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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59화 (59/249)

#59화

진태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본 지 벌써 수 분이 지났다.

진태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대화가 시작된 건 차가 차갑게 식은 뒤였다.

“너는 분명 1조 4천억 원의 채권을 거절했다. 맞지?”

“예. 맞습니다.”

“그런데 네가 방금 제안한 건 추가로 받을 태선반도체 지분까지 합쳐도 1조 3천억 원에 못 미쳐.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도 알 거다.”

내가 10억 달러의 지분을 받게 된다면 진태의 자식들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범준을 비롯한 사촌들과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대주주가 된다.

채권이 아닌 주식을 받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태선, 그 자체였기 때문에.

“물려받은 다른 큰아버지와 고모들과 다르게 저는 제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와 제 몫을 가지려고 합니다.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그 반대다.”

진태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작게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온실 전체를 울렸다.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너무도 쉽게 수락하는 진태의 모습에 내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태선그룹 전체 주식 중 태선가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20퍼센트 남짓이었다.

유상증자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쉽게 수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쉽게 수락하시니까 김이 빠지는데요.”

“범준이는 계열사 하나를 받았는데 네가 받은 것이 있더냐?’

그제야 진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쉽게 물려주지 않던 진태가 이제 나를 태선가의 완벽한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래할 비지니스 대상으로 보던 나와 달리, 진태는 나를 태선의 유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제안한 것이 태선가의 지분이다.

진태 입장에서 많은 지분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손자에게 태선가의 지분을 물려주는 것이니 전혀 나쁜 것 없는 조건이었다.

진태는 단번에 나의 의도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익계산까지 정리를 끝냈다.

“네가 받을 주식만 1조 2천억 원이 넘는다. 원하는 기업이 어디냐.”

태선그룹은 지주회사가 따로 없지만 메인 사업부가 있는 곳은 태선전자다.

태선 전자의 주식으로만 1조 2천억 원어치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이제 막 태선그룹에 발을 들였을 뿐이다.

태선 전자를 부른다면 진태 역시 이 협상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재만을 비롯한 아버지 남매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주요 계열사들로 분리해서 주십시오. 제 명의로 약속한 지분이 들어오면 당일이라도 10억 달러 보내겠습니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진태의 순순한 태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는 했지만, 진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침묵이 이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태가 말했다.

“내가 별말 없이 그냥 넘겼다고 생각하느냐?”

“… 맞습니다. 사실 패를 몇 장은 더 들고 있었거든요. 한 장밖에 까지 않았는데 수락해주시니 당황했습니다.”

내가 내건 조건에서 더 깎아내리진 않겠지만, 진태를 설득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진태가 말을 꺼냈다.

“자만하지 말고 오늘 일을 잊지 마라. 너는 약속을 지켰고 판을 깔았어. 이 거래는 애초에 만나기도 전에 네가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태의 얼굴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네게 줄 지분은 정리해서 보내마. 섭섭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들어와라!”

“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정장을 입은 남자 네 명이 온실로 들어왔다.

마치 어떻게 걷는지 맞춘 것처럼 격식 있는 걸음걸이였다.

가까이서 보니 한 명, 한 명의 풍채가 남달랐다.

“여기서 한 놈 골라 봐.”

“예? 할아버지의 경호원을요?”

“그래. 너 사업은 크게 벌이면서 몸 지킬 사람 한 명 쓰지 않더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믿을 만한 사람은 구하기 힘든 법이야.”

경호원들의 시선은 모두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미동 하나 없는 것이 마치 태산과 같았다.

“여기 있는 놈들 하나같이 네가 죽으라면 죽고, 너 대신 빵에 가라면 갈 놈들이다.”

진태의 말을 듣고도 경호원들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죽으라면 죽고, 감방에 대신 간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개처럼 일했던 전생에서도 그렇게는 못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온실에 들어올 때부터 눈에 띄던 사람이 있었다.

네 명의 경호원 사이에서 가장 덩치가 작은 남자.

물론 그들 사이에 있을 때의 기준이고 일반인과 비교한다면 상당한 편이지만.

‘이 사람이 가장 실력자다.’

내가 고른 경호원은 숨을 쉬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기척이 없었다.

그리고 진태 앞에서 긴장한 기색을 하는 다른 경호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던 사람이다.

“저는 이분으로 하겠습니다.”

내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진태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감이 정말 좋긴 좋구나. 골라도 차실장을 골라? 내 측근을 빼앗기게 생겼구먼.”

실장이라면 경호실장?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이었다.

설마 경호실장까지 껴서 선택지를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진태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사람이라면 내가 모르는 정보에 대해서 들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경호든, 뒷일이든 실력이 확실할 것이다.

나는 당황한 척, 손을 저었다.

“할아버지의 경호실장까지 뺏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분으로 하겠습니다.”

“됐다. 이놈아. 내가 한 번 뱉은 말을 어긴 적이 있더냐? 영균아. 이제부터 이놈이 네가 모시게 될 주인이다.”

남자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가 펴고는 말했다.

“차영균이라고 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발령인데도 당황도, 질문도 없다.

그저 받아들인다.

대신 죽으라면 죽는다는 진태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하면 거절할 방법도 없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치실장이 허리를 숙이자 나는 한 손을 내밀었다.

영균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한 손으로 손을 내밀었다.

두터운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이런 사람을 잃고도 진태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차실장 밑에 애들만 다섯 명이야. 차실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쓸만한 놈들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게다.”

믿음직한 경호실장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경호원은 적당히 뽑으려고 했는데, 아예 팀을 받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군을 얻은 듯했다.

***

경주가 2000년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앞으로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투표 비리를 포함해 말이 많았지만, 결국 국회의원 3선에 달게 되고, 입지를 인정받아 원내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태선물산과 경주의 정경유착 의혹이 터지고, 국회의원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비리 정황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며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해당 사건은 종잡을 수 없이 커져 태선그룹 전체의 의혹으로 퍼졌고 진태 또한 검찰수사를 받기도 했다.

동만을 경질하고 경주가 국회의원 자리를 내놓으며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후에도 태선물산에 지속해서 악영향을 끼친 대사건이었다.

당시 몸담고 있던 증권사에서도 큰 피해를 봤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문경주 의원이 당 대표, 최수철과 단둘이 만나는 정황을 담은 사진입니다. 고급 한정식당인 조해관이 둘이 만났던 장소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들어갈 때 문의원이 들고 있던 쇼핑백이 최대표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황비서가 건넨 서류 봉투 안에는 경주와 남자가 조해관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나올 때 쇼핑백의 주인이 바뀐 정황이 담겨 있었다.

“고생했어. 서동만 사장은?”

“최근 집에 들어가지 않고 태선물산 근처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의원과 단둘이 외식을 자주 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좋았는데, 지금 이러는 이유는 차차 알아보겠습니다.”

“부부관계?”

“지난번 서동만 사장님이 태선증권사를 방문한 당일부터입니다.”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동만이 태선가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일방적으로 동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태선증권사를 방문했다는 날을 기점으로 했다는 것을 보면 나와의 대화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든 둘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은 희소식이다.

“문경주 위주로 더 파 봐. 조만간 터트려야 될 때가 오겠어.”

경주의 정계 생활의 원천 중 하나가 태선물산의 자금일 것이다.

진태가 자금줄을 틀어막고 있긴 하지만, 그런데도 동만이 사장의 위치에 있으니 어느 정도는 수급이 됐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가 틀어졌다면, 남은 것은 노정환을 비롯한 지하에 있는 돈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다.

노정환이 중국에 있다면 자금 유입이 안 되는 상황이므로 예상보다 빨리 불러들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더해 노정환에 대한 정보를 동만에게 흘려 초조하게 만들었으니, 노정환을 한국으로 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

경주는 환하게 웃으며 태선전자의 사장실로 들어왔다.

경주의 손에 들린 것은 요새 인기라는 프라다의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었다.

갑작스럽게 만나자는 경주의 연락을 받고도 재만은 태연했다.

“아주버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바쁠 텐데 오느라 고생했어.”

재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경주가 명절, 축일을 비롯할 때마다 찾아오거나 선물 한 아름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기약도 없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에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한걸요. 그리고 이건 형님께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경주가 공손하게 건넨 쇼핑백 안에는 명품 가방이 들어 있었다.

“프라다면 집사람이 이미 몇 개는 가진 걸 텐데….”

“해외에서 구한 한정판이에요. 구하기 쉽지 않은 가방이니 아마 없으실 거예요.”

“흠….”

티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학벌은 좋으나 태선가에 비하면 평범한 집안에 불과한 경주가 정계 진출을 노리는 게 거슬렸다.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정치자금 대달라는 것이겠지.

재만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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