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강빈이한테 연락해봤어?”
“해 봤지. 내일 오전에 자기 회사 사무실에서 보자더라.”
“아니, 여보. 강빈이는 당신 조카야. 왜 당신이 찾아가? 오게 만들어야지… 어휴.”
경주는 동만을 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준만은 애초에 집안에 욕심이 없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재만은커녕 제 동생인 영만보다 덜떨어진 인물이 바로 동만이었다.
태선물산이 1위 자리에 고수할 수 있는 이유도 자신이 경영에 일조했기 때문이라고, 경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이번에 가서 확실하게 알아보고 와.”
“그런데 왜 당신이 직접 가지 않고…?”
“어휴, 진짜. 생각을 좀 하고 살아. 평소에 잘 보지도 않는 큰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만나자면 없던 의심도 생기지 않겠어? 가서 자연스럽게 노정환에 관해서 물어보고 와. 그리고 회장님과 강빈이가 어떤 관계인지도 알아보고. 둘 다 중요한 거니까 신경 좀 써.”
“알겠어.”
멍청한 표정을 짓는 동만을 보며 경주는 복장이 뒤집히는 듯했다.
무능력한 남편은 태선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뒤에 달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경주가 정치 생활하며 받은 남편의 도움이라고는 태선물산을 물려받아서 돈이 꽤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국회의원 2선을 달고나서 진태의 반대로 막히게 되었다.
이전에 노정환을 통해 들었던 말이 있다.
노정환은 머뭇거리며 자신이 잡혔을 때 신고한 사람이 같은 태선가 사람인 강빈이라고 말했었다.
강빈은 의욕 없는 준만과는 다르게 욕심이 많고 진태에게 인정도 받는 인물이다.
그런 강빈이 혹시라도 자신과 노정환의 유착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진태에게 말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빈손으로 가지 말고 뭐라도 들고 가. 착한 큰아버지가 직접 조카의 사무실까지 와줬다, 다정한 척이라도 하라고.”
“그럴까? 어떤 게 좋을까.”
“그런 건 좀 당신이 알아서 하면 안 돼?”
“아, 알겠어.”
처음부터 경주가 동만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출신도 없이 그저 대학 동문이라는 이유로 동만을 만났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못내 바라던 정치 생활을 이루기 위해 동만에게 다가갔고, 순수한 동만은 그런 자신을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그런 동만이 고마웠고, 정치 진출을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했던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1년, 2년… 끝도 없이 이어지자 동만의 어리숙한 모습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태선이라는 이름을 활용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만 겨우 지키는 동만에게 염증을 느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자신에게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만의 모습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티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오케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만의 모습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
“황비서. 어떻게 됐어?”
저번 아침 조찬 때, 동만과 경주의 대화를 듣고 황비서를 통해 동만네 집안과 노정환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노정환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황비서가 이용하는 흥신소가 꽤 유능해 보였으니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그리고 어제 동만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으니, 중간 점검할 때가 되었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은데 인천 쪽 부두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노정환은 현행범이야. 멀리는 못 갈 거고 중국에서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 보내다 오겠지. 한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은 이용하기 힘들 거니까 사람 한둘만 붙이고 부두 쪽으로 집중해서 붙이라고 지시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뢰비는 아직 충분하긴 한데 조사가 길어지게 된다면 지금 자금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활동계좌에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저번에 10억을 넣었지만, 노정환에 대한 조사가 규모가 꽤 크게 진행되다 보니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추가로 입금했다.
황비서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대표님. 그리고 인센티브 감사합니다. 2억 원이라니…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됐어. 그보다 서동만이랑 문경주. 노정환이랑 유착관계면, 구린 놈들이랑 더 엮여있을지도 몰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조사 철저히 하라고 추가 지시해. 드는 돈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고. 그리고 에릭한테….”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동만이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경솔하게 들어오는 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방음은 철저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나와 황비서의 얘기를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큰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강빈아. 저번 조찬 때 보고 오랜만이다. 그리고 이건 선물.”
동만은 생글생글 웃으며 화분을 내밀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나는 일단 웃는 얼굴을 연기하며 화분을 받았다.
“산세비에리아라고 공기정화에 좋다네? 책상 옆에 둬.”
“아… 네. 하하. 감사합니다.”
화초를 사무실 안에 가득 채우지 않을 거면 차라리 자연환기가 낫다.
게다가 돈 많은 태선가의 물산 회장이라는 사람이 선물이라고 가져온 게 겨우 이런 화분이라니.
그래도 동만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속내를 알기 전까지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동만과 그의 아내, 경주와 노정환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 내 칼은 무디다.
“우선 앉으시죠.”
“그래, 그래.”
동만은 태선가 안에서도 체격이 크고 살집도 적당히 붙어있었는데, 어딘가 늘 맹해 보였다.
멍하니 앉아있는 동만을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어요?”
“아, 어쩐 일은 무슨. 그냥 조카 응원차 들린 거지, 뭐. 허허.”
동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직접 오셔서 응원도 해주시고 감사하네요. 큰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세요?”
“나야, 뭐. 늘 같지.”
그때, 잠깐이지만 동만은 살며시 내 눈을 피했다.
태선물산이라는 거대기업을 경영하면서 감정 하나 감추지 못하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밥은 챙겨 먹었냐는 둥 요즘 컨디션은 어떠냐는 둥 의미 없는 질문들이 이어졌고 나는 성실히 답변에 임했다.
의미 없는 대화 속에 지쳐 갈 때쯤, 동만이 옆에 서 있던 황비서를 힐끔거리며 말을 멈췄다.
앞으로 할 얘기는 둘이서만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비서가 대표 옆에 붙어있는 건 이해하지만 눈치 좀 챙기지?”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것이다.
황비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비서. 잠깐 나가 있어 줘.”
“네. 알겠습니다.”
말과 다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동만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요즘 아버지와 자주 만난다며?”
황비서까지 내보내 놓고 한다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그리고 그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도 뻔히 보였다.
참 단순한 사람이다.
“가끔 보기는 하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찾아가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찾아가는 게 탐탁지 않아 보이시긴 하지만요.”
“아, 그래? 나는 네가 아버지와 친해 보이길래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했지. 하하. 괜한 질문을 했네.”
얼굴을 실룩거리며 웃음을 참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지난 새해 조찬 때, 진태와 나의 관계를 보고 느끼는 게 많았나 보다.
이렇게 견제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걸 보니.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것에 비해 맹한 표정을 보면 문경주가 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던져줄 좋은 미끼가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인수전이 컸던 것 같아요.”
“인수전? 무슨 인수전?”
활강기업을 놓고 펼쳐진 협상테이블은 비공식적인 자리였다.
동만은 물론 관계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내가 그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저도 활강기업 인수전에 참여했거든요.”
“잠깐만, 활강기업이라면 그 반도체 활강기업?”
동만은 많이 놀랐는지 목소리가 한껏 커졌다.
“네. YS기업이 인수한 활강기업이요.”
“거기 대표가 인수하자마자 돈 들고 토낀데 아냐?”
“다행이죠, 뭐. 저도 할아버지도 피해 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 그렇지.”
내가 활강기업을 인수할 만한 재력을 갖고 있고, 표면상으로는 진태와 경쟁하려고 했다고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네. 할아버지가 활강을 노리는 것은 알았지만… 저도 탐이 나더군요. 어찌 됐든 저도, 할아버지도 활강 인수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제가 회장님 것을 빼앗으려는 것처럼 보이셨겠죠.”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동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지만, 속으로는 안심이 된 듯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저보고 태선에게 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더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단 말이야?”
앞뒤 맥락을 자르고 말하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
무능력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긴장이 풀린 동만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도… 아버지께 못 들을 말 많이 들으면서 컸다. 강빈이 네 맘 다 이해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되네요. 그래도 큰아버지는 태선물산의 사장님이시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없는데.”
“뭐, 힘든 거 있으면 연락해. 하하.”
약간은 경직되어 있던 동만의 자세가 완전히 풀어졌다.
어떤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동만이 말했다.
“아 그리고 너 인천경찰서 갔다 온 적 있지? 거기 서장이 나랑 아는 사인데 네가 왔다 갔다더라.”
“경찰서장이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아, 아니… 어쩌다가 술 한잔했는데 널 봤대잖냐. 너 뉴스에도 나오고 얼굴 제법 팔렸어.
“시간이 꽤 지난 일인데 물으시네요.”
내 말에 동만은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먼저 얘기 꺼낸 것도 박서장이라니까?”
동만은 참 단순해서 무슨 말을 해도 그의 의도가 한눈에 보였다.
노정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떠보는 것이다.
“네. 노정환이라는 사기꾼 때문에 갔다 왔습니다. 제가 투자하려고 한 회사에 사기를 치려고 하더라고요. 천하에 그런 놈이 있다니…. 듣자 하니 경찰서에서도 빠져나온 것 같은데 뒤에 누가 있나 봅니다.”
“그, 그래? 사기꾼은 외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하하… 꼭 다시 잡혔으면 좋겠구나.”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동만의 모습이 볼만한.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뭐? 노정환을 잡았다고? 네가 어떻게 말이냐.”
이거야 원, 동만과 노정환의 관계를 모르더라도 지금 동만의 모습을 보면 둘이 이렇고 저런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걸 이용한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제 투자를 실패하게 할 뻔한 놈이 용납이 안 돼서 중국 쪽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 사람을 썼는데 노정환이 중국에 갔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죗값은 받고 살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큰아버지?”
“그, 그렇지.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중국에서 노정환을 봤다는 제보를 받아서 잡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동만이 벌떡 일어났다.
“중국 어디서…?”
노정환이 중국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모른다는 걸 동만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
똥줄 좀 타라지.
“그게 왜 궁금하세요? 하하. 저도 모릅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받지는 않아서요.”
“…아, 참. 강빈아. 내가 다음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또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동만은 내 인사는 받지도 않은 채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동만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황비서가 들어왔다.
“노정환이 곧 입국할 거야. 곧장 잡아 와.”
“흥신소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아, 그리고 나가는 길에 저거 갖다 버려.”
나는 리본이 달린 산세비에리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