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갔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되었다.
에릭은 휴게실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재계 서열 2위의 YS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수천억 원 규모의 자금을 움직이는 투자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을 하고 있어.’
물론 자금 대부분은 강빈의 것이었지만, 돈을 움직이고 있는 당사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에릭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쫄 필요 없어. 에릭 장. 제프를 상대했던 걸 생각하자.’
GB인베스트먼트에서 강빈과 함께 처음 상대했던 투자자가 바로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아마존닷컴의 CEO인 제프다.
그는 최근 음반 판매 서비스로 도서에 이어 아마존닷컴의 두 번째 카테고리를 확장했다.
약 13만 장의 음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아마존닷컴은 음반 유통 회사로도 자리를 공고히 했다.
4개월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음반 판매 규모가 벌써 1,400만 달러를 넘겼다.
그런 기업의 CEO인 제프도 평소에는 털털한 동네 형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상사인 강빈은 자산 규모가 조 단위로 넘어가는 대형 자산가가 아닌가.
합리화를 통해 에릭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에릭 씨. 따라오세요.”
생각에 잠긴 에릭을 깨운 것은 연수의 비서인 조정희였다.
후, 한숨을 내뱉은 에릭이 정희의 뒤를 쫓아갔다.
회장실 앞에 선 정희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GB 쪽에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YS의 회장실에 들어갔다.
연수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회장실 안은 꽤 넓었지만 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콜록콜록, 여기 환기 좀 시켜주세요.”
에릭의 말에 정희가 연수를 쳐다봤다.
연수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정희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열린 창문 사이로 냄새가 좀 사라지자 에릭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GB인베스트먼트의 총괄, 에릭 장입니다. 서강빈 대표님 대행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직접 오지 않고 건방지게….”
“네?”
냉소적인 연수의 말이 들려왔다.
“서강빈이… 그놈이 뭔데 직접 오지 않고 밑에 놈을 보내?”
“대표님은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
“바쁜 일? YS의 회장을 만나는 것보다 바쁜 일이 대체 뭔가. 청와대 사람이라도 만나나 보지?”
“태선그룹 서진태 회장님과의 일정이 잡혀있어요.”
“서진태….”
연수가 이를 갈았다.
일부러 자신을 열받게 하려면 던진 말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기연수 회장은 서진태 회장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에릭은 증권가에서 떠도는 찌라시가 사실임을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연수의 표정은 아마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에릭은 조금 더 그를 자극하기로 했다.
“제가 오늘 기연수 회장님을 찾아온 건, 저희 GB인베스트먼트에서 활강기업의 인수전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예요.”
연수가 조소했다.
“이미 알고 있네. 근데 나를 왜 찾았나? 할애비와 척지고 나니 내가 필요한 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대표님은 서회장님 댁으로 갔다고. 그리고 동시에 저는 이곳으로 왔어요. 이게 뜻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에릭은 협상에 들어가자 긴장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유가 대신했다.
그에 반해 연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에릭은 연수와 권용이 만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런 기색을 보인다는 것은 그 협상의 결과가 좋지 못했다는 것을 뜻했다.
“나오지 말라고 협박이라도 할 텐가? 감히?”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태선과 YS를 두고 저희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다만 저희의 활강기업 인수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려고요.”
“협상의 기본도 안 되어있군.”
연수는 단숨에, 에릭이 활강기업 인수금액을 제시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연수의 말대로 미리 협상 금액을 공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협상 금액을 미리 공개하게 된다면, 상대에게 생각하고 대비할 시간을 주는 걸 테고.
물론 그 금액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전제로 가능한 일이지만.
아마 연수는 갑자기 인수금액을 제시한다는 에릭의 말을 듣자마자 역시나 아직은 애송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몇 번 운 좋게 재벌가를 등에 업고 사업 성공해서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기고만장해진 철부지.
물론 에릭은 기회장이 그렇게 생각할 걸 눈치채고 더욱이 그의 생각을 그쪽으로 틀도록 만들었다.
“YS의 자본이 고작 생긴 지 3년도 되지 않은 신생 회사에 밀릴 것으로 생각하냐?”
“하하. 협상테이블까지 가면 괜한 욕심이 생길지도 모르죠. 무리하면 기회장님도 손해, 활강기업을 노리는 저희도 손해 아니겠어요?”
에릭은 이제 여유로운 미소마저 지을 수 있었다.
강빈에게 들은 대로 기회장은 성미가 급했고 자기가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했다.
에릭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래서 GB에서 내걸 투자금액은 얼마인가?”
“7,700억 원이에요.”
“…뭐… 뭐라고?”
연수는 자신이 놀랐다는 걸 절대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미에 잡힌 주름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3년도 안 된 회사가.
그것도 태선의 도움은 받지 않는다는 회사가 대한민국 대기업들의 인수전에 참여하는 것도 모자라 7,700억 원이라는 숫자를 부른다니.
하지만 에릭의 다음 말을 들은 연수는 표정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7,700억 원은 GB인베스트먼트의 돈이 아니에요. 대표님 개인재산이지. GB인베스트먼트의 자금까지 끌어다 쓰면…. YS그룹의 계열사 몇 개는 살 수 있을걸요?”
“허풍이 크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에릭은 담담하게 이어서 말했다.
“한국컴퓨터, 새인산업, 월드뱅크, 풀화증권. 이 네 기업을 아시나요?”
“풀화증권을 들어봤네. 1년도 안 돼서 주가가 폭등한 기업 아닌가.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이 네 기업의 최대 주주가 전부 저희 대표님이거든요.”
“뭐?”
연수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에릭의 말한 풀화증권은 몇백 원의 주가로 시작해 현재 만 원대로 올라온 기업.
그렇다는 건, 새인산업과 월드뱅크 역시 그만큼 큰 수익을 낸 기업이라는 것 같은데.
곧장 사람을 불러 조사하라 지시하면 10분 안에 나오는 정보인데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진짜라는 건 아실 거라 믿습니다.
최소 7,700억 원입니다. 그 이상도 생각하고요. 괜히 헛걸음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진짜 7,700억 원.
정말로 들고 온다는 건데, 문제는 연수가 생각하고 있는 금액을 훨씬 웃돈다는 것이다.
연수는 어지러움에 털썩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 나가 봐.”
에릭은 말없이 몇 초간 연수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나갔다.
***
에릭이 나가자 연수는 벌떡 일어나 제 성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정희는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뒤에 자리 잡고 있다가, 연수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냉수 한 컵을 연수에게 가져다주었다.
한국컴퓨터? 새인산업? 월드뱅크? 풀화증권?
연수 역시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자신과 같은 재계 그룹 총수가 IT이니 스타트업이니에 관심을 둘 일은 잘 없으니까.
그래도 풀화증권의 주가 상승은, 풀화그룹 회장을 만났을 때 들은 적 있었다.
대충 묶어 말하는 걸 보니 풀화증권만큼 나머지 기업들도 이익을 얻은 듯한데….
정말로 활강을 인수할 생각인가?
“조비서. 방금 에릭이라는 놈이 말했던 기업들 지금 최대 주주가 누구인지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정희가 몇 군데 전화를 돌리고 곧장 연수에게 말했다.
“저…. 한국컴퓨터, 새인산업, 월드뱅크, 풀화증권 모두 최대 주주는 서강빈 대표가 맞습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요. 일주일 전부터 서강빈 대표가 보유한 주식들의 매도를 시작했고 현재 예상되는 보유한 현금이 칠천억 원이 넘습니다.”
연수가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
에릭이라는 놈이 하는 말이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칠천억 원이라는 돈은 쉽게 모일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게다가 매도를 시작한 게 지난주부터라니….
한국컴퓨터를 비롯한 네 개 기업의 주가는 지금도 폭등하고 있는 주식들이었다.
활강기업을 인수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구태여 지금 팔아치울 이유는 없다.
“조비서. 전자랑 금융 쪽 계열사 연락 돌려서 이천억 추가로 뽑아오라고 전달해. 못하겠으면 때려치우라고 하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돈독이 단단히 오른 백권용은 어차피 자금조달 능력, 경영계획과 약속 이행성 등의 비가격 요소는 따지지 않는다.
권용이 원하는 인수 조건은 단 하나다.
오로지 비싼 금액에 활강기업을 넘기는 것.
“그리고 인수의향서 다시 가져와. 금액을 고쳐야겠어. 그거 지우고 7,900억, 아니 8,000억으로 적어 넣어.”
***
활강기업의 기업 인수를 두고 협상테이블이 열렸다.
참가한 사람은 나와 진태, 연수 그리고 권용이었다.
문 앞에는 각 회장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것이 바로 눈앞에 두 사람이었다.
“서회장. 이번에는 꽤 똥줄이 탔나 봐? 손자까지 대동한 걸 보면.”
“저놈도 적이야. 나를 도와줄 거면 돈을 보탰지, 이 자리까지 따라오겠나?”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연수는 농담이라는 듯 웃음을 머금고 얘기했지만, 진태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연수의 표정도 굳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녀석이 얼마를 쓸 줄도 알고 있겠네.”
“7,700억이라고.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연수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그만한 돈을 쓰기로 했다는 것을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현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 기업의 주식 들을 조금 이른 타이밍에 팔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금액에 거의 근접하게 도달했기 때문에 크게 영향은 없었다.
그리고 연수의 눈에 서린 독기를 보니 에릭이 잘 해낸 것 같았다.
“자 그럼, 활강기업 인수를 위한 담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연극 톤으로 말하는 권용을 보며 진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무슨 중고차 딜러처럼 보이는구먼.”
“회장님들의 비위만 맞출 수 있다면 뭐든 못 하겠습니까? 흐흐.”
권용은 검은 속내를 감추며, 인상 좋게 웃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회장님들에 전도유망하신 젊은 대표님이시니 긴말하지 않고 시작하겠습니다.”
권용은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했고 그 모습을 본 진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희 회사의 가치를 제일 높게 평가해주신 분에게 인수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회사의 가치는 오로지 인수의향서에 적힌 금액에 따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진태가 인수의향서를 내밀며 말했다.
“뭐, 대놓고 높게 부르는 사람에게 준다는데 질질 시간 끌 게 있겠나. 나는 팔천.”
진태의 금액을, 들은 연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속내를 감추는 것을 포기한 듯, 권용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활강의 지분 대부분이 권용이 들고 있었기 때문에 채권과 세금을 정리하고도 최소 수천억 원이 권용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팔천억 원이라면…. 저는 손 떼야겠군요. 제가 잘못 계산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반대로 연수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말 한마디에 몇백억 원이 왔다 갔다는 자리다.
그리고 나는 이미 진태에게 이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역할이 끝났다.
연수가 호기롭게 외쳤다.
“팔천이백억으로 가지.”
하지만 아직이다.
채규에게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연수는 YS금융으로부터 이천억 원 이상을 조달받았다.
“팔천삼백.”
연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진태를 노려보았다.
태연하게 말한 진태는 자신이 갖고 온 인수의향서들을 두드렸다.
아직도 몇 장이 남아있었다.
“나는 백억 단위로만 썼네. 이 종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는 놓지 않을 거야.”
“그 종이 몇 장인가?”
나는 팔천이백억 원을 맥시멈으로 잡고 진태에게 이야기했지만, 진태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태가 종이를 펼쳐 펄럭였다.
“세, 세 장이면….”
권용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종이를 바라봤다.
보이는 장수는 셋, 진태의 말에 따르면 팔천오백억 원까지 썼다는 말이었다.
연수가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팔천육백억.”
팔천육백억 원이 연수가 지급할 수 있는 최대인수금일 것이다.
나는 해냈다는 생각에 진태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진태는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연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오히려 이게 진태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팔천육백억! 기연수 회장님께서 저희 기업을 가장 높게 평가하시나 보군요.”
지출이 컸겠으나 진태를 이겼다고 생각하는지 연수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렀다.
물론 겉만 멀쩡하고 속은 썩어빠진 기업을 팔아넘긴 백권용의 얼굴은 더욱더 볼만했다.
진태의 과감함으로 YS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예상대로 되었다.
화가 난 듯 뒤를 돈 진태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