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전화가 오면 진동이 울린다니까요?”
태선전자에서 자사 최초의 디지털 휴대전화인 ‘SCH-100’을 시장에 선보였다.
전 모델에 비해 뚜껑이 생겨서 잘못 눌리는 버튼을 방지할 수 있었고, 진동 기능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들어간 제품이었다.
과거로 온 뒤에 휴대전화가 없어서 불편했던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 모델까지 출시했다.
내 휴대폰을 새로 사는 김에 에릭 것까지 샀는데 마음에 들어 하니 잘 됐다.
평소에 잘 챙겨주지를 못하니 이렇게 기회가 될 때 챙겨줘야 한다.
“QL은? 전에 시장에서 지분 28프로까지는 매수했다면서.”
“추가 매입한 게 3.1프로예요.”
“응. 추가로 매수할 수 있으면 금액 상관없이 다 긁어모아.”
“매수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예요. 이 이상 매수하면 QL측에서도 조치를 취할 거구요.”
에릭의 말대로 이 정도의 지분이면 오너를 제외하고 내가 이미 최대주주일 것이다.
오너경영이라고 해도 QL의 자사주 지분은 40프로가 넘지 않았다.
“개인 투자자들한테도 찾아가 봐. 어차피 채권단이 인수를 결정했어. 더 가진다고 문제가 되진 않아.”
“네. 저도 추가정보 있으면 문자로 남길게요.”
아직 에릭에게도 내 계획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바꿀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QL과 활강의 인수전은 패배하는 그룹이 결국 승자가 되는 전쟁이었다.
활강을 인수한 태선반도체가 주가 하락과 경영 위기로 태선전자에 흡수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게다가 진태가 QL을 인수하게 된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주식으로 태선반도체의 지분을 벌 수 있다.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진태의 저택에 도착했다.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내었다.
진태는 신문의 경제면을 읽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무탈하셨습니까?”
“쓸데없는 인사말은 여전하구나. 소파로 가자.”
내 말에 진태는 피식 웃고는 곧장 신문을 접고 소파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진태가 불러서 오긴 했지만 아직 무슨 일로 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큰아버지가 삼륜전자를 인수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재만이에게 직접 하거라.”
진태는 말을 뱉고는 내 반응을 지켜봤다.
내게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걸까.
재만에게는 꼬리를 마는 것? 아니면 내 욕심을 내비치는 것?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태선자동차와 5000억 원.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회장님께서 주신 것 아닙니까. 회장님의 공이니 회장님께서 축하받으셔야죠.”
“아니. 모든 구상과 제안은 재만이가 했으니 재만이가 축하받을 일이다.”
“....”
진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진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빈아. 이번에는 네가 졌다.”
그런 것이었나.
새해 조찬에서 진태는 분명 모두에게 인수전을 대비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조찬이 시작되기 전, 나는 진태의 서재를 찾았었다.
그때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 진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진태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니요. 저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너는 그날 분명 다가올 빅딜과 인수전에서 누구보다 큰 성과를 내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삼륜전자보다 큰 게 있다는 말이냐?”
“있습니다.”
나는 그날 QL을 떠올리면서 진태에게 누구보다 큰 성과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진태가 굳이 조찬 마지막에 빅딜과 인수전을 언급한 것도 나와 서재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재만이 빅딜을 통해서 삼륜전자를 흡수하게 될 것도 이미 기억하고 있던 정보였다.
“태선자동차의 시가총액이 1조1천억 원에 그룹의 자본 5000억 원. 총 1조5000억 원에 해당하는 자본으로 1조8천억 원에 해당하는 삼륜전자를 먹었습니다. 단순수치로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시세차익은 2000억 원입니다.”
“네 말대로 단순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 2000억 원으로 하자. 너는 그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이냐?”
“적어도 회장님께서 제 승리라고 납득할 만한 겁니다.”
태선반도체가 QL을 인수하게 된다면 반도체 시장을 독과점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깟 2000억 원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활강기업 인수하실 겁니까?”
“그래.”
“기연수 회장이 이번에는 이를 간 것 같습니다. 이기든 지든 애초에 승리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진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 연수에게 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활강을 먹는 기업이 반도체 시장을 먹는다. 반드시 이겨야 돼.”
진태는 결정을 번복할 생각 없다는 듯 확고해 보였다.
‘그 활강이 지금은 껍데기밖에 남아있지 않고, 대표는 인수 비용을 챙기고 해외로 도주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이 망할 노인네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강현재’로 살았을 때의 기억이다.
지금 진태에게 말을 한다고 해서 이유를 납득시킬 수단이 생각나지 않았다.
방법을 바꿔야 한다.
“저도 이 인수전에 참여할 겁니다.”
“뭐? 이런….”
진태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네놈이 활강을 차지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이냐? 반도체 시장은 네 생각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사업 몇 번 성공했다고 오만함이 끝이 없구나.”
진태가 쏘아대는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내가 이제 할 말이 변명처럼 들리면 안 된다.
“방금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재고하고 다시 찾아오너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결정은 회장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진태를 납득시킬 만한 말이 생각났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태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면 내 패를 여기서 까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말을 하려는데 진태가 입을 뗐다.
처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냐.”
“네. 할아버지. 삼륜전자 인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이득을 안겨드리겠습니다.”
진태가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으마. 대신 태선을 물 먹일 생각은 하지 마라. 괜한 욕심 부리지 말라는 소리야.”
“저도 이길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길 생각이 없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 게냐.”
“이유를 지금 설명한들, 이해하실 수 없을 겁니다. 확실한 것은 저는 인수전에 참여할 것이고, 태선에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진태의 표정에 여러 생각이 담겨 보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고 싶었던 거겠지.
“태선에 해가 되지 않는다라…. 네놈이 한 말을 어길 놈은 아니니 일단 알았다. 원하는 대로 해보든가.”
내가 미쳤다고 부실기업을 거금 들여가며 인수하겠는가.
그나저나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았는데도 진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내가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물러가거라. 내 적이 될지도 모르는 놈과 함께 있으려니 뒷골이 쑤시는구나.”
그 서진태의 적이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황급히 무릎을 꿇을만한 말이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데 웃음이 나와?”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니, 제가 꽤 성장한 것 같아서요.”
피식, 웃는 진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서재를 나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혈육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진태다.
‘적’이라는 말이 정말 적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 이번 사업에 총력을 다해야 될 것이다.
“그럼 곧 찾아뵙겠습니다.”
***
“개인투자자들 접촉해서 10프로 더 추가 매수했어요. 현재 대표님의 지분이 41.1프로예요.”
QL은 내일 부도가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투자자가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몇 년째 신기술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는 QL에 투자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QL의 주식을 들고 있던 개인 투자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주식들을 팔아넘겼다고 한다.
“그게 최대지?”
“여기서 더 바라면 욕심이죠. 개인투자자가 41.1프로라구요.”
고개를 끄덕였다.
QL의 가치를 떠오르면 내가 쓴 약 500억 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활강기업 인수전에 뛰어들 거야.”
에릭이 당황한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QL을 모조리 매수해놓고 활강기업을 인수한다뇨. 잠시만요.”
에릭은 컴퓨터 앞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최소 인수금액이 5000억 원이었으니까…. 풀화증권이 지금 이 정도에, 한국컴퓨터가…. 2000억 원, 그리고 새인산업이랑 월드뱅크까지 하면…. 얼추 맞출 수는 있겠네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에릭을 보고 있었다.
에릭은 내 말 한마디에 비현실적인 일을 현실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잘못 알아들은 거지만.
“인수전에 뛰어들겠다고 했지, 인수할 생각이 있다고는 한 적 없어. 그리고 그 주식들을 지금 왜 팔아? 한창 오르고 있는데.”
“... 그럼 인수전에 참여하는 이유가 뭐예요?”
“서회장이 활강 못 먹게 막으려고.”
“네? 그게 대표님이 인수전에 참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활강은 무조건 망해. 그리고 활강을 인수한 태선반도체도 동시에 망하고 서재만 사장의 입속으로 들어가. 내가 인수전에 참여해서 깽판 칠 거야.”
“무조건 망한다니…. 무슨 근거로요?”
에릭을 똑바로 쳐다봤다.
진태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
내가 활강이 망하고 QL이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를 말해도 될지.
“활강기업 백권용 대표, 그 사람 비리 경영자야. 이미 모아놓은 비자금도 꽤 되고, 이번에 받게 될 인수 비용 들고 해외로 뜰 거야. 그리고 QL은 지금 개발하고 있는 초미세공정기술이 완성되고 새로운 반도체 시장을 열 거야.”
“그,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아세요?”
“꿈을 꿨어.”
서강빈으로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긴 꿈을 꿨었다.
태어나서 지옥 같은 유년 시절을 보내고, 누구보다 노력해서 정상에 도달했다고 착각한 순간, 죽임을 당하는 악몽.
그런 꿈을 꿨다고 이야기하면 에릭이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한 말을, 그리고 앞으로 할 말을 에릭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에릭은 내 사람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에릭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구태여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서 꾸며낼 필요는 없겠지.
그런 것 없이도 에릭은 나를 믿을 테니까.
에릭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지금까지 모든 투자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꿈 때문이라는 거죠?”
진지해진 에릭의 얼굴을 보자 내가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해시키려고 하다니.
에릭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걸 믿어? 순진하기는.”
“아, 진짜. 또 장난친 거예요? 아무튼 대표님은 서회장님이 활강 기업을 놓치게 하려고 인수전 참여한다는 거죠?”
“맞아. 거기에 더해서 서회장이 QL을 인수하게 만들 거야. 물론 QL의 신기술개발에 성공할 때에 맞춰서 비싸게 넘겨야지.”
에릭의 표정이 그제서야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