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강빈과 진태가 나가고 남은 회의실에 권용과 연수만이 남았다.
연수가 담배를 물었다.
“처음일세.”
“뭐가 말입니까?”
“내가 서진태 그 자식을 이긴 게 처음이라고. 예전엔 말이야. 다들 아무것도 없었어. 발로 직접 뛰고, 구르고 빌며 그렇게 사업을 키웠지. 잘 시간이 있나? 그 시간에 사업 하나라도 따려고 애를 썼단 말일세. 그런데 말이야. 서진태, 그 능글맞은 놈은 노력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원하는 건 다 얻어냈단 말이지. 나보다 늦게 시작했던 그놈이 나를 따라잡는 건 순식간이었고, 지금도 보게. 다들 태선, 태선, 태선! 자동차니, 전자니 죄다 태선이 1위란 말일세.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거야.”
연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권용 또한 원하는 것 이상으로 얻어냈기 때문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인수의향서에 날인까지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태가 놓고 간 종이들이 보였다.
“설마 서회장이 팔천오백억 원까지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일세. 활강이 어지간히도 탐났나 보지. 이제 반도체 시장은 내 손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회장님께서 어련히 활강을 잘 이끌어 주시겠죠. 그나저나 서회장. 어지간히도 화난 모양이던데요?”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은 처음 봤네. 천하의 서진태가… 흐흐”
거의 방을 뛰쳐나가듯이 나가던 진태의 뒷모습을 떠올리자, 자꾸만 웃음이 났다.
태선과 공유하던 활강의 기술과 설비들, 시장 안에서의 지분을 얻었으니 이제 독식하는 일만 남았다.
그때, 진태가 놓고 간 종이가 눈에 띄었다.
“저것 좀 가져와 보게.”
“네?”
“서진태가 두고 간 인수의향서. 기념으로 가져가야 하지 않겠나?”
“아, 네! 당연히 가져가셔야죠.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 아닙니까. 하하.”
권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집더니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나.”
연수의 말에도 권용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네.”
연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몸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권용이 눈치를 보자 연수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세 번까지 말해야겠는가!”
“저, 저기… 아무래도 보지 않으시는 게….”
연수는 담뱃불을 책상에 비벼 끄고 성큼성큼 다가가 권용에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았다.
인수의향서에 있는 금액란은 공란이었다.
애초에 금액을 적을 수 없도록 빨간색 두 줄이 금액란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서진태….”
그동안 진태에게 졌던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수의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늘 독하게 경쟁에서 이겨왔던 서진태가 오늘은 너무 쉽게 물러났다.
그런데도 진태가 왜 이번 인수를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용이 얼마를 해 먹었든 간에 활강이 가진 가치는 진짜였다.
연수는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
1998년 6월,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청 강연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국 대기업을 겨냥한 폭탄 발언을 하게 된다.
“청와대에서는 외환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정책으로 빅딜 정책을 수립하였고, 한국의 몇 대기업에 이를 제안하였으나, 이를 협상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대기업에서 강하게 반발을 해왔지만, 청와대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걸 넘어 더는 경제위기를 사전에 막고자 함이….”
대기업의 과잉 중복 투자가 외환위기의 원흉이었다는 뉘앙스와 협상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청와대의 저격에 한국 5대 대기업은 일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곧장 전혀 논의한 바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에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태선그룹은 빅딜을 통해서 태선 자동차와 삼륜 전자를 맞바꾼 전례가 있었기에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산업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이슈가 일파만파로 퍼지게 되면서 5대 재벌그룹도 이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한 만남이 성사된다.
태선그룹, YS그룹, 천일그룹을 포함해 진행된 5대 재벌그룹의 회의는 빅딜 정책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존망과 한국경제의 우려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회의에서의 주 내용은 각 그룹이 빅딜을 통해서, 상대의 어떤 금싸라기 기업을 가지고 올지, 어떤 고물 덩어리를 내다 팔지에 대한 머리싸움이 대부분이었다.
소득 없이 서로의 간만 보던 회의가 끝나고, 연수는 진태에게 다가왔다.
“서회장. 이번엔 내가 이겼네.”
“무엇을 말인가? 아, 설마 활강 말하는 거야?”
진태의 뻔뻔한 말을 듣는 순간, 연수는 짐작했던 것과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치심과 패배감을 동시에 느끼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빈 종이를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의도한 건가?”
“빈 종이? 내가 종이를 두고 갔어?”
질문으로 이루어진 진태의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장난치지 말게. 몇천억 원이 오고 간 협상테이블이었어.”
“내가 장난치는 것으로 보이나?”
장난스럽던 진태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 진지해졌다.
“그럼 왜 포기한 거야. 활강을 인수하게 되면서 이제 반도체는 내 세상이 될 텐데.”
“나도 활강을 인수하고 싶었다는 것만 알아두게. 더는 할 말 없네.”
그 말과 함께 진태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연수는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태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울렸다.
고집불통이던 서진태가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협상테이블에서 평소와 달랐던 것은 진태와 자신 사이에 인물이 한 명 낀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에릭인가 뭔가를 보내 활강을 인수하겠다고 선전포고했고, 동시에 저 자신은 진태를 만나러 갔던.
“서강빈이라고 했지. 설마 그 어린놈이…?”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고 믿으며.
***
채규는 YS그룹의 활강기업 인수 뉴스가 오보인 줄 알았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진태를 보좌하면서, 이런 결정은 처음이었다.
진태는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었다.
분명히 마지막 보고할 때까지에도 진태는 활강기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실력도 안 되는 게 이겨 먹으려 애쓴다며 무시하던 연수와의 인수 경쟁이었다.
티는 안 냈지만, 진태 역시 그동안 승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꽤 힘을 썼었다.
그랬기에 더욱이 이번 진태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네가 그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은 오랜만이군.”
진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장님. 원하시던 활강을 왜 포기하신 겁니까?”
“강빈이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거든.”
“그때도 지키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약속을 말하는 겁니까?”
“삼륜전자보다 큰 걸 가져다주겠다더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진태를 바라봤다.
태선전자와 삼륜전자의 인수 합병으로 시세차익만 2,000억 원, 잠재적 가치로 따지면 그 이득은 끝도 없이 높아졌다.
그런데 삼륜전자보다 큰 건이라니?
“그런 게 있습니까?”
“그놈 말로는 QL반도체가 그렇다더군.”
QL이라면 지난번 진태의 지시로 조사했던 기업이었다.
반도체 호황에도 불구하고 겨우 적자를 면하면서, 부도를 막기 위해 인수시장에 끌려 나온 기업.
태선의 입장에선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기업이었다.
조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QL반도체는 명백한 부실기업이었다.
QL에 비해 활강은 기업 건전성은 떨어져도 시장장악률이 높았기 때문에 기업가치가 괜찮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진태도, 강빈도 모를 리가 없다.
“무언가 있긴 있나 보군요.”
“그래. 강빈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지켜봐야 알겠지만 느낌이 좋아. 일단 순서는 밟아야 하겠지? 이사회 소집해.”
“세 시간 뒤로 잡겠습니다.”
채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나가자마자 곧바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사회 회의실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제 비서진은 임원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바쁠 것이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장들은 단숨에 전화를 받고 회의실로 달려올 것이고, 골프 치다가 놀던 놈들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똥줄이 탈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진태의 곁에서 일했지만, 진태의 이런 모습은 초반 이후에 오랜만이었다.
태선을 제일의 자리로 올린 건 다름없는 진태의 공격적인 경영방식이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그룹으로 만든 뒤, 자식들에게 주요 계열사 사장 자리를 주고 뒷선에 빠져 있었다.
그런 진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적이 있던가.
채규는 진태를 변화시킨 한 사람, 강빈을 떠올렸다.
이사회는 주요 계열사 사장, 부사장으로만 구성되어 진행되었다.
진태의 저택 안에 있는 회의실에는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왔는데도 빈자리가 많았다.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의 결정이 곧 회사방침인데요. 하하.”
마지막으로 들어온 동만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영사기에서 쏘아 올린 빛이 한쪽 벽에 그리는 글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QL반도체 인수’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맞는지 눈을 끔뻑였다.
“저, 회장님. 활강기업이 잘못 표시된 것 같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게 맞다.”
며칠 전 활강이 인수시장에 나오고, 태선에서 인수하리라는 것까지는 들었다.
그런데 QL이라니?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이 활강을 대신하고 있자, 동만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회장님. 반도체라면 활강기업 말고 인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런 명성도 없는 회사를 인수했다가 괜히 지분만 버리고 태선반도체 투자자들 난리가 날 겁니다.”
동만의 말에 앉아있던 임원 몇 명은 눈치를 봤고, 몇 명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태는 동만을 쏘아보았다.
“네놈은 내 결정보다 투자자들이 더 걱정되는 게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 흘렀다.
부사장들은 숨소리도 조심하게 내려 애썼고, 사장급 임원들은 진태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얼어있는데, 재만이 말을 꺼냈다.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습니다. 태선과 YS를 제외하면 반도체 사업의 대표격인 활강이 있는데, 활강을 포기하고 QL을 인수하는 것은 그저 대기업의 수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흐음….”
재만의 말에 진태는 생각에 잠겼다.
QL은 아직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선이 QL을 인수하게 된다면, 그저 YS에 밀리지 않기 위해 중소기업을 희생시켰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동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태선, YS의 2강 체제에서 힘의 균형을 깨고 1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활강이 필요합니다.”
“이런 멍청한 자식. 이미 YS가 협상테이블에서 활강을 가져간 것을 모르는 거냐?”
“YS가요…?”
동만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미 QL의 인수에 대해서 이사회를 열었다는 말은, 활강에 대한 인수를 포기했다는 말과 같았다.
동만은 고개를 숙였고, 진태는 그런 동만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태선반도체의 사장, 오치동이 이어서 말했다.
“QL의 메리트를 모르겠습니다. 어떤 정보라도 듣고 오신 겁니까?”
“그래. QL이 곧 신기술 개발 완성이 임박했다더구나.”
재만이 진태를 보는 눈빛이 좀 더 정교하게 바뀌었다.
“그럼 다들 불만은 없는 게야?”
진태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소집된 이사회였고, QL이라는 기업명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꽤 있었다.
이런 식의 이사회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고, 결과는 늘 같았다.
이미 결정은 되어있었다.
밑의 임원들은 그저 통보받을 뿐.
“그럼 조만간 인수 발표할 거니까 그렇게들 알게. 오사장. 자네는 좀 남고.”
태선반도체 사장만 남고 나머지 임원들은 곧장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괜히 진태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르기에, 다들 부리나케 움직였다.
중간중간 진태의 결정에 불신 어린 눈빛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완고한 진태를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가야 했다.
***
저택을 빠져나온 재만은 곧장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 진태는 장남인 자신에게 언질도 없이 인수를 결정했다.
멍청하게 앉아있던 다른 임원들과 자신을 똑같이 취급한 것이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
“예. 사장님. 지난 일주일간 회장님댁을 개인적으로 방문한 외부인은 서강빈 본부장님이 유일했습니다.”
재만은 비서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설마 강빈의 말을 듣고 활강을 포기하고 QL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건 비약이 너무 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는 하기로 했다.
“회장님댁 근처에 깔린 경호원만 몇 명인지 모르니까 계속 조심하라고 전하고. 강빈이한테도 감시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