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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51화 (51/249)

#51화

“조비서. 백권용이한테 전화 걸어.”

진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지만, 활강을 매수하면 게임은 끝난다.

YS그룹의 회장 연수는 의자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화가 연결되었다.

“백대표. 나 기연수요.”

“아이고, 기회장님께서 저한테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어쩐 일이긴, 백대표와 저의 인연이 고작 그 정도란 말이요? 허허.”

권용은 과거 활강의 기술 공유권을 연수가 아닌 진태에게 팔아넘겼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연수는 활강기업에 넣을 수 있는 압박이란 압박은 다 넣어댔다.

갑질이라면 갑질이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보 유출을 빌미로 압수수색까지 진행한 것이다.

결국 활강기업은 기술개발을 축소하면서까지 매출을 올리며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 임시방편이라도 쓰지 않았다면, 활강기업은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회장님! 지난 일을 끌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그때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이거는 비즈니스 아입니까. 비즈니스.”

“비즈니스라면 무엇이 이득일지는 알아야지. 백대표. 외환위기다, 구조조정이다. 말들이 많은데 더 버틸 수 있겠어요?”

“기댈 나무가 많으면 어디 기댈지는 제가 정해야지요.”

“태선이 물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쓰라고 했거늘…. 쯧.”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권용이 경합을 유도하려고 일부러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재계 서열 2위의 YS그룹이라지만 권용이 보안을 철저히 했다면 태선이 접선했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수는 조용히 담뱃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허허. 이 바닥에서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어요? 그것보다 어떻게, 결정은 하셨소?”

“흐흐. 결정은 무슨, 태선 측에서는 연락도 안 왔는데.”

“내가 백대표님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하, 천하의 기회장님이요? 그럼 제가 거절할 방법이나 있겠습니까? 찾으러 오시지요.”

찾아와라.

그 말을 듣고 연수의 손목 위로 힘줄이 튀어나왔다.

고작해야 장사치에 불과한 백권용이 감히 그런 말을…?

혼잣말을 뱉는 대신 애꿎은 담뱃불만 뱉어댔다.

앞에서는 빌빌대다가 자신을 물 먹였던 권용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것 자체가 연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태선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법.

연수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고 가래를 투, 뱉은 뒤 말했다.

“금요일 저녁. 어떻습니까?”

“저야. 부르시면 나가야죠. 대신… 장소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어차피 권용은 머리에 돈만 가득 찬 인물이었다.

투자조건을 높게 내걸고 뒷돈 좀 찔러주면 알아서 넘어올 것이다.

문제는 진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인데…. 쓰읍.

“일단 백권용이 만나서 도장 찍는 게 먼저야….”

연수는 혼잣말을 뇌까리고 반쯤 타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

“강빈이도 활강에 대해 뭔가 아는 모양이야.”

“강빈 군이요? 백권용 대표, 심증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규모도 크지는 않을 겁니다.”

“하… 그놈이 정보통 하나 없이 감으로만 콕콕 찌르는데, 그게 또 다 맞아 대는 게 문제 아니겠냐.”

진태는 권용이 활강에서 비자금을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기업에서 돈독 오른 오너가 몇 푼 챙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가.

“백권용 대표가 아무리 욕심 많다지만 정도는 아는 인물입니다. 어차피 인수하고 덮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도 별반 다를 거 없어. 한데 강빈이가 활강 인수전에 참전할 거라더군.”

“예? 회장님이 참여한다는 걸 몰랐답니까?”

진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왜 참여한답니까? 설마하니 회장님과 경쟁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걸 말을 안 해.”

의아한지 채규가 곧장 되물었다.

“그럼 강빈 군이 뭘 하려는 건지 회장님도 모르신다는 겁니까?”

“인수전에는 참여하지만 이길 생각은 없다고 하더라. 그게 뭘 뜻하는지는 자네도 알 걸세.”

바람잡이.

강빈은 이번 인수전에서 대놓고 인수가를 높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뻔했다.

“내가 궁금한 건 YS의 현금을 털어서 강빈이가 얻을 이득이 도대체 뭐란 말이야.”

“태선의 경쟁사인 YS를 견제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아니지. 강빈이, 그놈은 태선에 충성하지 않아. 생각을 좀 해보게.”

채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강빈 군은 지금 다른 곳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이 반도체 시장을 노리고 있는 YS를 견제했으니, 강빈 군이 노리는 곳은 반도체 시장 안에서 이번에 같이 인수시장에 나온 QL일 겁니다.”

“큐엘?”

“전에 인수시장에 나온 곳 중 언급해 드렸던 곳 있지 않습니까.”

활강이 가장 크다고 하니 큐엘인지, 큐알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강빈이가 노린다고….

“뭐가 특별한 거라도 있는 게야?”

“QL 반도체는 경영방식 때문에 현재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언제 개발이 끝날지 기약이 없는 상태고요.”

“흠… 아무튼 그놈이 투자 쪽으로는 도가 텄으니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일단 큐엘 쪽 좀 더 알아봐. 괜찮다 싶으면 주식 쓸어 오고.”

“알겠습니다.”

QL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지만, 강빈이가 관심을 두고 있다면 말이 다르다.

그리고 짊어질 리스크도 활강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그리고 활강기업 지분소유자들도 만나보게.”

“활강기업도요? 그럼 회장님께서는 역시….”

진태가 씨익 웃었다.

“둘 중 고민할 필요가 있나? 둘 다 먹어야지.”

채규는 다시 한번 진태의 사업방식에 대해 깨닫게 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빈이 놈 재산 알아본 건 어떻게 됐나?”

“그게…. 사업이 미국 쪽과 관련된 게 많아서 한국에서 조사한 것은 믿을 만한 게 못 됩니다. 미국 쪽에 있는 주식도 꽤 되는 것 같은데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허… 자네가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나? 돈 좀 부어도 되니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더 알아봐. 그 녀석 최소 육천억이 필요한 경매에 자신 있게 들어왔어. 그놈 손에 얼마가 쥐어져 있는지는 알아야지.”

***

연수가 권용을 만나기로 한 곳은 강남의 한 선술집이었다.

권용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기회장님은 나이를 드실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어쩌자고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보자고 한 거요?”

연수는 은밀히 권용을 보길 원했지만, 권용은 오히려 이 만남을 알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작은 창문 사이로 남정네 둘이 아가씨 한 명을 끼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둘이 보는 것이 중요하지. 여기 주문받게!”

자기 말을 무시하는 것 같아 서서히 열받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인수전의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태선이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권용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턱시도를 입은 종업원이 달려왔다.

“보르도 2병 갖다주게.”

“몇 년 산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뭐야, 자네 온 지 얼마 안 됐어? 30년으로 갖고 와.”

“3, 30년이요…? 아, 죄송합니다!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종업원이 서둘러나갔다.

보르도 30년의 가격은 면세한다 쳐도 30만 원이 넘었고, 백화점에서는 100만 원을 가뿐하게 넘는다.

하물며 이런 선술집에서는 300만 원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연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시 부르게.”

“네?”

“종업원 다시 부르라고 말했네.”

“아, 네. 알겠습니다.”

하대하는 듯한 연수의 말투에 권용이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종업원을 불렀다.

그 사이에 술을 갖고 왔는지 종업원의 양손에는 보르도 30년산 두 병이 들려 있었다.

“네! 보르도 30년산 두 병 가지고 왔습니다!”

“한 병 두고 40년산으로 한 병 더 갖고 와.”

“4, 40년이요? 우선 재고부터….”

“없으면 구해 와. 그 정도도 안 되는 술집이 강남 한복판에서 개업을 한 건가?”

“아닙니다. 반드시! 반드시 구해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종업원이 나가자 권용이 술병을 따며 말했다.

“이야. 기회장님. 돈 많은 줄은 알았지만, 시중가로 800만 원이 넘는 술을 그냥 사시다니…. 역시 저는 돈 많은 사람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

연수는 권용이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말했다.

“백대표. 고작 이런 걸로 유난 떨 정도였어? 우리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인수가 올린다고 백대표 입에 다 들어가는 거 아니잖아.”

“채권이 꽤 되기는 하지만… 꽤 들어옵니다. 허허.”

그때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중년의 남자가 헉헉거리며 보르도 40년산을 들고 왔다.

“죄송합니다! 직원들은 모르는 곳에 있어서…. 저는 이곳의 사장인….”

“됐네. 이 사람아. 내가 술집 사장 이름까지 알아야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냥 두고 조용히 나가시게.”

“아… 넵! 그럼 아가씨라도…?”

“어허!”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남자는 공손하게 술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문밖에는 처음 온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 사람 많은 술집을 안 가는 겁니다. 맛 떨어지게.”

“이런 게 다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하하.”

연수가 보르도 40년산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백대표님. 보르도 30년과 40년 가격이 왜 10배 넘게 차이 나는지 알겠어요?”

“그거야…. 맛의 차이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허허. 꿀이라도 탔나 보죠.”

연수가 대놓고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하하. 맛? 자네 눈 감기고 맛 비교하라고 하면 어떤 게 30년이고, 40년인지 구분하겠어?”

권용은 기분이 상했는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

“그럼 왜 비싼 겁니까?”

“귀하니까 비싼걸세.”

어느새 연수의 말은 반말로 바뀌어있었다.

권용의 얼굴이 굳었다.

“예?”

“금을 처바른 것도 아닌 40년산이 비싼 이유는 그저 귀하기 때문일세. 매년 100병만 생산하는 거니까. 그 뒤로 40년이 흐른 뒤에 파는 건데, 그땐 100병도 채 남지 않을 테고. 이해하겠나? 그럼 활강은 어떤가. 육천억? 자네가 생각할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가격을 부른 거 아니겠습니까. 태선에서도 연락이 왔잖아요.”

“하하. 이 친구야. 우리 솔직해져 보자고. 활강이 비싼 이유는 현재 시장에서 먹고 있는 비율 때문이지 않나. 나도, 서진태, 그 늙은 뱀 새끼도 그 비율 먹고 반도체 차지하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겠나.”

권용이 발끈하며 말했다.

“어쨌든 그 비율이 가치에 포함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것도 포함되는 건가? 자네가 해 먹은 거?”

권용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권용이 활강의 돈을 고스란히 자신의 비자금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

연수그룹의 정보력으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연수는 그런 권용에게 일부러 이에 대해 반협박하면서 자연스레 투자를 확정 지으려는 목적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

말없이 앉아있던 권용이 벌떡 일어났다.

“협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이미 전에 한 번 터졌던 마당에, 더 나올 것도 없습니다.”

권용이 꽤 당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전에 한번 권용의 비리가 터졌던 적이 있었다.

어찌나 꼭꼭 숨겨놨던지, 검찰이 압수수색에 따로 사람까지 몰래 붙여놨었지만, 비자금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의 협박 역시 권용에게 먹히지 않는 듯 보였는데,

연수는 불쾌함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권용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말을 던졌다.

“200억. 아무 조건 없이 차명으로 된 200억을 백대표한테 주겠네.”

자신이 오너인 회사에서 비자금을 빼돌리려 했던 비열한 인물 권용.

돈독이 오른 놈에게 연수의 제안은 꽤 달콤했다.

권용이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연수는 그러한 권용의 모습을 보며

역시 제까짓 게라는 생각이 드는데….

권용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온다.

“그 사실… GB택배의 서강빈 대표한테도 연락이 왔습니다.”

“서강빈? 서진태의 손자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권용의 말에 연수가 의아함을 내비쳤다.

갑자기 서진태도 아닌 그 손자라니.

“그자는 왜 갑자기 연락한 거야? 할애비 일을 대신하겠다고?”

“아뇨.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이 왔습니다. 서회장님과 별개로 인수 의향이 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권용이 말하려는 것은 결국 손자가 할아버지를 먹겠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뭐 걸릴 게 있겠습니까? 주식투자랑 사업으로 번 돈이 천문학적이라고 하는데…. 서회장님한테 상속받은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겠습니까?”

연수는 기가 찼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의 등장이다.

심지어 제 할아버지, 천하의 서진태와 경쟁을 하겠다니.

그러면서도 서강빈이 태선이 아닌 독자적으로 인수에 참여한다는 건 떼돈을 벌었다는 건데.

돈이 얼마나 있는 건지?

앞에서 주름을 잡아대는 권용의 모습을 보니 꽤 많은 금액을 권용에게 제시한 것 같은데…

“나머지 얘기는 서강빈 대표와 만나고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권용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텅 빈 앞자리를 바라본 연수는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남은 보르도 40년 산을 병째로 들이켰다.

때아닌 삼파전에 두통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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