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48화 (48/249)

#48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집안의 새해맞이 같지만, 실상은 서로를 견제하고, 진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눈과 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과상 앞에서는 저마다의 본모습을 숨기고 서로의 사업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유독 정순과 재만이 가깝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다른 레저 사업은 그래도 하락세까지는 막았더라, 태선호텔은 어떻게 안 되냐?”

“그니까, 큰오빠가 나 좀 도와줘. 호텔 매출만 생각하면 요즘 밤에 잠이 안 와. 회장님도 아직 말은 없으시지만 이대로 가다간 불려와서 된통 깨질지도 몰라.”

재만은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정순을 향해 말했다.

“일단,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나중에 회사로 찾아와.”

재만은 태선의 후계자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형제들에게 척을 치는 줄 알았는데 정순과는 그래도 제법 가까워 보였다.

그래봤자 정순이 자신에게 일시적으로 필요한 사람이거나 애초에 경쟁자로조차 느껴지지 않는걸지도.

준만은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치가 보여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다과라도 좀 드세요.”

“어, 그래. 고맙다.”

준만의 옆에 유과를 비롯한 다과를 놓았지만 준만은 손을 대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작게 물었다.

“이 집에만 오면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가 않는구나. 그래도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준만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지금도, 전생에서도 항상 전쟁을 하며 내 것을 쟁취해왔기 때문에 준만 같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패배자가 되어버린 사람.

“아버지는 왜 할아버지한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까? 가장 많은 계열사와 지분을 물려받은 큰아버지도 또 얻어내겠다고 저러고 있는데.”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네 큰아버지는 그릇이 큰 사람이어서 그런 거다. 게다가 나는 이 집안의 막내다. 괜한 욕심을 부리면 안 돼.”

“..라고 스스로 암시를 거는 것은 아닙니까?”

정곡에 찔렸다는 듯 준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나도 안다.

준만이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차별과 무시를.

태선증권사라는, 태선그룹 안에서 밑바닥에 있는 계열사로 만족하고 가족을 지키고 싶은 그의 소박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겨우 그런 것이 아니다.

부자라는 관계로 얽혀 있는 준만은 내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훌륭한 말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 저는 꿈이 큽니다.”

“네가 창업을 하고 투자를 시작할 때부터 그건 알고 있었다. 너는 훌륭한 사업가가 될 거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미국에서 투자회사와, 택배사를 하고 있지 않냐.”

“지난 1년간 벌어들인 돈이 태선증권사 영업이익의 10배가 넘어요. 태선증권사를 통째로 인수하고도 남는 돈이에요.”

모든 곳에 투자하고 남은 돈이 그 정도라는 말이다.

지금 미국에서 묵히고 있는 주식들과 최근에 샀던 주식들까지 합치면 내가 보유한 자산은 준만의 다른 남매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준만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황비서의 보고로는 그 정도 수익은 아닐 텐데…?”

“황미연 비서는 제 사람입니다. 그리고 황비서도 알지 못하는 자산이 많습니다. 이제 저에 대한 보고는 저한테 직접 들으세요.”

“언제부터….”

연달아서 들은 충격적인 정보 때문에 준만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지금은 준만을 더 흔들어야 할 때다.

“어머니가 천대당하고, 할머니가 경멸받는 이 집안을 바꿀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길에 아버지도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 집에서 내 몫을 챙긴다는 말은 결국 다른 형제들의 밥그릇을 뺏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어. 게다가 나는 배다른 자식이다. 너도 알지 않냐.”

“다른 분들은 다 그 선언을 하는데 왜 아버지만 안 됩니까.”

“그건….”

준만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범준이 내게 다가왔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쌓인 건지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까 하는 꼬라지 보니 꼭 한마디 해줘야겠다. 네가 지금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두고 봐라. 결국 태선의 주인이 누가 되는지.”

유치하다. 조금이라도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다.

이런 멍청한 자식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이렇게 속을 바로바로 드러내는 놈을 어떻게 회장으로 추대하려 했던 거지?

심지어 옆에 있는 준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한다.

준만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이런 범준의 행동을 보며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그래. 태선은 큰아버지께서 물려받으실 거야. 그리고 장손인 형이 대물림을 받게 될 거고.”

“잘 아는 놈이….”

“이게 형이 원하는 말이야?”

범준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었다는 듯 미소를 짓다가 뒷말을 듣고 인상을 구겼다.

“사리 분별 잘해. 혹시 아냐. 내가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남겨줄지.”

“형도 잘해. 지금 형 하는 거 보면 남을 찌꺼기도 없을 것 같으니까.”

범준은 으드득 소리를 내며 준만을 힐끔 보더니 창호, 창훈 형제 곁으로 다가갔다.

저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것일 테지.

“이게 아버지의 위치입니다. 조카도 무시하는.”

준만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이 정도 말로 일어날 사람이었다면 진작 뭐라도 했겠지…. 나약한 사람이다.’

나는 준만보다 더한 삶을 살아왔다.

무시와 경멸은 일상이었고 뒷배 하나 없이 증권사 대표 자리에 올라서자마자 살해당했다.

“네가 어떤 생각인지는 잘 알았다. 나도 생각해 보마.”

준만에게 조금이라도 동기부여가 됐다면 다행이었다.

그때, 진태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네 야망에 놀아줄 생각 없다. 2선도 결국 내 힘으로 단 것 아니냐.”

“아버님!”

경주가 떨리는 눈동자로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고, 동만은 그 옆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네가 하는 짓거리 족족 나에게 들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현재 2선을 지내고 있는 경주가 3선, 혹은 그 이상을 노리고 진태에게 부탁한 것 같다.

진태의 힘이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

그리고 경주의 다선을 막으려는 의도는 태선그룹과 정계의 유착관계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버님 저 자신 있어요. 절대 피해가 가는 일은 없게 할게요. 청와대 쪽에 연락만 주시면….”

“그래도 그동안 며느리라고 내 신경 써서 2선까지는 시켜줬다. 그런데 뭐? 3선? 근본도 없는 년을 출세시켜줬더니 욕심이 끝을 모르는구나. 너 말고도 태선에서 뒤봐준다고 하면 줄 설 놈들 넘쳐난다. 네가 국회의원을 하는 동시에 너는 태선이 약점이 되고 우리는 네가 약점이 된다는 걸 아직도 몰라? 더는 말 안 한다. 마음 단단히 접고 허튼 생각 하지 마라.”

“하지만…. 알겠어요.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이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경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경주가 집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자 동만도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 뒤에 나도 따라붙었다.

저택을 나가고 주위를 살피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나갔을 리는 없고… 저택 오른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벽에 붙어 종종걸음으로 오른쪽에 가보니 경주와 동만이 진태의 수집품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창고로 다가갔다.

벽에 귀를 대지도 않았는데 경주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밖에서 그 얘기를 꺼내!”

“하지만…. 노정환 뒤 봐주고 돈 챙긴 거 알고 그렇게 말하신 거 아니야?”

“알면 뭐? 회장님은 그런 일 없었을 거 같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노정환 얘기를 보아 노정환을 경찰서에서 빼낸 ‘문의원’이 문경주라는 확신이 들었다.

둘의 대화는 경주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양상이었고 동만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원내대표까지 가려면 3선은 달아야 돼. 당신이 회장님께 말해 보면 안 돼?”

“힘든 거 알잖아….”

“아니면 물산에서 자금 빼는 거 막지나 말든가! 까놓고 말해서 당신이 한 게 뭐야? 물산 받은 것도 내가 건설 키워서 그런 거잖아.”

확실히 전생에 태선물산의 실권을 경주가 쥐고 있었다는 찌라시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경주가 동만을 타박하는 양상이 이어지자 더 들을 가치는 없다고 판단했다.

확실한 것은 노정환의 뒷배가 경주라는 것과 노정환에게 받은 불법 자금으로 경주가 선거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큰 무기를 얻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자 다들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순의 장녀인 수경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빈이, 요새 너 엄청 잘나가더라?”

갑작스레 다가와 아는 척을 해대는 수경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정순이 시킨 것 같은데…

이상한 타이밍에 지나치게 어색한 발연기까지.

아니나 다를까 정순이 뒤편에서 나와 수경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매번 모른척하던 조카 녀석이 이것저것 하니 이제야 신경이 쓰이는가 보지.

진태에게 인정받은 것을 온 가족이 알았으니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아질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꽤 피곤하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

일찍 출근한 에릭과 함께 아침 브런치를 먹었다.

어제 태선호텔에 연락해두었기 때문에, 호텔 내부에 있는 정원에서 단둘이 먹을 수 있었다.

서울의 높은 빌딩과 산들이 한눈에 보였다.

“빅딜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조정이 곧 발표될 거래요.”

지난 삶, 빅딜 정책은 과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지만 확실한 것은 한국 경제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다.

재계는 과잉, 중복투자로 인한 적자 누적과 부채 증가로 경영 위기에 놓인 사업 분야의 구조조정을 중요과제로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대기업들은 갖고 있던 비주력 부실 계열사들을 맞교환하거나 매각함으로써 중복투자를 막고 전문성과 경쟁력을 높였다.

태선그룹은 태선자동차와 삼륜그룹의 계열사이지 전자분야 3위, 삼륜전자를 맞교환하면서 전자산업은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기업이 되었다.

삼륜전자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YS전자와 경쟁이 일어났지만, 태선전자의 자본이 더 강했다.

재만은 5000억 원을 추가로 제시하며 새해조찬에서 진태에게 약속했던 성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진태는 이번 빅딜을 성사시킨 재만에게 보상으로 삼륜전자의 지분을 떼어줄 것이다.

전생에서 재만은 이번 빅딜을 통해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활강기업. 어떻게 생각해?”

빅딜 정책을 비롯하여, 정부는 부도 위기의 중소기업들을 회생시키기 위하여 대기업에서 적극 인수하도록 권장할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대기업이서 적극적으로 기업 인수전에 참여한다면, 인수한 중소기업의 부채를 줄여준다는 둥, 세금을 감면해준다는 둥 적극적인 정책을 하겠다고 밝혔다.

나는 얼마 전 반도체기업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오른 활강기업의 인수전이 떠올랐다.

몇년 째 흑자를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활강기업이 정부의 중복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회사로 인수전에 참가하게 됐다.

정부의 압박이니 아니니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활강의 대표 역시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활강기업은 흑자를 꾸준히 기록해내며 좋은 기업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에요. 그런 곳이 이번 인수시장에 나온 것을 보면 오너는 장사꾼 같은데요? 지금 가치가 제일 높다고 판단해서 팔아넘기려는 거겠죠.”

“정책 때문에 강제 합병을 당할 바에야 그냥 벌써 나온 걸 수도 있잖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지원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 최하위권이에요. 그럼에도 활강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신흥강자로 떠오르며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구요. 굳이 건들 이유는 없겠죠.”

에릭의 말대로 반도체 산업은 정부 정책으로 강제 합병을 진행되지 않았다.

QL과 활강 모두 오너경영 기업이다.

인수시장에 내놓은 이유는 모두 그들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그럼 QL은?”

“아, 거기도 이번에 같이 반도체 기업으로 인수전에 나오는 곳이죠? 대표가 기술자여서 그런가 경영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더라구요. 신기술 개발에 올인이라니…. 흑자는커녕 언제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기업 같은데요.”

에릭의 말대로 QL반도체는 경영 문제로 인해 이미 부도 직전이었다.

동시에 인수시장에 나온 반도체 기업, QL과 활강.

전생에서 진태는 이 둘 사이에서 최악의 선택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바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