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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46화 (46/249)

#46화

“제가 롤모델로 삼은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 서진태 회장님입니다.”

새해 아침.

티비에서는 며칠전 방송했던 인터뷰의 녹화본이 방영되고 있었다.

진태는 안경을 고쳐 쓰며 TV를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던 채규가 말했다.

“회장님께서 같은 영상을 여러 번 보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들한테 강빈 군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인물이 훤칠하니까 질리지가 않네. 허허. 태선가에서 제일 나아.”

채규는 진태의 말이 단순히 외모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재벌의 인터뷰가 이렇게까지 유행을 타게 된 것은 강빈의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지난번 구조조정을 위한 기부부터 이런 인터뷰까지… 강빈 군이 생각보다 치밀하네요.”

진태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 인터뷰가 TV에 나오고 태선의 이미지가 반전됐어. 묵혀 있었던 태선 재단의 기부도 터트릴 계기가 됐고.”

“맞습니다. 이미지 쇄신에 따른 주가변동은 없었지만, 하락세는 막았습니다. 그보다 김환기의 그림이라니…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는 그림일 텐데 회장님이 주신 겁니까?”

“예끼, 이 사람아. 강빈이가 땅에서 발견했다고 하질 않냐.”

“하늘이 돕는다는 말이 이렇게도 통하는군요. 하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저 재만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진태는 태연하게 있는데, 채규가 서둘러 강빈의 인터뷰가 흘러나오는 TV를 껐다.

문을 열고 재만이 들어오고 뒤에서 범준이 긴장한 듯 따라 들어왔다.

“범준이는 왜 데려온 거야?”

“하하. 그래도 새해인데 절을 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범준아.”

범준이 바닥에 엎드려 진태를 향해 절을 올렸다.

“1997년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더 건강하세요. 회장님.”

“그래. 너도 지금처럼만 하거라. 일 얘기 할 게면 범준이는 나가 봐라.”

절이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라 지시하는 진태의 모습에 범준은 퍽 서운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빠르게 인사하고 서재를 나갔다.

재만 역시 서운한 목소리로 진태에게 말했다.

“회장님. 태선식품이 이번에 하락세를 면하고 매출이 상승했습니다. 위축된 시장에서 범준이가 시도한 경영 방식이 맞았습니다. 칭찬 한번 해주시고 보내시죠.”

“그래? 몰랐구나. 근데 재만아.”

“예, 회장님.”

“내가 그런 작은 거까지 일일이 칭찬해줘야 하냐?”

“....”

진태의 말대로 범준의 성과가 엄청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장손인데 좀 관심 가져주고 칭찬 한번 해줄 수 있지 않나?

하긴 제 마음에도 다 차지 않는 아들.

진태의 마음에 찰 리가.

괜히 범준이 얘기 꺼냈다가 되레 단호한 진태의 걱정만 늘었다.

“그보다 태선전자의 주가가 반등을 시작했다지?”

“맞습니다. 회장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번에 새롭게 리뉴얼 되어 출시한 로열시크릿 김치냉장고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동안 쌓아왔….”

“정말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냐?”

재만이 습관처럼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댔다.

사실 재만도 알고 있었다.

태선전자를 비롯한 태선그룹의 하락세가 멈춘 것은 강빈의 인터뷰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그러나 범준이 무시당한 지금, 강빈의 공을 치켜세우기 싫었다.

인정하기도 싫었고.

“강빈이는 자기가 번 외화를 내 이름으로 기부했다. 넌 그동안 뭘 했냐는 말이야.”

“제가 어떻게 경영해왔는지 회장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준 것을 잘 경영했지.”

진태는 ‘준 것’을 말할 때 힘을 주며 말했다.

“회장님!”

“아들이란 놈이 지 아비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데, 그저 저 혼자 살겠다고. 쯧.”

“회장님. 제가 전자 어떻게 경영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때로는 내놓는 게 더 큰 걸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항상 명심해라. 알겠어?”

“네, 항상 새기며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재만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

아침부터 영빈을 비롯한 우리 가족은 진태의 집에 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혜와 준만은 얼마 전 남순의 백화점에서 샀던 드레스와 정장을 입었고, 나와 영빈이는 기존에 있던 깔끔한 정장을 입었다.

운전은 새해가 된 기념으로 준만이 직접 하겠다고 이상한 주장을 펼쳐서 준만의 전속 운전기사는 다른 차를 타고 뒤따라왔다.

“회장님 댁에 가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무슨 일이래요?”

“글쎄, 나이가 드시더니 사람이 바뀌었나?”

“어휴, 당신 회장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해 봐요.”

영혜가 준만의 등짝을 때렸다.

준만이 모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농담을 했다는 것은 영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온 가족이 모이는 이유는, 진태의 생각 변화도 있겠지만, 진태의 아내이자 준만의 어머니, 김순례가 2년 동안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도 있을 것이다.

영빈이 볼멘소리를 했다.

“나도 꼭 가야 되는 거야? 강빈아. 난 대역을 써서라도 가기 싫다.”

“금방 끝날 거야. 회장님 성격 알잖아?”

“그래…. 참아 봐야지. 그보다 김환기 거장 그림을 구했으면 형한테 줘야지. 왜 기부를 해?”

“뒤가 구리니까 그랬지. 안 그래도 형한테 줄 선물도 따로 구했으니까 기대해.”

“선물? 뭐냐 궁금하게. 뭔데?”

사실 영빈을 위해서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준비했다.

꽤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왔다. 영빈에게 받을 도움에 비하면 별거 아니긴 하지만.

웃고 떠드는 사이 진태의 저택에 도착했다.

“자, 가볼까.”

증권을 운영하고 있으니 가끔 진태의 저택에 왔을 텐데도 여전히 긴장되는지 준만의 표정이 많이 굳어있었다.

그래도 가족들 앞이라고 애써 힘을 내려는 준만의 모습이 왠지 측은했다.

널따란 마당을 지나고 저택에 들어가자 순례가 우리를 맞았다.

“할머니!”

“우리 강아지들 왔어?”

영빈이 아이처럼 달려가 순례의 품에 안겼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빈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달라진 것 같다?”

“하하. 저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어요.”

순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뒤에 있던 준만이 다가갔다.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그래. 준만아. 영혜는 더 예뻐졌구나.”

“호호. 어머니도 여전하세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진태의 두 번째 아내 김순례.

순례는 태선가의 사람들 모두와 잘 지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명망 높은 자산가의 둘째 딸이었던 순례는 진태의 모습에 반해, 다섯의 자녀가 있는 진태의 청혼을 수락한다.

얼마 뒤 준만을 낳게 된 그녀는 여섯 아이의 엄마가 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든 아이를 공평하게 대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였다.

그 얘기가 사실인 듯, 태선가에서 이렇게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순례는 집안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배다른 자식들에게 주었던 사랑은, 혹시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견제와 미움으로 돌아왔다.

진태 역시 그녀에게 작은 지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권력도 주지 않았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가정의 일들만 도맡아 했던 순례는 어느 날,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래. 특히 파리가 인상적이더구나. 그곳에서만 세 달을 지냈는데도 부족해.”

“다음에 꼭 얘기 들려주세요.”

“그래. 시간을 내보마. 자리로 가자꾸나.”

식당으로 가자 30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보였다.

우리 가족이 제일 처음으로 왔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범준과 그의 어머니, 김강숙이 앉아 있었다.

준만이 당황한 듯 말했다.

“형수님….”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죄송해요. 한 시간은 일찍 왔는데….”

범준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괜히 우리 가족에게 트집을 잡는 것이 보였다.

순례는 괜히 끼어들었다가 준만이 되레 곤란해질까 생각한 건지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일단 앉죠. 저희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내 말에도 가만히 있는 준만과 영혜의 등을 밀며 자리에 앉았다.

강숙은 심기가 불편한 듯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동서! 물 좀 떠와.”

“네. 형님.”

“큰어머니. 회장님댁에는 일하시는 분들도 넘치는데요. 아주머니! 여기 물 한 잔만 주세요.”

나는 일어나려는 영혜의 손을 잡았다.

강숙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모르겠니. 일하는 사람 밥 차린다고 바쁘니까 부탁한 거지. 동서. 물 한 잔 떠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잖아?”

“아니에요. 가져다드릴게요.”

강숙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강숙의 모습을 보고도 그저 아무 말 못 하는 준만의 모습이 더 문제였다.

어쨌든 영혜는 지금 나의 어머니다.

항상 다정하게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기에 나 역시 정이 많이 들었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분을 삭이는 영빈도 신경이 쓰이고.

왜 이렇게 강숙은 심기가 불편한 건지.

아까부터 씩씩대는 표정으로 딴 곳만 바라보는 범준하며,

그리고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재만까지….

“제가 물 가져다 드릴게요. 어차피 서재 가려 잠깐 일어나려고 했거든요.”

서재란 말에 강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역시 진태와 관련되어서 뭔가 일이 있었나 보다.

“서재는 뭐 아무나 들락날락하는 줄 아니.”

“네? 서재 함부로 못 들어가나요? 저는 자주 가서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요.”

“너….”

바로바로 드러나는 강숙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마침 아주머니가 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왔다.

강숙의 앞에 물컵을 가져다 놓았다.

범준이 눈을 치켜세웠다. 열받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 나의 기부금과 문화재 기부.

그리고 남들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는 본인의 매출 상승.

비꼬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범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 엄마의 복수는 아들인 내가 하고, 큰어머니의 잘못은 아들 범준이가 받네. 범준의 코를 한번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근데, 매출은 상승했는데 무슨 제품인지도 모르면 조금 더 분발해야 할 것 같아. 나는 택배에 홈쇼핑에 하는 게 많아도 사람들이 다 알아보던데... 아무튼 힘내라고.”

“야..이..”

강숙이 범준의 몸을 잡아끌었다.

귓속말로 무언가 말을 했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범준은 달려들 듯하더니, 이내 가만히 있었다.

“그럼 저는 서재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 한 분은 여기 대기해주세요. 언제 다른 분이 목이 탈지 모르잖아요.”

2층으로 올라가는데 재만이 내려오고 있었다.

재만은 계단을 오르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큰아버지.”

“어디 가는 거냐.”

“서재에 가는 길입니다.”

그래도 재만은 범준과 달리 화를 삭일 줄 알았다.

그대로 지나쳐서 가려는데 재만이 낮게 말했다.

“너무 설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니 더 이상 재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서재만.

그를 갈아버리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재만은 현재 한국 굴지의 1위 기업, 태선전자를 경영하고 있으며 후계에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 유치(乳齒)가 빠지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갈려 나올 그때.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노크를 하고 들어간 서재에는 진태와 함께 채규도 있었다.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인터뷰에서는 할아버지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회장님? 껄껄. 웃기는 놈이구나.”

“하하.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정정해달라고 요청할까요?”

“됐다. 이놈아. 이미 실컷 불러놓고 이제 와서? 허. 그냥 불러라.”

확실히 진태에게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것 같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확실히 진태에게서의 입지를 다진 것이다.

옆에 있는 채규의 시선도 이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인터뷰만큼 재밌는 일이 있으면 내 언질이 없어도 종종 찾아오거라.”

“귀찮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놈은 언제나 다 해놓고 이제 와 조심하겠다고? 됐다.”

종종 찾아오라는 말.

입지를 다진 것 이상으로 진태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다.

채규도 놀랍다는 듯 그런 진태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보다 어쩐 일이냐.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려고 오는 놈은 아니고.”

“말하면 도와주시는 겁니까?”

“도와주고 말고는 말에 달렸지. 우선 들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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