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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52화 (52/249)

#52화

“저보고 기연수 회장을 만나라고요?”

에릭은 긴장한 표정을 넘어 황당해 보였다.

“그래. 에릭 어쩔 수 없어. 나도 직접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원래 오늘은 연수와의 미팅이 잡힌 당일이었다.

그런데 진태가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나를 서재로 불렀다.

당연히 연수보다 진태와 독대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에릭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미국에서 더 큰 시장과 기업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 배포는 필요할 테니. 에릭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에릭에게 폭등할 기업들의 투자 정보를 넘긴 상태였다.

GB인베스트먼트가 있는 미국에서 투자를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IT버블은 이미 부풀기 시작했다.

끓기 전에 도달하기 직전의 물처럼 곧 부풀어 오를 기업들이 즐비하였다.

“기회장이 어디까지 배팅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해. 괜히 바람 넣다가 우리가 활강을 사게 되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으니까.”

“그거 되게 중요한 일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너한테 맡기지. 누구한테 맡기겠어?”

“YS의 기연수 회장이라니… 떨리는데요?”

“내가 지금 만나 뵐 분만 하겠냐?”

내 말에 에릭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YS그룹이 대단하긴 하지만 에릭 또한 몇천억 원 규모의 미국 시장을 움직이고 있었다.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한산한 시간에 와서 그런지 진태의 저택 마당에는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경호원들 몇 명이 인사하는 것을 받으며 서재로 들어갔다.

“회장님. 저 왔습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진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인사 한마디 없이, 진태는 본론부터 꺼냈다.

“네가 왜 활강을 사지 말라고 했는지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백권용이, 비자금 때문 아니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시점의 진태가 권용의 비자금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생에서 활강을 인수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당황한 것을 숨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나 본대,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떨어지는 부산물이 꽤 있는 법이다. 긁어 부스럼일 뿐이지 큰 결점은 못 돼.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잘못 생각한다라….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바뀌었을 리가 없지.

진태는 백권용이 이미 털어먹고 활강이 텅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회장님이 생각하는 규모가 아닐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것이냐. 네 말을 듣고 조사를 지시했고 태선에서 알아봤다.”

“제 감입니다.”

감.

그것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 감으로 진태에게 안겨준 게 있으니 믿기를 바랄 뿐이다.

내 말을 들은 진태의 표정은 좋지 않았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동안 할아버지께 보여드렸던 제 모습을 믿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국정원도 알아내지 못하는 걸 알아내는 게 태선이다. 네 감이 그것보다 뛰어나다는 게냐?”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완벽한 정보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나는 활강과 QL을 동시에 먹을 생각이었다.”

이런 욕심 많은 노친네!

그래, 눈앞에 선택지가 놓이면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모든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서진태라는 인간이었지.

그나저나 QL이라니?

진태는 QL을 인수했던 적이 없는데…. 설마.

“제 뒷조사하셨습니까.”

“그럼 모를 줄 알았더냐.”

입꼬리가 올라가는 진태를 보며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손자도 얄짤없이 계속 조사하는구나.

에릭이 조금이라도 늦게 움직였다면 내가 싼값에 갖고자 했던 QL의 지분을 진태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럼 설명이 쉽겠네요. 저는 QL이 신기술 개발에 성공하기만 하면 반도체 시장에서 급부상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번에도 감이냐?”

“이건 확신입니다. 신기술 개발에 올인하는 QL의 경영방식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이 쏟아붓고 있는 열정은 돈만 보고 장사하는 활강과 다릅니다.”

“부도 직전의 회사를 믿는 게냐?”

“네. 믿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인수해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크하하!”

진태가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QL을 내가 직접 인수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로 나는 반도체 회사를 경영할 지식도, 능력도 없다.

기존의 폐쇄적인 경영을 고집하던 오너도 믿을 수 없어서, 인수한다면 새로운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반도체 기업을 경영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기껏해야 개발해놓은 기술을 태선이나 YS에 팔아먹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태선반도체를 운영하는 사람은 바로 오치동 사장이다.

부실기업, 활강을 끌어안고도 태선반도체를 다시 정상화해서 태선전자에 넘긴 인물이다.

기술개발은 몰라도, 반도체 기업 경영만큼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태선그룹에 대한 지분.

태선반도체가 QL을 인수하게 된다면, 태선반도체가 가진 태선그룹에 대한 지분의 일부도 내 것이 된다.

진태는 웃음을 멎고 나를 바라봤다.

“QL을 나보고 인수하라는 뜻 아니냐.”

“저도 ‘서’씨를 물려받지 않았습니까.”

“태선에 발을 들이려는 모양이구나.”

진태를 설득하기 위해서 내 속내를 비쳐야 했다.

진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도전적이라며 마음에 들어 할지, 혹은 제집을 넘보는 도둑놈으로 볼지.

“그래. 활강은 인수하지 않으마.”

다행히 진태는 내가 꺼낸 패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협상테이블에는 나가야겠지?”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기회장이 좋아죽는 꼴을 보지 않겠습니까.”

진태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크흐흐. 그런 악취미도 있더냐?”

“그저 회장님의 취향을 아는 것이지요.”

활강은 어떤 기업보다도 빠르고,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

오직 나 혼자 알고 있는 미래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동안 회장님께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QL을 내가 먼저 꿀꺽 삼킬까 봐 아니더냐. 그래 놓고 네놈은 나보고 QL을 인수하라고 말하고 있고 말이야. 이런 약아빠진 녀석.”

말은 그렇게 해도 진태의 표정은 어느 때 보다 즐거워 보였다.

이젠 이런 진태의 공격적인 말은 호감 표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 이제 내가 왜 QL을 인수해야 하는지 설명해 보거라.”

이 양반이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진태가 활강 인수를 포기하는 게 당연히 QL 인수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설득하라니, 순간 당황했다.

곧장 당연한 거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태선의 QL 인수와 지분획득은 물거품이 된다.

일단 진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일단 활강이 망한다면 활강을 인수한 YS테크놀로지도 연쇄 타격을 입는다.

그럼 태선반도체는 알아서 반도체 시장의 주류가 될 거고.

그리고 QL반도체는 기술개발에 성공이야 하겠지만, 무능한 경영진과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기술만 사 오시겠다는 겁니까?”

“내용이 실하면 제품만 사 오면 되지 굳이 겉 포장지까지 뭐 하러 챙겨와?”

“그 포장지가 제품이 좋은 이유일 텐데도요?”

“좋은 포장지는 태선에도 쌔고 쌨어.”

“만약 YS도 QL이 좋은 포장지라는 걸 알게 되면 인수하려 들 겁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손잡고 바람 잡는 거 아니겠냐. 기연수는 내가 탐내는 거라면 안 사고 못 배겨. 쌈짓돈도 죄다 털어서 활강을 살 텐데 그럼 QL을 살 돈이 어딨어?”

진태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고 나면 QL 기술 사 올 기업은 대한민국에 이 태선밖에 없다, 이 말이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태선그룹이 이득을 챙긴다는 것은 좋지만, 나에게 떨어지는 이득이 없어서야 곤란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요. 회장님을 통하지 않더라도, 제 개인 자산만으로도 충분히 QL 인수하고도 남습니다.”

“네가 인수하면 뭐가 달라져? 반도체 시장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경영도 안 되는 놈이 쥐고 있어봤자 지금 QL 꼴밖에 더 되겠어?”

확실히 진태의 말처럼 내가 QL반도체를 인수한다 해도 그걸 이끌어나갈 경영인이 없었다.

지금 QL반도체의 경영진으로 투자처를 늘리고 발 빠르게 외국시장으로 나가기는 힘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패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회장 측에 제 사람을 보냈습니다.”

“기회장? 그놈한테 네 사람을 왜 보내?”

“두 가지입니다. 제가 활강을 인수할만한 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태선가의 일원인 제가,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활강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활강기업이 부실기업인 거야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뻔한 사실입니다. 회장님과 단둘이 협상테이블을 가지면 함정이라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떡밥은 뿌려야 기회장이 문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태의 심기를 거슬러 가면서까지 활강을 인수하려는 손자가 있다, 이것보다 좋은 떡밥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태선을 이겨보려고 벼르고 있는 인물이 기연수 회장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조건 따지지 않고 활강기업을 가지려 들겠지.

진태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네 말대로 한다면 기연수는 덥석 미끼를 물 게다. QL의 기술도 우리가 가져올 테고 말이야.”

“우리가 아니라 회장님이 드시는 것 아닙니까. 떡밥을 뿌린 건 저인데 월척은 왜 회장님이 가져갑니까? 그럴 바에 저는 여기서 손 떼겠습니다.”

“뭐?”

“어차피 제가 먹지도 못할 거,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제시간 써가며 기회장 흔듭니까? 그리고 저를 포함한 삼파전이 아니라 회장님과 기연수 회장의 이파전이 된다면 기회장도 의심할 겁니다. 활강을 인수하더라도 모든 돈을 다 털어서 사진 않겠죠. 그리고 만약 기회장이 QL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면, 그마저도 회장님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진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진태가 신기술을 사 가는 것으로도 QL의 기업가치는 오르고 내가 가진 41%의 지분은 몇 배로 뻥튀기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나면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너머에 있다.

“전에는 네가 태선가의 사람이라 하지 않았더냐?”

“저는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회장님은 활강기업을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쐐기를 박을 말이 있었다.

“무엇보다 저는 태선가에서 누구보다 큰 이득을 안겨드리겠다는 할아버지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은 꼭 지켜야겠습니다.”

“약속? 허허. 그래, 그게 있었구나.”

진태가 묘하게 웃다가 말했다.

“좋다. QL도 내가 인수하도록 하마.”

***

“어땠나.”

강빈이 나간 진태의 서재, 책장 깊숙한 곳에서 채규가 걸어 나왔다.

진태는 어느새 차갑게 식은 사업가의 얼굴로 바뀌어있었다.

“놀랐습니다.”

“그래. 도저히 20대라고는 볼 수 없는 배포야.”

“강빈 군에게도 놀랐지만, 회장님께도 놀랐습니다. 감이라니…. 정말 그런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채규가 진심으로 걱정돼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이라니, 누가 그런 이유로 납득한단 말인가.

그러나 진태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채규야.”

“예. 회장님.”

“무일푼으로 시작했던 내가 이곳까지 올라와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회장님의 천재적인 구상과 사업….”

진태는 손을 들어 뻔한 얘기를 막았다.

“내가 그런 것을 말하는 것 같아?”

“저는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허. 이 친구 보게. 내가 언제 운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던가?”

“제가 회장님을 보필한 게 벌써 30년째입니다. 회장님은 무슨 일을 하셨더라도 정상에 있었을 겁니다.”

“틀렸네. 나는 그림을 그렸으면 빌어먹고 살다 요절했을 거야. 틀림없어.”

채규는 진태의 그림을 본 적 있었다.

천재적인 화가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진태가 그림도 잘 그린다는 걸 채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은 말이야. 앞에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가 자꾸 나를 이끌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성공한 사업이 되어있네.”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그 사업을 하는 것 아닙니까?”

“틀렸네. 타고난 장사꾼에게는 결과가 원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결과를 따라가는 것이야.”

채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과가 원인보다 앞선다니.

진태 또한 강빈을 보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묵혀 두고 있었다.

“그놈이 어디서 멈출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내 감이 말하고 있네.”

막힘없이 거칠게 성공 가도를 달려온 지난날을 회상하듯, 진태는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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