수술을 했을 텐데.”
“한 번 확인해보시죠.”
영균이 건넨 서류 봉투 안에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부두에서 캐리어를 끌고 어딘가로 가는 남자의 모습이 다각도로 찍혀있었다.
넓은 이마가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짝였고, 처진 눈썹과 매부리코는 분명 내가 알던 노정환의 모습과 닮았다.
시선을 사진에 두며 영균에게 물었다.
“언제 찍힌 겁니까?”
“오늘 새벽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인천 부두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언제 또 성형수술을 할지 모릅니다. 자금 더 투입해도 되니까 되도록 빨리 찾아주십시오. 서동만 사장과 문경주 의원도 예의주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흥신소에 사람을 더 붙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노정환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어떻게 할지는 머릿속에 구상해둔 바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흥신소 일은 차실장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황비서는 그간 고생 많았어.”
황비서도 그동안 흥신소를 이용하며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활동비 명목의 계좌는 차실장님한테 인수할까요?”
“그렇게 해. 차실장님도 추가로 필요한 비용이 있으면 청구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황비서에게 의뢰비로 준 돈만 벌써 10억 원이 넘어갔다.
흥신소에서 가져오는 정보들을 보면 그럴 만하긴 했지만.
“흥신소에 들려서 상황을 직접 보고 움직이겠습니다. 그동안 대표님 경호는 제 팀이 맡아줄 겁니다.”
영균이 전화하자 1분도 되지 않아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들어왔다.
경호와 뒷일,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철저한 인물이었다.
***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당 조해관.
사극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복도 끝에는 VIP룸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안에서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대표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경주는 눈앞에 앉아있는 초로의 남자에게 청주를 따랐다.
남자의 이름은 최수철.
경주가 속해있는 창해당의 당 대표였다.
“거참. 작작 좀 불러내라니까.”
“대표님이 불러야 나오시는 분입니까? 좋으시면서 왜 그러세요.”
경주가 쇼핑백을 수철 쪽으로 밀었다.
수철은 경주가 따른 잔을 마시고 쇼핑백을 슬쩍 보았다.
“뭐야. 저번이랑 다르네? 문의원 돈 좀 들어왔나 봐.”
“저번에 섭섭하셨죠? 이번에는 넉넉하게 넣었어요. 호호.”
경주는 수철을 향해 작위적인 미소를 띠었다.
최수철은 당대표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창해당의 원로의원으로 정사를 결정하는데 주요한 인물이었다.
이전부터 경주는 원로의원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경주는 종종 그를 찾았다.
사실 2선에 성공한 원인도 수철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진태가 경주를 국회의원 연임하는 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경주에게 관심을 잃었지만, 경주는 돈으로 그의 환심을 샀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뭐 그게 내가 결정하는 건가? 국민들에게 보여지는 자네 인망이 중요하지. 허허.”
경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쇼핑백 안에 들어 있던 돈은 10억.
그러나 수철은 그 이상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최대표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제가 아는데요. 뭘. 앞으로 1년 남았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준비할게요.”
“술이나 따라 봐.”
수철이 비어있는 잔을 흔들었다.
경주가 청주는 따르는데 수철이 말을 이었다.
“태선가 며느리라길래 잘 키워놓으면 뭐라도 받을 줄 알았네. 그런데 회장이 눈 돌린 며느리라니…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네가 알기나 해? 쯧.”
경주는 국회의원이 되고 2선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태선가라는 뒷배경이 작용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수 있었다.
“3선까지 달고 창해당 원내대표 자리에 오르면 회장님이라고 별수 있겠어요?”
“자네가 원내대표? 허, 참.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원내대표 자리가 어디 사랑방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우의원님하고 정의원님한테도 성의를 다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태선전자 서재만 사장님 아시죠? 이번에 드린 성의도 아주버님이 도와주셨어요.”
태선전자 얘기까지 나오자 수철이 흥미를 보였다.
태선그룹의 계열사들을 전부 포함해서 태선전자는 현재 한국 굴지의 1위 기업이었다.
“태선전자 사장님까지 그렇다면 뭐… 어쨌든 서회장 눈치는 계속 봐. 그 양반이 정계에 어디까지 손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전심전력으로 자네를 도와도 서회장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무로 돌아간다고.”
“네. 명심할게요.”
“아무튼 잘해 봐. 그리고 성의도 좀 더 표하면 더 좋겠지?”
수철이 쇼핑백을 흔들며 말했다.
“당연하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경주는 식탁 아래로 하얗게 될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자신이 계획하는 일대로만 되면 수철 같은 인물은 거쳐 가는 단계일 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거스를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쥐겠다고 다짐했다.
***
마현석은 원래 정계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이었다.
창해당 소속으로 서울시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와 발자국 없이 재직이 끝나고 조용히 은퇴를 해야 했다.
정치적인 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났던 현석은 정계 은퇴 이후 보험사를 필두로 재계 서열 14위 마현그룹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쫓기듯이 정계에서 나왔지만, 연줄이 끊어진 것은 아니어서, 협업사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통과시켜 재벌가에 이름을 새긴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계 그룹은 마치 벽이 처진 것처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게다가 현석을 가장 크게 도왔던 양의원이 최근에 정계 유착과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까지 받고 나서는 이제 대놓고 나서서 돕는 사람이 없었다.
정치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새롭게 눈을 뜬 사업에 대해서 새로운 열망이 생길 찰나,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경주가 찾아왔다.
“마회장님. 그간 건강하셨지요?”
“오랜만입니다. 의원 자리를 다시고는 처음 뵙는 거지요?”
“맞아요. 호호.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경주의 말에 현석은 의아했다.
경주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로만 안면을 튼 수준이었고, 같은 정당이기는 했지만 둘이 접촉한 적은 거의 없었다.
창해당에 남아있던 지인의 말로는 경주가 연임할 확률도 높고, 당내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태선가라는 뒷배경으로 마현그룹은 성에 차지도 않을 텐데 찾아온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문의원님이 근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건가요?”
“이런, 실수했군요. 허허. 우선 앉으시죠.”
경주는 소파에 앉으며 두리번거렸다.
“재계 14위 그룹이라더니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네요.”
“태선가 사람의 눈에나 그렇게 보이지, 일반 사람인 저는 만족합니다. 허허.”
마현 보험사 최상층에 있는 현석의 집무실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다.
경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회장님. 빌딩 더 높이 올리고 방도 더 넓고 고급스러운 곳으로 옮겨야죠.”
“설마 태선 쪽에서 마현을 노리는 겁니까?”
현석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외환위기가 발발하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대기업이 인수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인수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마현, 건재합니다. 저희 쉽게는 안 흔들립니다.”
단호한 현석의 말에 경주는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마회장님. 전혀 잘못 짚으셨어요. 제가 오늘 찾아온 건 태선가의 일원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 문경주로 온 거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있으면 국회의원 선거잖아요. 제가 욕심 있는 건 아시죠?”
그제야 현석은 경주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되자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저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문위원님께선 든든한 뒷배도 있으실 텐데… 저를 찾아온 이유를 도통 모르겠군요.”
“서회장님은… 저를 아끼긴 하지만 정치에 나서는 것은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세요. 정치인을 돈 주고 사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마회장님. 도움 필요하지 않으세요?”
사실 현석은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현석의 뒤를 봐주던 양의원이 검찰수사를 받고 있었고, 마현그룹의 생사는 양의원에 말 한마디에 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현그룹이 더 크게 성장하려면 뒷배가 필요했다.
“제가 도왔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마회장님 쪽 사람을 태한당에 앉히시죠. 원하는 자리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자세한 건은 서류로 남기자고요.”
구두가 아닌 서류로 남기자는 말은, 양측에 족쇄를 걸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경주를 바라보던 현석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그럼 금융거래정보조사권의 완화도 가능하겠습니까?”
“계좌 추적권이요?”
경주가 잘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IMF의 구제금융 이후에 금융거래정보조사권이 도입되었다.
계좌 추적권으로도 불리는 금융거래정보 조사권이란 쉽게 말해 부당거래를 차단 및 조사하기 위해 금융거래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다.
현석의 뒤를 봐주고 있던 양의원이 구속수사를 받게 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마회장님도 찔리시는 게 많나 보네요. 호호. 안 그래도 그 법과 관련해서 말이 많은데 법률안 개정에 힘 좀 써볼게요.”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대신 마회장님도 노력하셔야 해요. 법률안 개정이 쉬운 게 아니니까요.”
이제 와서 양의원과의 유착 의혹을 떨칠 수는 없겠지만, 계좌 추적권의 완화로 자신과 연결된 고리를 끊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의원님께 직접 드리기에는 양의원 때문에 시선이 따갑고…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건 저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쪽 분야 전문가가 곧 한국에 들어오거든요.”
“전문가요?”
경주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현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