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형님은 요즘도 골프 즐기시죠? 한번 라운딩하자고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네요.”
“경주야.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나 바쁜 사람이다. 본론만 꺼내자.”
진태가 경주의 정계 진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척질 필요는 없으나,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경주는 작정하고 왔는지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선거자금을 좀 지원해주셨으면 하고 찾아왔어요.”
“선거자금?”
“네. 당에서도 이번에 저를 밀어주기로 했고, 이번에 달면 3선이에요. 3선까지 달기만 하면 그 명분으로 원내대표까지는 문제없어요. 당에서도 이번에 저 확실하게 밀어주기로 했고요.”
명분이라는 말에 비웃음을 흘릴 뻔했지만, 재만은 차분히 경주를 보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경주가 소속된 당이 여당은 아니지만, 정책을 겨루는 거대정당 중 하나였다.
게다가 경주가 원내대표를 달고 여야가 바뀌기라도 한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도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득보다 큰 문제가 있다.
“경주야. 지금 나보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라는 거냐?”
“회장님 연세 생각하셔야죠. 이제 실권은 아주버님에게 있지 않겠어요? 원내대표를 달고 아주버님께 유리한 정책들 펼쳐나가면 후계를 확정할 수 있잖아요.”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그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데, 경주는 웃음이 긍정의 신호라고 여겼는지 마주 보며 미소 짓기 시작했다.
부부가 쌍으로 눈치가 없구나.
경주를 그냥 이대로 쫓아낼까 하다가, 이용할 게 있는지 조금만 더 떠보기로 했다.
“내가 승계자라 해도 제 남편보다 중요할 수는 없지. 동만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이는… 아주버님도 아시잖아요. 허우대만 멀쩡하지 별로 볼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태선물산이 1위 자리를 고수할 때 그이가 한 게 뭐가 있나요? 사실상 경영권은 저한테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정치 생활이 꿈이지만 그이는 아무것도 없어요. 욕심도 없고. 게다가 회장직에 아주버님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요.”
경주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경주가 뱉은 말의 의의는 차후 경영권 싸움에서 태선물산은 재만을 지지하겠다는 말이었다.
“정치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도 되겠어?”
“그만큼 아주버님을 신뢰한다는 거죠.”
신뢰의 원천이 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경주와 단둘이 대화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떤 사람인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편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
재만은 경주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네 뜻은 잘 알겠어. 곧 답변을 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가방은 집사람한테 잘 전해줄게.”
경주는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아주버님.”
경주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재만은 곧바로 동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이 무슨 일이래.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네 아내가 방금 왔다 갔다.”
“겨, 경주가?”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니 역시 경주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자신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얼굴은 어때 보였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 설마… 그 나이 먹고 아내랑 싸우기라도 한 거냐?”
답이 들려오지 않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같은 배에서 나온 자기 동생이 어쩜 이렇게 자신과 다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경주가 거기에는 왜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더라. 나보고 선거자금을 대달라고 했어.”
“형은… 형은, 뭐라고 했는데?”
동만은 경주를 집안에 데리고 왔을 때처럼, 아직도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면이 태선가에서는 독이 되었다.
“그게 중요하냐? 네 생각이 중요하지. 어떡할까. 도와줘, 말아.”
“도와줘. 그거 경주 꿈이야.”
망설이지도 않는 동만의 말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너한테 차명으로 백억 입금할 테니까 알아서 해라. 이만 끊는다.”
“형… 고마워.”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차명으로 된 백억 원의 가치는 컸지만, 그 정도 돈은 재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주가 이 돈으로 정계에 잘 안착해도 써먹기 좋았고, 실패한다면 약점을 잡아 물산을 차지할 수도 있다.
전화를 끊은 재만은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며 창가를 바라봤다.
***
동만이 집에 돌아온 것은 근 한 달 만이었다.
경주는 이렇게 긴 시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지만, 동만이 딴마음을 품었다고는 의심도 해본 적 없었다.
동만이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애처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는 현관 앞에 서 있는 동만을 흘겨보았다.
“다시 올 거면서 집을 나가긴 왜 나가?”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지도 못해?”
“당신 집은 무슨, 여기, 이 자리. 누가 오게 해준 건데!”
“그렇게 혼자 잘나서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재만이 형한테 가서 선거자금 대달라고 했어?”
동만의 말에 경주는 경직된 채 동만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어…?”
“재만이 형한테 백억 받았어.”
경주는 반색하며 동만을 흔들었다.
“정말? 그거 내가 찾아가서 받기로 한 거야. 왜 당신한테 줬지? 아무튼 내일까지 입금해줘.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에 최대표랑 만나기로 했는데 다행이다.”
동만은 말없이 경주를 바라봤다.
그러자 경주는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야, 당신. 왜 그래? 설마 딴마음 품은 거 아니지?”
“너한테 보낼게. 그런데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약속? 그거 애초에 아주버님이 정치자금으로 보내주신 거잖아.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경주야. 다 알겠으니까, 너한테 보낼 테니까. 노정환은 이제 끊어내자. 창훈이한테 성형수술이니 뭐니 시키지 말고 딱 이걸로 끝내자고.”
동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말할 때는 늘 무언가 결심했을 때였다.
그러나 동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금 장난해? 백억이면 당의원들한테 뿌리면 끝나. 당대표한테 또 따로 챙겨주고 뒷방노인들까지 챙길 거 생각하면 한참 부족해.”
“돈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볼게. 그러니까 그냥 끊자. 나는 그냥 우리 가족이 위험한 일 안 겪었으면 좋겠어.”
동만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무능력하다는 말과도 같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동만은 몇 마디 더 하려다 이내 포기하듯 안방으로 들어갔다.
경주는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옷장 맨 밑 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호텔에 있을 법한 작은 금고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금고를 열자 각종 서류와 계좌와 함께 대포폰이 보였다.
경주는 대포폰으로 노정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을 울려대도 노정환은 받지 않다가 세 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야 받았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전화 걸면 재깍 받으랬지.”
“아, 문의원님. 사업 구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 잠시만요. 곧 갈게!”
수화기 너머로 애교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국어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너 지금 여자 끼고 노니? 너 지금 수배 중인데 제정신이야!”
“오해입니다. 오해. 그거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연한 정환의 목소리에 더 화가 났지만, 참기로 했다.
노정환은 앞으로 정계 진출을 위해서 필요한 인물이었다.
“브로커한테 연락이 왔어. 다음 주 중에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게 상해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오늘 아침 브로커에게 한국으로 들어오는 화물선 하나를 섭외했다고 연락이 왔다.
우선 재만에게 받은 백억 원으로 급한 불을 끄고, 이후는 정환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자금 걱정은 없을 것이다.
“드디어… 한국으로 가게 되는군요. 중국 음식이 안 맞아서 고생했는데. 흐흐.”
“아무튼 대기하고 있어. 수배지 돌렸다니까 모자라도 푹 눌러 쓰고 사리면서 지내.”
“그건 제 전문인 거 아시잖아요. 아무튼 한국 가자마자 연락드리겠습니다.”
***
근 한 달 만에 태선증권사로 출근했다.
태선증권사의 일을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태선가 내에서의 시선도 있어서 자리는 하나 가진 게 나을 것 같아서 관두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준만이 사장으로 있어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출근해서 얼굴을 비췄다.
예전에는 망나니로서 가끔 얼굴을 비추니 사람들이 한심하게들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사업적 감이나 유명세에 직원들은 내가 출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본부장실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투자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투자 제안과 기획서 검토 등을 해왔다.
준만에게 투자 흐름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을 했던 터라, 근 몇 년 사이 10위 권에 머물렀던 태선 증권사는 이제 대한민국 최고의 증권사가 되었다.
물론 기업 단위의 투자를 진행하다 보니 개인 투자의 수익률과는 비할 바가 안 됐지만 다른 증권사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익률이었다.
황비서가 책상 위로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커피입니다.”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일을 시작했다.
본부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업무들은 새로 영입한 임원급들이 하고 있었고, 내가 하는 일은 투자할 몇 개의 기업을 알려주는 고문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까지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귀찮은 업무였지만, 이제는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디테일하게 작성해줄 필요는 없었다.
황비서가 달력을 갈아 끼웠다.
“벌써 99년이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대표님과 일한 지도 벌써 7년 차니까요.”
“아직 7년밖에 안 지난 거지.”
내 말에 황비서는 오랜만에 미소를 보였다.
임금은 어느 회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주지만, 황비서는 늘 일에 치이어 살고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더 기대게 되는 부분도 있고, 황비서처럼 유능하게 일해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는 차영균 경호실장.
그동안 경호원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별 느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진태의 사람이니 확실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내 뒤를 지킨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한 기분을 줄 줄은 몰랐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가 이용하는 흥신소 사람입니다. 나가보겠습니다.”
황비서가 나가려고 하자 영균이 말했다.
“흥신소 사람이 여기에 왜 찾아옵니까. 대표님. 제가 같이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흥신소 자체는 법에 저촉되지 않더라도 하는 일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표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가 조처하고 오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진태가 말했던 뒤를 맡긴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나.
흥신소를 이용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데 오늘로 그런 걱정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영균이 고개를 한번 숙이고 황비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