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계절이 바뀌고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주최국인 프랑스가 브라질을 꺾으며 첫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해 2천 명이 숨졌다.
국내에서는 굴지의 대기업, YS자동차가 전날까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노동자, 1,500여 명을 정리해고시켰다.
그리고 태선반도체에서 인수한 QL반도체가 드디어 초미세 회로 선폭 공정 기술을 이용한 주문형반도체를 개발해냈다.
언론사들은 세계 최초의 개발을 연일 보도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기술이었다.
기업가치 1,000억 원도 되지 않았던 중소기업 QL은 이제 반도체 시장에 없어선 안 될 핵심 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진태의 저택을 찾았다.
QL의 연일 고공행진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진태는 나를 차갑게 맞이했다.
“날씨가 춥네요. 할아버지.”
“네놈은 꼭 일이 있을 때만 오더구나.”
진태의 표정이 진지해서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하. 그래도 좋은 소식만 들고 오잖아요. QL이 이번에 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적으로 관심받고 있다는 거, 소식 들으셨지 않습니까.”
진태는 괜히 딴 곳을 바라보며 내 눈을 피했다.
“할아버지.”
“합병을 미룬 이유가 이거였구먼.”
아쉽다는 듯 말하는 진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봤자 손해 볼 생각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손자에게도 장사할 인물이면서, 연기만 자꾸 느는 것 같다.
“저도 남겨 먹는 건 있어야죠. 태선가에 아무것도 없는데. 제 몫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태선가에서 뭐라도 얻으러 왔다. 이 말이냐?”
“그런 셈입니다. 하하.”
나는 괜히 웃었다.
태선반도체가 QL을 인수할 때, 태선반도체는 오너의 보유주식 중 일부인 30퍼센트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보유하고 있던 지분이 41퍼센트인 나의 반대로, 합병은 지금껏 미뤄지고 있었다.
“자금에 허덕이는 기업이 성공발표를 미뤘을 리는 없고. 성공하자마자 쏘아붙인 모양이던데 네놈은 어떻게 확신한 거냐?”
“말했잖습니까. 감이라고.”
뭐라 덧붙일 말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진태는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나를 믿는다기에는 시선이 꺼림칙했고, 물어봤자 내가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QL과 태선반도체의 합병 관련해서입니다.”
“그래. 더 커지기 전에 진행해야지.”
“지금 당장은 반대합니다. 적어도 비율이 1대0.35가 되면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욕심 많은 놈을 봤나!”
나는 QL반도체가 가장 비쌀 때 합병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금이 아니었다.
“이제야 시가총액 이천억 원을 겨우 넘긴 기업이 감히 태선 반도체의 사 분의 일을 가져가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QL은 계속 성장세 이어 나갈 겁니다. 지금 말씀드린 비율까지 두 달이면 충분합니다.”
태선반도체와 QL반도체의 합병 비율이 1 대 0.35까지 가려면 시총이 적어도 삼천억 원은 넘겨야 한다.
전생에서 QL반도체는 신기술 개발에 성공한 이후 두 달도 되지 않아서 시총 삼천억 원이 뛰어넘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다.
물론 전생에서는 YS테크놀로지에 인수되었지만, 태선반도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YS테크놀로지보다 시총이 높은 굴지의 대기업이니까.
두 달 동안 QL반도체의 주가를 올릴 만큼 올리고 경영 능력 부족으로 한계에 다다를 때, 태선반도체에 넘기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네가 방금 두 달이면 충분하다고 했지. 두 달 뒤에 네가 말한 조건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제가 가진 QL에 대한 지분. 전부 할아버지께 넘길게요.”
“그만큼 자신이 있다, 이거지?”
진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습니다. 대신 제가 말씀드린 조건에 충족된다면, 합병한 태선반도체의 지분 5퍼센트를 저에게 주세요.”
“약속하마.”
얼핏 보면 나에게 손해인 조건 같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QL반도체의 지분 41퍼센트를 매수하는 데 쓴 돈은 오백억 원 남짓.
그러나 시총 1조 원이 넘어가는 태선반도체에 합병할 QL반도체의 시총까지 합친다면, 5퍼센트라 해도 천억 원 가까이 됐다.
게다가 나는 확신이 있으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매번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네놈은 말한 것은 꼭 지키니.”
“제가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너무 자만하진 말거라. 그러다 실수하니까.”
아무래도 내가 너무 확신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진태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조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 투자회사에서 보유한 종목만 해도 다 합치면 시가 20억 달러는 가뿐히 넘습니다.”
20억 달러면 현재 한화의 가치로 무려 2조 5천억 원이다.
아마존닷컴과 애플, 스타벅스가 합쳐서 10억 달러를 넘겼고, 틈틈이 매수했던 나머지가 약 10억 달러.
지금도 충분히 지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달 뒤에 내 자본금은 더 불어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진태라 할지라도 내가 이 정도 돈을 들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진태는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돈을 걱정하는 걸로 보이나?”
“그럼…?”
진태는 코웃음 치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지켜야 할 게다. 오늘은 물러가거라.”
“예. 할아버지. 건강 잘 챙기고 계세요.”
“오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내가 말한 비율대로 합병을 진행하게 된다면, 합병한 태선반도체에서 내가 보유한 주식은 약 11.5퍼센트다.
거기에 진태가 약속했던 지분까지 합친다면 태선그룹 주주로서의 시작으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
내가 사들인 주식들은 연일 상한가를 달리고 있었다.
전생에서 올랐다고 기억했던 주식들이 매일같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매수한 주식들은 반드시 올랐다.
옆에 있던 에릭이 내 투자표를 보더니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이게… 말이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 네 눈앞에 있는 서류가 그 증거인데.”
에릭은 눈앞에 놓인 매도확인서를 보면서도 믿기 힘들다는 듯 숫자 자리를 다시 세었다.
“1억으로 2억 원 만들기는 쉬워요. 그런데 이만한 금액을 투자하면서 이런 수익을 올리는 사람은 전 세계를 뒤져도 대표님밖에 없을걸요?”
“왜 없어. 너도 미국에서 수익 꽤 벌잖아.”
GB인베스트먼트에서는 내가 점지해준 정보를 토대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한화의 가치가 떨어질 걸 미리 알았기 때문에, 미국 시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 비해서 기억나는 종목이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한국만큼의 수익률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증권가에서 매일같이 찾아와요. 경제지 인터뷰 거절한 것만 해도… 어휴. 어떤 사람은 집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달려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맞히냐고, 종교가 뭔지 물어봤었다니까요? 그리고 그게 제 능력도 아니잖아요.”
“왜 네 능력이 아니야? 네가 없었다면 그 수익을 낼 수 있었을 것 같아? 매매 타이밍도 실력이야. 에릭.”
에릭이 멋쩍게 웃었다.
내 말이 과장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에릭이 투자하고 회수하는 타이밍은 이미 전성기의 에릭을 보듯 정교했다.
그리고 미국에 넣어놨던 세 개의 종목들은 계속해서 올라갈 것이고, 2000년대가 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수익을 안겨다 줄 것이다.
***
YS테크놀로지에서 활강기업을 인수하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백권용의 비자금 조성과 더불어 해외에 기술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연일 보도되었다.
와장창!
연수가 집어던진 리모컨에 텔레비전이 부서졌다.
백권용이 해외에 기술을 팔고 일정 기간 락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뒤늦게 알려진 것이 화근이었다.
활강기업은 연일 흑자를 갱신하고 있었고, 대량생산 설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덜었던 것도 한몫했다.
연수는 활강기업 인수 후에 백권용을 자르고 회사의 재무 재정을 한번 갈아엎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YS의 금융 계열사 쪽까지 손을 대며 인수했던 활강기업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니, YS그룹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외로 도피한 백권용을 잡기 위해 공항, 부두 쪽을 모조리 통제했으며, 거금을 들여 사람까지 썼건만, 터키 쪽으로 이미 튀었다는 정보만 받았을 뿐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터키에서부터 권용의 행적은 묘연했다.
“회장님…. 백권용의 비자금 조성과 활강기업을 인수한 타이밍이 맞물려 YS도 비자금 조성에 연관된 것이 아니냐는 추문이 일고 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돈 주고 산 활강에서 채권까지 내가 떠맡았다고 기사 내.”
“그렇게 기사를 낸다고 해도 현재 여론에서 그런 말을 받아줄까요…?”
“내라면 내! 이 상태로 두고 볼 거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활강기업의 채권단까지 YS의 문을 두드리니,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여론에 힘입어 그토록 막아왔던 압수수색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각 계열사 사장들 당장 호출하라고 하고 조금이라도 찔리는 거 있으면 바로 정리하라고 해.”
활강기업을 직접 인수한 YS테크놀로지의 주가는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반도체 하나 무너진다고 재계 2위 그룹인 YS가 무너질 일은 없겠지만, 이 정도의 타격은 향후 계획된 일들에 모조리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미 외환위기를 통해 쓸모없는 계열사들은 쳐 냈다.
오히려 파도가 한 번 휩쓴 시장에서 독식할 기회라고도 생각했었다.
게다가 반도체는 호황으로 기대가 큰 시장이었다.
권용의 비자금 횡령과 도주만 아니었다면, 활강은 자신이 인수한 8,600억 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도 바라볼 수 있던 것이다.
활강기업 인수는 분명 태선을 찍어누를 기회였을 텐데….
진태도 분명 활강은 인수하고 싶다고 했었다.
태선, 강빈과의 협상테이블을 가졌던 그 날이 자꾸만 기억이 났다.
“태선 쪽에서 인수한 QL반도체는 요즘 어때?”
정희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신기술 개발 이후 고공행진 중이라고 합니다.”
연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본래 활강기업의 인수에 실패한다면 차선책으로 보고 있던 기업이었다.
물론 그 상황이 온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를 강행했겠지만, 사실 QL반도체는 숨은 복덩이였다.
활강기업을 인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태선과 YS의 상황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권용은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고, 진태에게는 또 한 번 졌다는 모멸감이 느껴졌지만, 강빈은 도통 어떤 인물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사람이라도 붙일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YS그룹 전체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YS가 이대로 흔들리게 두어서는 안 돼. 일정 싹 다 비우고 임원들 소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