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발견된 도자기들과 김환기의 그림을 개인 소장하자니 내가 이쪽 분야에 관심이 없었고, 팔자니 출처가 의심스러웠다.
노정환이 공사장까지 와서 묻을 정도였으니….
“그러니까, 이 그림이랑 도자기들의 값어치가 웬만한 외제차는 그냥 뛰어넘는다는 거죠?”
“외제차 몇십 대는 가져와야 될걸?”
“저희가 가지면 안 되겠죠…?”
“어차피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야. 갖고 있다가 불똥 튈 수도 있고. 노정환이 묻어둔 거 보면 발견 신고도 안 한 것 같은데 우선 신고를 해야지.”
괜히 암시장에 발을 들여 뒤탈을 남기는 것보다 깔끔하게 신고하고 선심 쓴다는 듯 기부하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도자기들과 그림을 합쳐도 100억 원이 겨우 넘는다.
노정환에게는 큰돈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기부할 거야.”
“네? 기부해서 대표님이 얻는 게 있어요?”
“태선그룹 이미지 재고. 서회장의 신임 얻기.”
“... 돈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네요.”
에릭은 그래도 아쉬운지 한참을 밀매품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성그룹 정한수 회장과 공동 투자를 진행하려는 정황으로 망가졌던 진태의 이미지는 저번 내 기부를 통해 어느 정도 수복이 되었다.
이번 문화재 기부를 통해서 완전한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진태의 마음을 사는 것이 태선 내의 입지를 얻는 것이니 나에게는 돈도 한 푼 안 들이면서 이득을 취하는 장사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황비서를 지시해 서울 근교의 공터 하나를 샀다.
“땅 파서 문화재를 발굴했다고 할 거면 노정환이 심은 공터를 사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공사장 짓다 만 땅을 어디에 써? 철거하는 데 돈이 더 들겠다. 어차피 노정환은 자기 물건이라고 주장 못 해. 그래도 땅 파서 나왔다고 해야 되니까 어디든 사기만 하면 돼.”
이미 갖고 있던 땅에서 발견됐다고 하면 아귀가 맞지 않으니, GB택배의 새로운 물류센터도 지을 겸 추가로 공터를 매입한 것이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에릭의 어깨를 툭 쳤다.
“기부는 언제 하실 생각이에요?”
“일단 공사 들어가기 시작하면 기부해야지. 공사 시작도 전에 땅 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노정환이 배 좀 아프겠는데요? 하하.”
에릭이 생각만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에릭은 나이가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순수한 건 여전한 것 같다.
“그보다 한국컴퓨터 대표하고 미팅 있던 거 아니었어요?”
“이제 가야지. 너는 월드뱅크 대표랑 만나줘. 계약 조건은 내가 말했던 대로.”
“네. 약속 잡을게요. 새인산업은요?”
“이번 주 내로 잡아서 끝내야지. 질질 끌어서 좋을 것 없으니까.”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운전기사 하나 필요하겠는데?”
“하하. 아예 한국에 눌러앉을까요?”
에릭의 농담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오늘 술이나 한잔하자. 일도 잘 풀렸겠다.”
“저야 늘 좋죠.”
에릭과 함께 있으면 내가 즐기지 못했던 20대가 떠올랐다.
바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같지만, 전생에서는 여유가 없었다.
목적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살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정해놓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그럼 이따 보지.”
“네. 다녀오겠습니다.”
에릭을 보내고 한국컴퓨터로 찾아갔다.
이번에는 희원과 서현 둘 다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대표님!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 한국컴퓨터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과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미팅이 시작되었다.
“네, 덕분에요. 제가 정말 큰 실수를 할 뻔했네요. 다시 투자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희원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가 첫 미팅에 내걸었던 조건처럼 희원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의 30프로가 계약 조건이었다.
노정환은 10프로를 배팅했었다.
이 사건이 났었는데 그대로라.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네?”
“투자조건 말입니다.”
“서대표님께서 처음 제안하신 조건 그대로 썼는데요?”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경합하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굳이 그 조건에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한국 컴퓨터의 시가총액은 약 100억 원이다.
원래는 70억 원 선에서 멈춰있었는데, 내가 황비서에게 지시해 시장에 풀린 한국컴퓨터의 주식을 죄다 매수하는 바람에 주가가 올라서 전체 시총이 상승했다.
희원이 보유한 한국 컴퓨터 지분은 60프로가 조금 넘었다.
항공우주 산업, 유통업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드는 기업.
비록 사기를 당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순진하지만 많은 것을 이뤄낸 사람.
“그럼… 어떤 조건을 원하시는 건가요?”
“200억 원 드리겠습니다. 자사주의 절반을 원합니다.”
시가총액의 2배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 희원과 서현이 토끼 눈을 떴다.
서현이 먼저 입을 뗐다.
“희원이가 자사주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고, 제가 가진 지분은 8프로 정도예요. 그 외에 자잘한 지분들은 직원들 소유구요. 저는 상관없지만 희원이 의견이 중요할 것 같아요.”
“희원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얼마든지요.”
정적이 시작되고 서현이 희원과 나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다.
희원이 메모장과 펜을 들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희원이가 생각이 많을 때 하는 습관이에요.”
서현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희원 씨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서 조건을 추가하겠습니다.”
희원이가 펜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조건이요?”
“네. 희원씨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드리겠습니다.”
“우선매수청구권이 뭐죠? 서대표님이 주식을 매도할 때 제가 먼저 살 수 있다는 말인가요?”
말할 때는 잊고 있었는데 ‘우선매수청구권’은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 초반은 되어야 도입되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보유한 주식을 모두 풀면 투기자본이 물을 흐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걱정은 덜겠네요. 마지막으로 서대표님은 어떻게 믿죠?”
자사주의 절반과 내가 보유한 주식을 합치면 희원이 보유한 주식보다 많아진다.
희원은 경영권을 나에게 빼앗길까 걱정하고 있었다.
“제가 주식을 매도하기 전까지 지분 20프로의 의결권을 포기하겠습니다. 계약상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추가 배당금도 받지 않겠습니다.”
내가 말한 것은 우선주와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우선주는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이 없는 대신 추가 수익을 얻는다.
이 조건대로라면 내가 주식을 보유하든, 매도하든 경영권은 희원이 갖고 있을 수 있다.
희원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런 조건이라면…. 수락하겠습니다. 자사주의 절반을 넘길게요.”
“잘 결정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희원과 가볍게 손을 마주 잡았다.
옆에 있던 서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서대표님.”
현재 한국컴퓨터의 시총은 100억 원에 불과하지만 내년 말에는 2000억 원, 내후년 초에는 1조 원 가까이 뛰는 기업이었다.
13억 원으로 시장에 풀린 15프로 정도의 주식을 확보했고, 방금 계약을 통해 지분 35프로를 확보으니 총 지분은 50프로에 가까웠다.
2년 안에 최소 5000억 원으로 부풀 소중한 지분이었다.
***
“결국 세 기업 모두 계약했네요. 축하드려요. 대표님.”
에릭이 내 소주잔을 채웠다.
“이번에 네가 도와줘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월드뱅크는 네가 땄잖아.”
“대표님이 조건은 말해줬잖아요. 100억 원에 지분 30프로!”
에릭의 협상 능력이 빛을 발하기도 했겠지만,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다.
월드뱅크의 대표는 한탕주의자였는데 그 때문에 월드뱅크의 초반 주식이 급등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런 성향 때문에 결국 상장폐지를 하게 되기도 했다.
난 때맞춰 팔기만 하면 되는 거고.
“새인산업은 어떻게 됐어요?”
“일사천리로 됐어. 애초에 투자자가 노정환 일당밖에 없었으니 대표 입장에서는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수락한 거지.”
“설마… 40프로에 계약하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에릭과 소주잔을 부딪쳤다.
한국컴퓨터와 새인산업의 협상 양상은 비슷했지만 달랐다.
한국컴퓨터는 지금당장 내 투자를 받지 않더라도 경영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새인산업은 노정환의 투자가 곧 들어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무리하게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장의 투자금이 간절한 새인산업은 지분을 올려 협상을 했어도 본인들은 선택할 수 없었다.
100억 원의 30프로였던 기존 조건에서 10프로를 더 얹어서 협상했고, 새인산업의 대표 백승진은 이를 곧장 수락했다.
“새인산업에서 이제 인터넷 전화 서비스를 개발할 거야. 기업가치나 매출도 크게 오를 거고.”
노정환의 투자를 믿으며 무리하게 진행했던 개발은 오히려 새인산업을 성공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료 인터넷 전화 서비스의 성공이 IT 버블과 겹치며 새인산업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지만, PC통신의 몰락과 함께 추락하는 기업이기도 했다.
역시 그전에 정리할 거니 상관없고.
“대표님이 말했던 게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맞겠죠.”
에릭이 소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이어서 말했다.
“저도 수익을 내고 있기는 한데 대표님이 진행하는 사업들이나 투자를 보면 제가 뭘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어요.”
“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에릭은 나를 보며 자신이 미미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 역시 아직 부족한 게 많다.
현재 내가 하는 투자에는 대부분 수량과 금액이 한정적이어서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투자할 수가 없다. 또, 지금은 과소평가를 받거나 아직 상장하지 않은 기업들의 이름과 미래 가치를 기억해내고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아무래도 기억에만 의존하다 보니 한계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서 놀고 있는 돈이 없게 굴리고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잉여가 생긴다.
“나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나역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어. 그래도 네가 하는 일에는 꽤 많은 수익을 내도 있어. 지난번 수익들을 생각해봐. 네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
어쨌든 에릭도 오늘 월드뱅크를 따왔으니까.
오늘 내가 계약했던 기업들은 400억 원을 투자해서 최소 수천억 원, 많게는 일조 원이 넘는 이득을 불러온다.
에릭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 보면 대표님이 저보다 한 살 형이라는 게 안 믿겨진다니까요. 꼭 40대는 넘은 아저씨 같은데….”
일 말고는 관심 없어 보이는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꽤 눈치가 빠르다.
그냥 말없이 웃었다.
“맞다. 아까 누구한테 연락 온 거예요?”
“SCB의 장PD라던데.”
“방송국이 왜요? 뭐 안 좋은 거라도 터졌어요?”
“아니. 짧게 특집을 기획하고 있대. 인터뷰 제안은 많이 왔는데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에릭이 소리 내서 웃었다.
“대표님 성격이었으면 거절했겠네요.”
“수락했어.”
“네?”
에릭의 목소리가 식당을 크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