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제 곧 활강기업을 두고 태선그룹과 YS그룹의 인수전이 펼쳐질 것이다.
전생에서 YS와 태선은 활강을 차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한 소모전을 했었다.
그에 반해 QL은 두 그룹의 관심 밖이었다.
“에릭, 네 생각은 어때? 너라면 어디 기업을 인수하겠어?”
“저라면….”
에릭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서 수백억 규모의 투자금을 움직이고 있지만 이번 인수전은 스케일이 다르다.
이 정도 금액을 움직이는 것은 에릭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나는 에릭이 생각을 끝낼 때까지 눈앞에 서류를 읽었다.
활강의 성공은 의심할 건덕지가 없었다.
2년 전 활강은 PC전자, 화상회의, 팩스 등 모든 멀티미디어 기능을 합친 차세대 반도체칩을 세계 처음으로 개발해냈다.
태선반도체와 기술공유를 하는 조건으로 진태는 막대한 대가를 활강에 지급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인수전에서 진태는 활강을 인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활강은 멀티미디어 반도체칩을 개발해낸 이후 별다른 성과 없이 기존 기술을 조금씩만 변형해서 매출을 올린, 전형적인 재무적 기업이었다.
그에 반해 QL은 이번 인수전 이후 0.35미크론, 즉 1천분의 0.35mm의 초미세회로 선폭 공정기술을 이용한 주문형반도체를 개발해낸다.
활강 인수전에서 태선에게 패배한 YS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QL은 그야말로 금싸라기였다.
신기술 개발에 힘입어 QL의 독주가 시작되고, 활강을 인수했던 태선반도체는 그대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활강을 선택했던 것은 완벽했던 진태의 사업선정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태선반도체는 태선전자에 흡수되며 재만의 배만 불려주었다.
현재 삼륜전자를 흡수하며 태선전자의 힘이 막강해진 상태, 태선반도체마저 태선전자에 완전히 흡수된다면 재만의 입지는 누구도 넘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도 이번 인수전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에릭이 생각을 끝내고 말을 이었다.
“저라면 QL을 인수할 것 같아요.”
에릭이 QL을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태선과 YS, 질높은 기업분석팀을 갖춘 두 거대기업이 QL이 아닌 활강을 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QL의 초미세반도체는 아직 현실성도 없을 뿐더러, 현재 반도체시장에서 활강이 가진 입지는 태선반도체와 YS테크놀로지에 뒤지지 않았다.
진태와 YS는 활강을 갖는 그룹이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 QL이지?”
“한국에서 반도체는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는 산업이에요. 태선이나 YS 둘다 어떻게든 활강을 먹으려고 하겠죠. 그런데 활강이 그 손해를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개발 부서를 축소하고 마케팅 관련 분야를 늘리고 있는 기업을 굳이 인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개발이 아닌 판매에 중점을 둘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수익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야.”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의견에 동의해요. 하지만 그 수익성이 단발성이라는 게 문제죠. 개발을 하지 않는 기업에 어떻게 미래가 있겠어요? 그에 반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QL은 경영 방식에 문제가 있지만 제대로 된 투자와 경영자를 영입하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마케팅은 전문가를 쓰면 되지만 기술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네 말이 맞아. QL의 지분을 최대한 매수해.”
“이번엔 제가 맞았나요?”
해맑게 웃는 에릭을 보며 나도 웃어주었다.
에릭은 이미 내가 QL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선과 YS 모두 이번 인수전에서 활강을 노릴 거야. 막대한 소모전이 펼쳐지겠지.”
“대표님은 누가 인수할 것 같으세요?”
“당연히…. 우리 서회장님이 이기지.”
에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에릭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YS는 아주 이를 갈고 활강을 인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YS가 아니라요? 태선은 이번 삼륜전자 합병에 이미 거금을 들였어요. 삼륜전자는 YS도 노리던 기업이기도 하고요. 기연수 회장이 이번 반도체까지 포기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래도 우리 서회장님이 누구냐. 원하는 걸 놓친 적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전생에서 이 인수전의 승자는 진태였다.
아무리 봐도 YS에 유리해 보이는 조건인데 어떻게 진태가 YS를 꺾고 활강을 차지했던 것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잘못된 선택이었으나, 기울어져 가는 태세를 순식간에 바꿔 인수한 진태의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알수록 대단한 노인네라니까….’
***
진태는 눈앞에 놓인 태선전자와 삼륜전자의 합병 건에 대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방금 전 서재를 왔다 간 재만이 두고 간 서류였다.
“이제 전자 쪽은 문제없겠어.”
“그동안 일 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채규가 진태의 옆에 서서 차를 따랐다.
“뭐,간만에 장남다운 일을 했어. 삼륜전자를 물어오다니. 가져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협상 조건도 잘 처리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는 그만한 전리품을 쥐여줘야지.”
“그 말은 삼륜전자 쪽 지분을 주겠다는 말입니까?”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나는 대가가 확실한 게 좋아. 일을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의욕이 나겠나? 확실하게 해야 또 성과를 내오겠지.”
“하지만 합병할 때 교환비가 8대 2이었습니다. 서재만 사장에게 그 지분을 다 넘기면, 회장님이 아직 건재하신데도 후계구도가 눈에 띌 것 같습니다. 다른 자제분들의 반발도 있을 것 같고요. 또 정계나 경제계의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빨리 노출되는 게 오히려 약점으로 잡힐 수도 있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재만이한테 줄 지분은 절반이야. 누가 그놈이 후계자래? 그리고 내가 내 것을 준다는데 누가 반발을 해. 감히 건방지게.”
채규가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네가 걱정할 게 뭐 있나?”
“제 세월을 회장님께 바쳤습니다. 회장님이 물러나신다면 제가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자네도 많이 변했군. 혓바닥이 길어.”
“하하.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제 위치를 걱정하고.”
채규는 진태 앞에서 속을 감추지 않는다.
오랜 세월 진태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보다 괜찮은 기업들이 나왔다며?”
“네. 태선과 YS가 양분한 반도체 시장에서 변수로 작용할 활강기업입니다. 활강은 아시다시피 멀티태스킹 반도체칩을 개발한 뒤로 매월 흑자를 갱신하여 위치를 공고히 한 곳입니다. 현재 기술 개발보다 매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큽니다. 활강이 가장 크고 다른 곳은….”
“됐어. 제일 큰 것만 먹으면 아랫것들은 전리품으로 얻게 돼 있어.”
그게 진태가 사업을 키웠던 방식이었다.
기업을 키우기 위한 방식은 결국 돈으로 다른 기업을 사들이는 것이 제일 편하다.
그렇게 덩치를 부풀리고 결국 경쟁 기업마저 다 발밑에 둬, 독과점기업으로, 대체할 기업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 반도체 시장은 크게 보면 태선반도체와 YS테크놀로지가 양분하고 있었으나, 활강이 차지하고 있는 지분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술도 활강 측에 거금을 쥐여주면서까지 얻어온 기술이니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회장님. 기업분석 측에 따르면 QL은 경영구조가 문제지 설비나 기술 개발은 활강에 뒤처지지 않습니다.”
“이 사람아. 지금 그게 중요한가? 태선이 어떻게 컸는지 잊었어?”
진태가 볼 때 이번 사업도 그의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사업들과 다를 바 없었다.
진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채규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활강을 노리고 있는 곳들은 어디야? YS는 당연히 따라올 거고… 자본은?’
“YS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곳들입니다. 저희 자본을 따라갈 만한 기업은 없습니다. 활강 측에서 내건 최소금액이 5000억 원. YS는 그 이상도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태선전자가 삼륜전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들인 5000억 원은 태선그룹의 자본금이었다.
YS가 5000억 원 이상을 바라본다면 진태 또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투자에 임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돈으로 안 된다면… 힘으로 찍어눌러야지.”
***
큼지막하게 YS의 로고가 벽에 붙어 있는 세련된 회장실에서 YS그룹의 회장, 기연수는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공손하게 다가간 비서 조정희는 차분히 보고를 시작했다.
“저번에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인수시장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태선그룹의 오랜 숙적인 YS그룹.
자본총액 기준 재계 서열 2위의 재벌그룹이었지만 연수는 만족하지 않았다.
“브리핑 시작해.”
“인수시장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 만한 곳은 우주항공으로 유명한 항우산업, 명실철도공사, 그리고 반도체산업으로는 활강기업과 QL반도체가 있습니다. 현시점 가장 영업이익이 가장 큰 곳은 활강기업으로 반도체 경기가 호황인 지금, 연일 흑자를 갱신하고 있습니다.”
활강기업이라면 연수도 잊을 수 없는 기업이었다.
활강기업이 멀티미디어반도체칩을 개발해낸 뒤 기술공유제안서를 곧바로 보냈지만, 활강기업은 태선반도체와 독점계약을 했다.
YS테크놀로지가 살아남으려면 외국시장에서 기술을 빌려오는 수밖에 없었고, 외국자본을 국내시장에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활강이면 그럴 만하지. 기획 쪽에서는 뭐래?”
“기획팀에서는 항우산업이 가장 전망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총 대비 인수가격도 합리적입니다.”
“영업이익이 가장 큰 곳이 활강이라며? 왜 뜬금없이 항우산업이야?”
연수의 말에 정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연수는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
“... 태선그룹 측이 관심을 보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서진태… 그 늙은 뱀 새끼는 얼마 전에 삼륜전자도 먹더니 반도체까지도 노려?”
연수가 담배를 입에 물자 정희가 서둘러 불을 붙였다.
“그래서, 기획에서는 뭐라는데.”
“태선과 경합을 하게 되면 손실은 피할 수 없다는 의견입니다. 두 기업이 경합하면 언론에서도 달려들 텐데 경합에 실패하게 된다면….”
“삼륜 때처럼 신나게 물어뜯겠지. 인수에 성공하더라도 손해는 피할 수 없고…. 어쨌든 인수전을 펼치면 지든 이기든 손해라는 거군. 다른 곳은?”
“중소 몇 군데가 있긴 했는데 저희와 태선 측이 경합한다고 하면 알아서 물러날 겁니다.”
연수가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정희는 이미 연수가 인수전에 참여할 것을 알고 있었다.
‘태선’이라는 말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을 봤기 때문이다.
연수는 검지를 책상에 튕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말이 재계 서열 1위와 2위지 태선그룹과 YS그룹의 자본총액은 몇 배나 차이 났다.
전자, 물산, 금융 등 모든 분야에서 YS는 태선을 이기지 못했다.
냉철하고 날카로운 경영자로 알려져 있는 연수지만, 태선과 관련된 일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태선을 넘기기 위해선 하나라도 승전보를 올려야 한다.
진태가 활강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자 다른 곳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재무팀 싹 다 소집해서 지를 수 있는 돈이 얼만지 알아 와. 활강에서 내건 금액은 얼마야?”
“육천억 원입니다. 그 이상으로는 경합하는 회사에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구천억. 구천억까지는 어떻게든 만들라고 전해. 활강은 무조건 먹어야 돼. 반도체 시장에서 태선을 잡아먹을 기회야.”
“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연수는 진태에게 수없이 많이 패배했지만 이번만큼은 각오가 남달랐다.
이번 인수전 결과에 따라 반도체 시장의 주인이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