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45화 (45/249)

#45화

승인자가 나 하나뿐이기 때문에 GB센터의 물류센터 공사는 부지를 산 다음 주에 바로 시작되었다.

이미 용인부지에 물류센터를 지었던 윤성건축사사무소 신일상 소장을 통했기 때문에 빠른 것도 있었다.

공사 시작 이틀 뒤 바로 문화재를 발견했다고 기사를 냈다.

망설이지 않고 기부했다는 이미지도 중요했기 때문에 곧바로 문화재청에 들러 직접 기부했다.

특히 김환기의 붉은색 점화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각종 언론사 헤드라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걸렸다.

진태의 입김도 어느 정도 들어간 것 같았다.

문화재 기부가 실린 당일만 인터뷰 제의가 수십 번이 넘게 쏟아졌다.

전생의 나였다면 모든 인터뷰를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지난 삶, 나도 초반엔 나를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수락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흙수저 출신의 성공 비결이라든지, 추천하는 주식이라든지. 나라는 사람보단 부수적인 것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뒤론 인터뷰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성공투자증권의 대표 자리에 오르고 이사들에 등 떠밀려 한 몇 번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절했었다.

서강빈이 된 지금, 나는 인터뷰를 수락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의 인터뷰는 명백한 목적이 있다.

진태와 태선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불신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그렇게 만든 나의 존재를 진태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킬 것이다.

내가 인터뷰를 수락한 곳은 주형일보였다.

인터뷰를 담당한 한종혁 기자는 주형일보에서 ‘독자에게 친근하게’라는 명목으로 밀어주고 있는 스타 기자였다.

방송국 SCB에서 짧은 특집을 기획 중이라며 연락이 와서, 동시진행을 하기로 했다.

인터뷰와 촬영을 동시진행하기로 한 곳은 GB택배 대표실이었다.

SCB 측에서도 꽤 힘을 썼는지 조명팀 셋, 촬영팀 셋에 PD, 스타일리스트까지 투입된 인원만 8명이었다.

방송 시작 전, 한쪽 구석에서 화장을 받고 있는데 한기자가 다가왔다.

“밀어주기식으로 갈 겁니다. 알아서 서대표님 입맛에 맞춰드릴 테니까 대답은 건성건성 하셔도 됩니다. 대본 쓰는 게 직업이니까요. 하하.”

돈이 좋긴 좋다.

사전에 미리 용돈 좀 챙겨줬더니 인터뷰 시작도 전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

“알겠습니다. 한기자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네. 사전에 얘기 드린 질문 말고 추가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화장을 마치고 잠깐의 쉬는 시간이 끝나자 QBC의 장PD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와 한기자는 통유리창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메라 롤!”

한기자가 나를 향해 웃으며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서강빈 대표님.”

“반갑습니다.”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싱긋 웃었다.

“가볍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GB택배를 운영하고 있고,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을 겸직하고 있는 서강빈입니다.”

“외화 천만 달러에 이어 문화재 기부까지… 모범재벌의 표본이라고 불리시는데 알고 계셨나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국민들이 제게 주신 돈이지 제 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문화재 기부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구요.”

“역시 소문대로 겸손까지 갖추셨군요.”

그때 셔터 소리가 울리며 사위가 잠깐 반짝였다.

사전에 촬영을 진행 중 사진도 찍을 것이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갑작스럽게 빛이 점멸하자 당황스러웠다.

카메라 감독이 소리를 질렀다.

“저 자식이….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야 될 거 아니야! 저놈 뭐야?”

“죄송합니다. 신입기자여서…. 빨리 사과 안 해!”

한기자의 말에 사색이 된 신입기자가 연신 허리를 굽혀댔다.

“그만하고 인터뷰 진행하시죠.”

“아, 죄송합니다. 야! 서대표님한테도 사과드려.”

“그만. 시간 아깝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방금 거 자르고 다시 가시죠.”

딱히 신입 기자에게 동정심을 느낀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시간이 아까웠다.

오늘 에릭이 한국에 다시 들어오면서 같이 분석해야 될 기업들만 하루에도 열 군데가 넘었다.

한기자가 손가락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었다가 풀고 다시 방송용 미소를 지었다.

“천만 달러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액수의 외화를 기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어떤 계기로 기부에 참석하게 되신 겁니까?”

“지금은 누구나 힘든 시기잖아요. 기부는 제 인생의 부가가치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국민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당연한 거죠. 게다가 기부가 주는 행복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한기자가 줬던 대본을 떠올리며 대답해나갔다.

기부가 인생의 부가가치세라니… 사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자기가 쓴 대본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기자가 미소를 띠며 웃었다.

“기부에 이어 문화재까지 국가에 귀속시키셨는데요. 특히 김환기의 붉은색 점화는 가지고만 있어도 소장가치가 엄청날 텐데 아쉽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제가 김환기 거장님의 그림을 발견한 것은 단순히 운이었습니다. 게다가 땅에 파묻혀 있었으니 좋은 경로라고 말할 수는 없죠.”

“좋지 않은 경로라는 말은… 누군가의 비자금 세탁과 연루되었다는 말일까요?”

한기자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한 호흡을 늦추며 말했다.

방송에 좋은 이미지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슈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그건… 제가 확답을 드릴 수가 없겠군요.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문화재라면 굳이 땅에 묻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신고를 했는데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저도 한기자님과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흥미로운데요? 하하. 확실히 정당한 주인이라면 방송이 나가고 그림을 찾으러 가겠죠? 과연 그림의 주인이 나타날지 기대가 됩니다.”

방송을 보며 이를 갈아댈 노정환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기부를 하신 것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과찬입니다.”

“사업은 물론 투자 쪽으로도 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 서대표님에게도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거 너무 흔한 대답이라서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롤모델로 삼은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 서진태 회장님입니다.”

할어버지라는 단어를 뱉고부터 촬영팀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선 쪽에 부정적인 언론들을 틀어막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진태의 이미지는 한성사태에 연루되어 국민을 우롱하려고 했던 악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한기자와는 사전에 얘기가 되었기 때문에 한기자는 침착하게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롤모델로 태선그룹의 서진태 회장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장사꾼이 되지 말라. 제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입니다. 제 인생의 모토로 삼은 말이기도 하고요.”

“이번 기부도 서진태 회장의 영향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할아버지가 지금껏 해오신 기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요.”

태선 재단에서 매년 순환되고 있는 돈만 수백억이 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돈이 진태의 비자금 조성에 활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진태가 죽은 뒤였다.

어쨌든 이 말로 진태의 이미지, 태선가 안에서의 내 입지까지 모두 얻었을 것이다.

“태선 재단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 외에도 개인적인 기부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선 재단의 기부 규모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는데요, 서강빈 대표님이 하신 기부가 별거 아닐 정도라니…. 놀랍군요.”

주형일보에서 스타 기자를 선정할 때 연기력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기자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남은 한 해 동안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올해는 외환위기로 인해 국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기부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네요. 남은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이 상황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시고자 하는 의지를 잘 전달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려요.”

마지막 대본이 생각나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한기자가 카메라에 비추지 않게 수첩을 펼쳐 보였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이런 인터뷰를 하는 것도 매우 부끄럽네요. 선한 영향력이 전달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힘을 내서 이 위기를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상 서강빈 대표님과 인터뷰였습니다.”

“컷!”

카메라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한기자가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처음 하시는 인터뷰 맞으세요? 그림이 잘 뽑힐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메라 감독을 비롯한 촬영 팀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에릭이 들어왔다.

“촬영은 잘 끝나셨나요?”

“응. 한기자님이 알아서 잘해주실 거야.”

“다행이네요. 참, 대표님 이것부터 전달하려 했어요. 풀화증권 시장에 풀린 건 싹 다 매수했습니다. 주가가 마지막에는 190원이었구요. 지분 10프로는 풀화증권 오이사한테 직접 양도받았습니다. 시가보다 20프로 더 쳐서 줬어요.”

풀화증권은 지난주 에릭에게 전량 매수를 지시했던 주식이다.

황비서에게 지시할 수도 있었지만, 지분양도까지 하려면 에릭이 처리해줘야 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반 년 뒤에 주가가 만 원이 넘었었는데 현재 주가는 고작 150원 언저리라니.

“그래서 총비용은 31억 6500만 원 들었어요.”

외환위기 상황 때문인지 주식들이 연일 하한가를 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에릭의 얼굴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기존 400원 선에서 여기까지 떨어졌지만 저는 지금도 바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근데 왜 매수한 거야?”

“대표님이 지시했으니까요. 대표님은 여태껏 한 번도 투자에 실패해본 적이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꽤 고마운데?”

내가 웃자 에릭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풀화증권은 반드시 반등할 거야. 지금 폭락한 원인 중 하나인 구조조정도 결국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거고. 대표가 어떤 식으로 경영하는지는 너도 알잖아.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마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대표님 덕인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어요?”

“네가 믿고 따라와 준 덕도 있지.”

에릭의 어깨를 툭 쳤다.

“아, 대표님. 미국 쪽 경영은 믿을 만한 친구가 있는데 제가 부재시에 회사 전반적인 운영을 맡겨도 괜찮을까요?”

“누구?”

“레이크사이크스쿨 선배인데 제가 투자회사 총괄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연락이 왔어요.”

레이크사이크스쿨이라면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명문 사립고등학교다.

학교뿐 아니라 에릭이 추천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

“네가 믿는 사람이라면 맡겨. 대신 결정권자는 너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고.”

“당연하죠. 어차피 중요한 안건들 최종 승인은 제가 직접 미국으로 가서 하면 돼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없었더라면 많은 일들을 혼자 감당할 수 있었을지.

이렇게 안정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에릭이 새삼 고마웠다.

한편, 지난번 투자했던 스타벅스, 애플, 아마존 닷컴의 주식은 거듭해서 폭등하고 있다.

IT 버블이 터지고 세계 시장을 움직일 자금이 모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릭에게 앞으로도 부탁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