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채규는 혀를 내둘렀다.
눈앞에 있는 20대 후반의 재미교포 남자는 젊은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관록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자신이 본론을 꺼낸 이유는 에릭을 쉽게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릭은 말투도 어딘가 어눌했고, 얼굴도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여서 이십 대 초반 혹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채규는 수십 년간 협상을 수백 번은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에릭이라는 청년은 그가 그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협상 대상들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에릭은 부드럽게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듯했다가도 정작 중요한 사항에서는 강경한 뜻을 고수했다.
협상을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1조 4천억 원 상당의 채권을 발행하겠습니다.”
“제 대답은 같아요. 10억 달러를 환전해주는 조건으로 채권은 받지 않을 거예요.”
대화는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
현재 환율은 1,200원대 중반이었다.
시세차익으로만 천억 원에서 이천억 원 사이의 이득을 안겨주겠다는데도 에릭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채규가 내건 채권의 표면금리도 높은 편이었다.
“이실장님. GB인베스트먼트의 연평균 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에릭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설립한 지 4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첫 출발은 300만 달러였어요.”
“300만 달러라뇨?”
지금 GB인베스트가 보유하고 있는 시가가 20억 달러라고 했다.
그럼 4년도 안 되는 사이에 약 700배의 수익을 올렸다는 말이 아닌가.
노련한 채규조차 경악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중간에 투자받은 금액도 있으니까 300만 달러가 20억 달러가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래도 저희가 표면금리에 눈길 돌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1년에 10퍼센트를 받든 100퍼센트를 받든, 저희는 그 이상을 벌 자신이 있어요.”
채규는 스스로가 우스워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애초에 환전해줄 이유가 없겠군요. 그럼 오늘 협상의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제가 반대해도 대표님이 환전해주기를 원하거든요.”
그제야 이 자리에 강빈이 나오지 않고 에릭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빈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환전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에릭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다.
뒤늦게 강빈의 의도를 깨닫자 감탄이 나왔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도요. 회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눈앞에 있는 에릭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자리를 계획한 강빈의 계략이었다.
진태의 곁에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왔다.
패배도 해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협상과 사업에 대해서는 도가 튼 성공한 사업가들이었다.
그러나 강빈은 사업 경험이 길기는커녕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
***
채규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에릭은 진이 빠진 모습으로 소파에 뻗어 있었다.
“어땠어?”
“애먹었어요. 이실장님 장난 아니시던데요. 애초에 10억 달러 규모 거래잖아요. 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이는데 이실장님은 미동도 없었어요. 제가 유리한 입장이어서 망정이지, 반대되는 뜻이었으면 턱도 없었을 거예요.”
에릭의 말대로 이번 협상은 우리에게 유리한 자리였다.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고, 그들은 바라는 뜻이니 말이다.
다행히 에릭도 제 역할을 잘해주어서 내가 원하는 바는 이룬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이실장님이 채권을 1조 4천억 원까지 올렸어요. 시세차익으로만 수천억 원에 표면금리로 매해 들어오는 돈만 수백억 원이었을 텐데… 그동안 소규모 투자로 진행했기 때문에 이만큼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지, 앞으로는 힘들 텐데요.”
에릭의 말처럼 지금껏 수십, 수백 배의 이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금액이 크지 않아서였다.
앞으로 굴릴 몇천억 원의 돈을 수십 배로 불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미래를 알고 있는 처지에서 채권의 표면금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지금처럼 잘해 낼 거야.”
“그럼요. 대표님이 누구신데.”
신뢰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에릭을 보며 피식 웃었다.
***
채규는 태선증권사에서 나오자마자 진태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강빈의 의사는 알아냈으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호음이 정확히 다섯 번이 울리고 진태가 받았다.
“회장님. 저 채규입니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됐어?”
“죄송합니다. 채권 1조 4천억 원까지 밀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밀어봤어야지. 왜 거기서 멈춰?”
진태는 채규에게 얼마까지 제안할지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채규를 신뢰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진태가 생각했던 맥시멈은 1조 4천억 원보다 위에 있었다.
“더 밀어봤자 안 될 것 같아서 커트했습니다. 그리고 강빈 군은 처음부터 환전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그럼 왜 그런 자리를 만들어? 자세히 얘기해 봐.”
“환전은 하지만 원하는 조건이 채권이 아니라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채규는 아까 있었던 에릭과의 협상을 최대한 간결하고 핵심만 요약해서 전달했다.
채규의 말이 끝났을 때, 진태는 소리 내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모든 판을 강빈이가 짰다, 이 말이지?”
“에릭 장이라는 친구도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강빈 군은 그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으니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강빈이를 서재로 불러.”
“시간은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세 시간 뒤.”
그 말을 끝으로 진태는 전화를 끊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채규는 한숨을 짧게 내어 쉬고 다시 태선증권사로 발길을 돌렸다.
***
너무 자주 와서 그런지 이제는 익숙한 서재였다.
익숙하게 진태가 있을 안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못 보던 온실이 하나 보였다.
서재라 해도, 웬만한 도서관에 버금가는 크기이기 때문에 책장에 가려 안 보였었다.
안에서 진태가 큼지막한 정원용 가위로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취미가 생기셨나 봅니다.”
“나이가 드니까 괜한 호승심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가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진태가 호승심을 버릴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땀을 흘리며 나무를 손질하는 진태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서서 할애비가 손질하는 거 구경이나 하거라.”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진태를 처음 봤던 날이 기억이 났다.
그날도 지금처럼 가만히 서서 진태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불편한 마음이 없었다.
시계도 보지 않고 한참을 보낸 뒤에야 진태는 가위를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했다.
“아직도 참는 게 일상이더냐.”
진태에게 처음 했던 말이었다.
‘한때는 참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진태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만큼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일 테니까.
“그때 참지 않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너는 네가 한 말을 늘 지켰지.”
그동안 진태와 약속하고 협상했던 모든 것을 지켜왔다.
진태의 말에서 두터운 신뢰가 느껴졌다.
진태가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뒤를 따랐다.
온실 안쪽에는 투박한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제가 좋은 걸로 사다 드리겠습니다.”
“야, 이놈아. 내가 돈이 없어서 이런 것을 쓰겠냐? 가끔은 이런 느낌을 내고 싶어질 뿐이다.”
이어서 들어온 정원사 한 명이 진태가 잘라놓은 나뭇가지들을 치우는 것을 보고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 차를 따라주었다.
“채규에게 얘기는 대강 들었다. 환전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진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맞는 게 있고 틀린 게 있는 거지. 반반이 어디 있단 말이냐.”
“결정을 하는 것은 할아버지고, 제안을 하는 것은 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모든 조건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구태여 에릭을 거쳐서 말했던 것도, 한 달을 늦춘 것도 내 제안에 대한 힘을 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크하하, 은행이 조건을 걸어? 은행은 그냥 제시간에만 갚아주십사, 이자만 잘 내주십사, 하면 되는 거다. 웃긴 놈이로구나.”
에릭과 채규의 대화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제안을 하는 것은 나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진태다.
그러나 나에게는 진태를 설득할 만한 수단이 충분히 있었다.
QL이 시총 삼천억 원을 뚫고 삼천사백억 원대에서 안정화가 된 것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진태와 약속했던 기간이 이주도 채 남지 않았을 때였다.
중간에 정체기가 있어서 조금은 긴장됐지만, 다행히 목표치를 이루었다.
“우선 QL반도체가 제가 말씀드린 시총에 안착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잘 알다마다. 합병 이후에 지분 5퍼센트는 네 이름으로 넘기마.”
몇백억 원, 잠재적 가치로 따지자면 천억 원을 훌쩍 넘길 지분을 아무런 계약서도 없이, 진태는 그저 말 한마디로 넘겼다.
이것으로 나는 합병한 태선반도체의 지분을 무려 16.5퍼센트나 보유한 대주주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제가 생각했던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얼마나 대단한 조건인지 들어보자.”
진태는 이 상황마저 재밌다는 듯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이어질 내 말에도 그런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GB인베스트먼트에서 태선그룹에 10억 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태선 주요 계열사들의 지분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받은 것 외에 추가로 태선반도체의 지분 5퍼센트까지만 욕심내겠습니다.”
내 말을 들으며 진태는 서서히 미소를 잃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