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경주는 국회에 있는 개인사무실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향긋한 로즈메리 차를 마실 때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창 너머 작게 이루어진 숲과 잔디밭을 보면 아직 국회의원으로 남아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내는 여유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남자 때문에 깨졌다.
경주는 손에 들린 머그잔을 내려놓고 소리쳤다.
“내가 노크 좀 하라고 했지.”
“아, 미안.”
동만이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며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당신 이러라고 내가 출입증 구해다 준 줄 알아?”
“아, 알지. 근데 급한 일이야.”
“급한 일이 뭐 있어? 강빈이 만나고 오는 길 아니야?”
동만이 목에 맨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정환이 곧 잡힐 거래.”
“뭐? 노정환이 어떻게 잡혀. 지금 중국에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듣고 온 거야?”
“노정환이 중국에 갔다는 것도 강빈이가 알고 있더라. 자기가 투자하려던 회사에 사기 치려고 했다고 사람까지 붙였대!”
경주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노정환 잡히면 끝장이야.”
“중국 어디에 있어?”
“상해.”
“그것까지 아는 눈치던데….”
경주는 동만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만이 아무리 멍청한 인물이라지만, 중국 얘기를 직접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 노정환이 중국에 가 있다는 것을 강빈이가 스스로 알아냈다는 건데….
사람을 썼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빈이 그 사실을 동만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분명 노정환과 우리의 관계는 아직 모를 것이다.
정리가 되자 초조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아니, 여보. 노정환이 곧 잡힌다니까? 그 자식이 잡혀서 다 불면 어떡해.”
“우리가 모르기 전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 알잖아. 대비를 하면 되지.”
“대비? 다른 나라로 보내자고?”
동만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경주는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고 말했다.
“지금 회장님이 자금줄 다 끊어서 정치질도 못 하게 생겼는데 노정환을 다른 나라로 어떻게 보내. 그리고 차라리 잘 됐어. 노정환이 중국 가서 돈만 축내고 있는데, 다시 한국 들여와서 영업 시작해야지.”
“강빈이가 사람까지 붙였다는데 그래도 되겠어?”
“머리는 장식이야? 중국 쪽에서 제보 들어왔다며. 사람 다 거기로 붙일 거 아냐. 그럼 이제 한국이 오히려 안전할 거고, 창훈이한테 말해서 성형수술 제대로 시키자.”
창훈의 얘기가 나오자 동만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창훈은 동만과 경주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경주의 똑똑한 머리를 물려받아, 수재 소리까지 들었던 동만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집안의 의사가 나오면 좋을 것 같다는 진태의 말에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고 서른이 되기 전 진태는 병원 하라며 건물 한 채를 지어주었다.
동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노정환의 일에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경주가 예전부터 창훈이에게 노정환의 성형수술을 맡기자고 했지만, 그때마다 뜯어말렸다.
“꼭 창훈이한테 해야겠어?”
“당신이 사람 구해보든가. 그리고 노정환이 겁이 많아서 중국 놈들한텐 안 받겠다잖아. 장원장 그 새끼는 잡혀서 형량 줄이겠다고 노정환 보내려고 했고… 그러니 내 아들 창훈이밖에 더 있어?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이 창훈이밖에 더 있어? 나도 창훈이 잘못되는 거 싫어. 안전하게 하면 되잖아.”
범죄자를 상대로 성형수술을 해주고, 게다가 실력까지 갖춘 의사는 한국에 몇 없었다.
지난번까지 노정환의 성형수술을 맡아주던 의사는 결국 범죄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들켜 감방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노정환이 도망치듯 중국으로 간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그 의사가 형량을 줄이려고 지금껏 수술해왔던 명단을 통째로 넘긴 것이다.
“아무튼 노정환 관련은 그렇게 처리하자. 그리고 회장님과 강빈이는 대체 어떤 사이래? ‘할아버지’거리는 거 보니 꽤 가까운 것 같은데.”
“그건 확실하게 알아 왔어.”
동만이 으쓱한 표정을 짓자 경주는 불현듯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우선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강빈이 그 녀석. 요새 아버지께 미움받고 있다더라. 저번에 활강기업 인수전 알지? 그때 아버지랑 경합했던 게 YS 기회장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강빈이도 있었대. 우리야 뭐 알 길이 있나. 뭐, 아무튼 강빈이한테 태선에 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던데?”
“… 그래서?”
“뭐 힘내라고 몇 마디 해주고 힘들면 찾아오라고 했지. 하하.”
동만의 말을 들으며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동만은 얻어오라는 정보는커녕 강빈의 손바닥 위에서 아예 탭댄스를 추다가 왔다.
“그게 끝이야?”
“응? 아버지는 강빈이한테 관심을 잃은 것 같고, 강빈이는 조용히 살 것 같다는 거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보여.”
동만의 멍청함이 이번에도 화를 불렀다.
강빈의 의심을 사더라도 자신이 직접 강빈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경주의 화가 폭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회장님 성격에 강빈이가 인수전에 나가게 뒀을 것 같아? 게다가 활강은 망했고 강빈이가 대주주라는 QL을 태선반도체가 인수했어.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은데!”
“강빈이 말로는 자기가 아버지 걸 빼앗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빼앗아? 지금 제정신이니? 누가 감히 서회장님 걸 빼앗아! 주는 걸 받아먹지.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진짜.”
경주의 말을 듣고 이미 빨개진 얼굴을 한 동만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아내에게 헌신적인 동만이라지만 이런 모욕감은 참기 힘들었다.
동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당신 잘났어. 당신 원하는 대로 해. 나는 손 뗄 테니까. 근데 경주야. 그건 알아둬라. 네가 누구 돈으로 그 자리에 있는지.”
“일로 안 와? 야! 서동만!”
경주의 외침에도 동만은 뒤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
진태가 서재로 나를 불러들였다.
YS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발표한 당일이었다.
뉴스에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연수가 직접 나오지 않고 대변인이 나와서 발표했다고 전했다.
서재 안쪽에 있는 TV에서는 아직도 YS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속보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연수가 나올 때, 진태의 눈빛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백권용이 생각보다 더한 놈이더구나. 네 감이 그리 말하더냐?”
“안 좋긴 했습니다만… YS같은 재벌그룹이 휘청일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지난 삶에서 태선그룹조차 활강을 품었을 때, 갖가지 의혹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당시 한성그룹과 엮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역풍이었다.
“이제 YS는 이인자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게다. 기회장 연륜이 있으니 언젠가는 되찾겠지만 기약이 없지. 태선은 더 공고히 황제의 자리를 유지할 거야.”
진태의 말대로 태선이 1위의 자리를 빼앗긴 적은 없었다.
진태는 공격적으로 운영하며 다른 재벌그룹과 비교도 되지 않는 성을 쌓아 올렸기에 망정이지, 활강 인수 때문에 YS그룹과의 압도적인 격차가 좁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제 솔직히 말해 보거라. 정말 태선에 욕심이 없더냐.”
진태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에둘러 왔던 것처럼 말해야 할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말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 부르신 이유가 있군요.”
진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는다.
태선에 욕심이 없냐는 말이 순수하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QL반도체의 기업가치는 진태와 내기했던 지점까지 오르려면 아직 모자랐다.
활강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YS의 구조조정 발표가 일어났다고 해서 나를 급하게 찾을 이유는 없다.
예상이 맞았는지 진태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여우 같은 녀석. 집안의 다른 놈들은 덥석 물던데 네놈은 넘어가지 않는구나.”
“저는 태선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태선에는 지금 달러가 필요하다.”
IMF 체제하에서 작년 환율이 2,000원대를 찍고 지금은 안정화가 되어 1,200원대로 내려왔다.
외환위기 발발에도 태선은 굳건했지만, 문제는 국제통화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국제사회에서 한화는 현재 불안정한 통화였고, 원자재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했다.
소량 환전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기업 간의 거래였다.
그리고 진태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 투자회사가 미국에 있기 때문.
조금 더 흥정해볼까.
“할아버지 돈이야, 넘쳐흐르던 거 아니었습니까.”
“예끼 이놈. 달러 말이다. 네 영어 이름을 딴 그 미국 회사. 거기에 달러 좀 있을 거 아냐. 최대한 당기면 얼마나 되냐?”
현재 GB인베스트먼트는 투자 수익의 대부분을 재투자에 맡기며 순환하고 있다.
주요 IT 종목들을 제외하고 전부 정리한다면…
“10억 달러입니다.”
“10억 달러나? 우선 알겠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세한 건 채규를 보낼 테니 얘기해 보거라.”
10억 달러나 되는 거래를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에 채규를 보낸다는 것은 이번 거래에서 공과 사를 구별하고 확실히 이득을 챙기겠다는 진태의 표명과 다름없었다.
“제 지분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밑에 달린 직원들도 많고 자금 운용계획도 수립되어서 쉽게 10억 달러를 빌려드릴 순 없습니다.”
눈을 흘기는 진태는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곧장 알아들은 눈치였다.
“가만 보면 너도 타고난 장사꾼이구나. 네놈 마음에 들만한 제안을 할 테니 일단 가 봐라.”
“GB인베스트먼트의 전반적인 경영은 에릭 장이 맡고 있으니 이실장님을 그와 얘기하게 하겠습니다.”
“네가 아니고 총괄이? 흐음. 알겠다.”
진태가 어떤 제안을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미 보상으로 정해둔 것이 있다.
***
채규가 태선증권사로 찾아온 것은 한 달 뒤였다.
에릭은 진태의 최측근인 채규와 협상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별로 긴장되지 않았다.
지난번 연수를 찾아갔을 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빈이 자리를 비워준 본부장실에 앉아서 채규를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이채규 실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GB인베스트먼트의 총괄 에릭 장이라고 합니다.”
채규와 손을 맞잡고 명함을 나눠 가졌다.
얼굴의 주름을 보면 정년의 나이를 이미 지나 보낸 것 같지만 짙은 속눈썹과 그 안에 밝게 빛나는 눈은 채규가 아직 현역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채규를 눈앞에 마주하고 나서야 에릭은 조금씩 긴장되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인 경영을 맡고 있다지요?”
“하하. 그렇긴 하지만 대표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만한 위치에 올라갈 수 없었을 거예요.”
에릭은 침을 삼켰다.
여기서 자신이 실수라도 한다면, 그 피해는 오로지 강빈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규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태선그룹은 GB인베스트먼트의 달러를 환전받고 싶습니다.”
협상의 기본은 상대방과의 친밀도 형성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곧장 본론을 꺼냈다는 것은, 상대방을 시험하려는 것이거나 되레 협상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알리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그러나 채규가 간과한 것이 있다.
에릭은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갔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