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서재에서 얘기를 끝내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동만과 그의 아내 경주도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둘의 옆으로 그의 자식들, 창호와 창훈도 보였다.
태선물산이라는, 태선그룹 안에서 태선전자 다음으로 큰 기업을 물려받았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그의 아내, 문경주가 맡았고 그는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찌라시가 있었다.
그 찌라시가 돌았던 게 2000년대 후반이니까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정보였다.
그리고 문경주… 그녀에 대해서는 켕기는 것이 있었다.
노정환이 잡혀서 경찰차로 이송될 때, ‘문의원’과 통화를 했다는 것을 장 경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 문씨를 가진 국회의원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눈앞에 있는 문경주였다.
실제로 동만을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반갑다는 듯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둘째 큰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그래. 강빈이 요새 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더라. 열심히 한 모양이지? 하하.”
동만은 실없이 웃고 있다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경주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야! 왜 그래? 여보.”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당신 자식들 기죽은 거 안 보여?”
동만이 하는 행태를 보면 찌라시가 사실이 맞는 것 같다.
‘한심한 모양새군.’
내가 서재에서 내려오는 것을 봤는지 창호와 창훈은 나를 의식하는 듯 힐끔거렸다.
“형들도 오랜만이네. 그날은 잘 들어갔어? 술에 많이 취했던데 토른 내용은 기억나고?”
창호와 창훈은 젊은 경영인들의 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저 병신 새끼는 누굴 닮아서 저럴까 우리끼리 토론도 했었는데.’
그때 들었던 말은 아직도 기억났다.
창호가 말했는지, 창훈이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직접 한 욕은 기억 못 해도 들은 욕은 철저하게 기억하고 몇 배로 갚아 줘야 직성이 풀렸다.
내 말을 듣고 창훈이 시선을 피했다.
경주가 창호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날이라니?”
“아, 아뇨. 어머니. 몇 년 전 얘기예요.”
“너…. 그렇게 술 조심하라고 했는데.”
젊은 경영인들의 밤에서 봤던 것처럼, 창호와 창훈은 술로 사고를 많이 친 모양이었다.
경주 역시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말을 참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당황하는 둘을 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동만은 뭐가 그리 좋은지 경주를 보며 실실 쪼개고 있었다.
“서재에는 무슨 일이냐.”
“별일 없었어요.”
준만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아내는 챙겼으면 하는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내 말을 들었는지 재만네 가족의 시선이 느껴졌다.
재만이 입을 뗐다.
“별거 아닌 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냐?”
뭐라 답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는데 서영만네 가족과 서정순네 가족이 함께 들어왔다.
“하하. 먼저들 와 있었네. 정순이네랑은 오면서 마주쳤어. 다들 잘 지냈지? 재만이 형도 얼굴… 좋아 보이네.”
영만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재만의 얼굴이 굳어있는 것을 보며 말을 참은 것 같았다.
영만과는 태선보험을 홈쇼핑 광고에 넣게 되면서 아직도 얽혀 있었다.
홈쇼핑의 매력을 느꼈는지 높아진 수수료에도 별말 없이 꾸준히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한 1년은 더 뽑을 만큼 뽑다가 매출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다른 아이템으로 바꿀 예정이다.
영만의 아내, 박선희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특이사항은 기억에 없었다.
그들의 자식들인 장녀 서주민과 장남 서주형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매출이 크게 올랐던데요? 축하드립니다.”
“그래. 강빈아. 네가 축하받아야지. 하하. 내 덕에 수수료도 꽤 나왔겠어?”
여전히 자신이 아닌 남의 공을 치하하기에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나와 영만이 자연스럽게 사업 얘기를 나누자, 주변에 있던 사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이제 다들 자리를 잡기 시작할 테니, 내가 의식되긴 하나 보다.
그래봤자 진태의 관심에는 들지도 못할 테지만.
그리고 영만은 어차피 자기 꾀에 넘어져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사람이므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정순도 들어오며 나를 힐끔거렸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번 GB택배를 통해 큰 이득을 본 남순과는 달리 정순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영만, 남순의 사례를 통해 나와 사업을 하면 반드시 이득을 본다는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정순의 남편 최원기는 재판관으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정순의 자식들인 최수경과 최수애가 차례대로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그때, 진태가 2층에서 내려왔다.
식당에 있는 모두가 거의 동시에 일어나서 진태를 향해 말했다.
“회장님!”
“그래. 다들 이렇게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재만은 이미 인사를 했을 텐데도 허리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시간 맞추기가 어렵네요. 시간을 내서라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들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집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재만은 자주 불러달라는 듯 선수 쳐서 말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진태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진태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고 그의 옆자리에는 순례, 그리고….
“뭐야.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약속 시간 8시 아니야? 어머, 벌써 8시구나!”
남순네 가족이 왁자지껄하게 등장했다.
재벌가 사람답지 않게 남순은 괄괄한 성격을 가졌다.
유난히 진태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게 티가 났다.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전혀 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그녀의 남편, 홍영호와 홍미혜도 그녀의 뒤를 따라 입장했다.
남순은 진태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왜 이리 늦게 온 게야.”
말과는 달리 진태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다른 자식들과 달리 남순은 유일하게 진태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진태의 첫 아내인 옥희가 남순을 낳고 죽자 그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남순을 가장 아낀다고 들었다.
“차가 막히지 뭐예요. 호호. 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신데요? 전에 보낸 보약이 좋긴 좋았나 보네요.”
“그래. 맛은 없는데 효과는 있나 보구나. 껄껄.”
진태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남순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매들의 시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남순은 일도 잘했다.
그녀는 물려받은 태선백화점을 잘 운영했으며 존마트를 비롯해 자신의 사업을 착실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남순이 오자 삭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남순까지 자리를 잡고 앉자 순례가 사람을 불렀다.
“이제 식사 시작하자.”
시작은 작은 사기그릇에 담긴 호박죽이었다.
순례의 설명이 이어졌다.
“서산의 특산물인 단호박 중에서도 특등품이야. 조미료는 하나도 넣지 않고 호박 본연의 단맛을 느낄 수 있단다.”
순례의 설명을 듣고 진태를 시작으로 다들 숟가락을 들었다.
혀를 감싸는 단맛은 과연, 특등품이라고 불릴 만했다.
긴장하고 있던 영빈도 한입 맛을 보더니 흡입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애는 애구나.’
영빈을 보면 가끔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이 적었기 때문에 금방 다 해치웠다.
일하는 아주머니 몇 분이 와서 빠르게 치우고 다음 음식을 내왔다.
널따란 그릇 한쪽 구석에 검은색 알갱이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편을 썬 바닷가재와 그 위로 어린잎채소들이 보기 좋게 올려져 있었다.
순례는 나레이션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다음은 캐비어를 곁들인 바닷가재 샐러드랑 아보카도 무스야. 소금과 후추는 취향껏 뿌려서 먹거라.”
남순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엄마, 이걸 혼자 다 준비했어요?”
“오랜만에 모이는 건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다들 맛있게 들어.”
이번에도 진태가 먼저 포크로 바닷가재 살에 캐비어를 곁들여 먹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태를 보며 너도나도 먹기 시작했다.
은은한 호두 향과 함께 부드럽게 씹히는 크리미한 질감이 좋았다.
서강빈으로 살며 고급음식은 많이 먹었지만 오늘은 더 특별한 것 같았다.
실컷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정순이 분위기를 깼다.
“작은엄마. 고생하셨네. 여행 다니시느라 요리하는 법은 이제 까먹었을 줄 알았는데.”
‘작은엄마’라는 단어에 남매들이 움찔했다.
옥희가 죽고 순례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를 엄마로 인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준만을 쳐다봤지만 준만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태는 듣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례는 멋쩍게 웃었다.
“많이들 먹어. 너희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정했어.”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이어지고 다음으로는 떡국이 나왔다.
순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떡국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우도 좋지만 오늘은 특별한 고기로 준비했어. 떡은 내가 이천에서 공수한 쌀을 가지고…”
“그만 얘기하시고 식사나 하시죠. 국 식겠어요.”
정순이 말을 끊자 정적이 이어졌다.
이놈의 집안은 무시와 경멸이 일상이다.
영빈은 눈치를 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새해부터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식사 예절교육은 어릴 때 끝내지 않았느냐?”
진태의 말에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다.
나는 적어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불편하게 먹고 싶지는 않았다.
“음식이 맛있으니까 빨리 먹고 싶다는 뜻이겠죠? 할아버지.”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진태가 ‘아버지’지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남순밖에 없듯이, ‘할아버지’라는 호칭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진태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던 손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범준은 시기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진태가 피식 웃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 맛이 좋긴 하구나. 다들 들어.”
진태의 그 말은 방금 내가 한 호칭에 대한 오케이 사인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재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준만조차 재만의 눈치를 보고 있자 내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 떡국을 먹었다.
“할머니. 진짜 맛있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순례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이며 떡국을 한입 더 떠서 먹었다.
내가 진태를 대하는 호칭에 서로를 곁눈질하던 나머지 가족들도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 식사하기 시작하자 영빈도 눈치를 보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떡국을 퍼먹으며 해맑게 웃는 영빈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상이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진태와 가족들의 대화가 시작될 타이밍이라는 신호였다.
다과와 수정과가 눈앞에 놓였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진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재벌은 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갑작스러운 재벌 이야기에 다들 뜬금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전에 내가 했던 기부를 말하는 것을 다들 알아차렸다.
애써 숨기려 해도 그들의 표정에서 시기에 가득 찬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 정부가 들어오면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책들은 다들 알겠지? 그중 빅딜과 관련된 정책이 곧장 실행될 거야.”
얼마 전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빅딜은 김대중 정부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책을 뜻했다.
빅딜 정책.
말 그대로 거대한 거래나 사회적으로 놀랄 만한 상황을 뜻한다.
경제계에서는 외환위기 당시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정책을 의미한다.
대기업 간의 계열사 구조조정 방안으로 문어발식 확장에 따른 중복 과잉투자에 대한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전문화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대기업의 비주력 및 부실 계열사를 그룹 간에 상호 인수 및 매각을 추진하는 거래였다
“줄줄이 파산하는 기업들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어. 그리고 그중 진짜배기도 있겠지. 우리가 쓸어 담을 기업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주는 일만 곧이곧대로 하는 놈은 태선에 필요 없으니까.”
동만을 비롯한 진태의 자식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그러나 재만의 눈은 번뜩이고 있었다.
“회장님. 제가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