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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42화 (42/249)

#42화

황비서에게 노정환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진웅이 몇 번 연락이 왔지만, 아직은 회사 임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설득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언질만 주었다.

세 기업들의 투자자가 노정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은 급하지 않았다.

노정환은 계약 직전까지는 가지만 실제 계약까지는 하지 않는다.

계약 직전까지 시간을 끌며 기업의 기술과 투자 정보에 대한 정보가 목적이다.

투자자들 모집이라는 명분으로 기업에서도 노정환을 의심하지 않고, 노정환은 계약서를 갖고 투자할 사람들을 모은다.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적은 금액의 수익금을 주고 신뢰를 얻으며, 나중에 들어온 투자자들은 선례를 믿고 투자를 맡기게 된다.

1920년대 찰스 폰지의 사기 방식에서 유래된 ‘폰지 사기’를 한국에 알린 것이 바로 노정환이었다.

흥신소에서 일 처리를 꼼꼼하게 했는지 황비서가 들고 온 서류뭉치가 꽤 두터웠다.

“인천 안에서 서울에 근접한 노석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노정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정환도 그 빌라에 살고 있구요. 대표님께서 만났던 곽진웅이라는 자는 노정환은 아니고 노정환의 수하인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노정환이군. 그리고 진웅은 노정환은 아니고 그의 수하였지만.

오가는 사람이 수십 명은 넘었던 것 같은데 그게 다 노정환 일당이라는 것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황비서가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서류에는 다섯 명의 사람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노정환입니다. 최근 십 년 동안 성형수술을 다섯 번 진행했다고 합니다.”

“다섯 번? 흥신소에서는 어떻게 안 거야?”

“전과자 신분으로 성형수술을 진행해줄 곳을 찾는데 의뢰한 곳이 이 흥신소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흥신소에서 쉽게 정보를 말해줄 리는 없을 텐데?”

황비서가 빙긋 웃었다.

“대표님이 주신 활동비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에릭이 감탄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황비서는 정보를 찾고, 내부적으로 해줄 일들이 많기 때문에 얼마 전 활동비 명목으로 2억 원이 들어있는 계좌를 줬다.

주면서도 황비서가 쓰긴 하려나 싶었는데 흥신소에 의뢰하는 데 썼을 줄이야.

황비서의 배포에 놀랐다.

“잘했어. 활동비 10억 입금해 놓을 테니 지금처럼 필요한데 써.”

“네. 그리고 빌라 사람들은 노정환에 대해서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두 명 정도가 잠깐 언급했는데 거의 교주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노정환의 직속 부하들인 것 같고, 각자 고용한 사람들이 있어서 정보나 투자자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황비서의 말을 듣고 에릭을 바라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3개의 투자처 모두 놓칠 수는 없어.”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직 투자할 회사에서 계약한 게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없어. 계약서도 받지 못했고. 노정환은 전과자니까 자기 명의로 빌라에 살고 있지는 않을 거야. 지금 얼굴도 다르고.”

고민을 하고 있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황비서에게 물었다.

“노정환도 빌라에 살고 있다고 했지? 건물 밖으로 나온 거야?”

“네. 딱 한 번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캐리어?”

“네 꽤 큰 크기였는데 차 트렁크에 싣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몸만 왔다고 합니다.”

캐리어라.

짐작 가는 게 있긴 하다.

노정환 일당은 돈이 없는 투자자들에게는 현물도 받았다고도 하는데, 그 중엔 밀매품도 섞여 있었다고 들었다.

돌아올 땐 빈손이었다면 그게 밀매품이라는 건데..

여러 곳에서 사기를 치고 있는 모양이다.

“현재 투자 진행하는 곳은 내가 말했던 곳 말고 더 있어?”

“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계약한 곳은 없습니다. 기업들은 모두 투자자에 대해서 쉬쉬하고 있구요. 수법은 모두 비슷해 보입니다.”

“계약서와 증언이 필요한데…. 노정환이 살고 있는 호수는 알아?”

“네. 409호입니다.”

“아무래도 이서현과 만나봐야겠어.”

“이서현은 누구예요?”

“한국컴퓨터 공동대표. 에릭, 너도 같이 가자.”

에릭은 외환위기가 닥친 한국에서 나를 돕겠다며 미국 일정을 미루고 있었다.

황비서가 처리하기엔 큰 건들은 에릭이 바쁜 나를 대신해 종종 맡아주니 확실히 도움이 됐다.

에릭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연락을 하자 서현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대표님. 옆에는…?”

“에릭 장입니다. 서대표님 밑에서 일하고 있어요.”

“네. 반가워요. 저는 이서현이라고 합니다. 그.. 저번에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표정을 보고 중요한 사안이라고 눈치를 챘는지 서현은 별 말하지 않고 안으로 안내했다.

서현의 집무실은 실질적인 희원의 집무실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갖출 건 모두 있었다.

나와 에릭이 집무실에 들어가자 서현이 문을 잠갔다.

“중요한 얘기인 거죠?”

“네. 맞습니다.”

나에게도 중요한 투자처이지만 서현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소파에 앉아 노정환의 사기 수법과 곽진웅이 그의 수하라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말해주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던 서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렇게 좋은 조건을 내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서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회사가 사기행각을 벌인다는…. 큰 누명을 덮어쓸 뻔했네요.”

에릭이 황비서에게 받은 자료를 내밀었다.

“이게 그 자료예요. 실증은 없지만 한국컴퓨터가 받은 제안과 사기를 당했던 다른 기업들이 받은 제안이 비슷해요. 노정환과 같은 빌라에 살고 있다는 정보도 있구요.”

“아, 네! 제가 잠시만 이 자료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복사본이니까 가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서대표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서현은 서류를 품에 안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에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잘 해결될까요?”

“어차피 노정환이 실제 계약까지는 안 가. 계약은 우리가 하게 될 거야. 문제는 내가 지분을 어디까지 확보하는가지.”

한국컴퓨터의 실질적인 대표, 희원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온 것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 서대표님. 안녕하세요.”

곧장 내가 준 자료를 본 것 같았다.

반응을 보니 내 말을 다 믿는 것 같고.

난 그런 그를 향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장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서현이에게 주신 노정환에 대한 자료는 읽었습니다…”

“저번처럼 쫓겨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쫓, 쫓겨나다니요. 제가 언제….”

“긴장하신 것 같아서 농담한 겁니다.”

“아…하하….”

희원이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희원의 머릿속은 많이 복잡할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회사를 말아먹을 뻔했던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까.

뭐, 큰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도 들 테지만 동시에 예정된 투자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이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한국 컴퓨터에 노정환이 1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했었기에 내쳤던 수많은 투자 제안들도 하나둘 떠오르고.

어쨌든 한국컴퓨터의 사람들에겐 이 사실을 말해줬고, 이제 월드뱅크와 새인산업 대표를 만나 사기당할 뻔했다는 걸 알리고 노정환을 잡아넣어야 한다.

“제가 잡아넣겠습니다.”

“네?”

“곽진웅을 비롯한 노정환 잡아넣겠다구요”

“네..?”

“그러려면 장대표님이 도와줘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곽진웅이 준 투자 계약서랑, 공유한 기술서들 그리고 증언해주시면 됩니다.”

열정을 불살랐던 회사가 자신의 한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날아갈 뻔했다는 생각에 희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증언이라는 말에 법적 조치까지 취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필요한 서류들은 지금 바로 드릴게요. 그리고 증언은….”

목소리가 작아지며, 희원은 말을 얼버무렸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희원 씨가 불리한 증언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리한 증언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강빈의 말을 들은 희원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강빈의 덕으로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곽진웅이나 노정환과의 계약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여 회사에 피해가 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필요한 서류들 갖고 올게요.”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시죠. 어차피 서류 챙기고 곧바로 경찰서에 가야 됩니다.”

“저는 가지 않아도 되나요?”

“서현 씨도 같이 가시죠.”

다 같이 일어났다.

노정환을 감방에 넣을 준비는 다 되었다.

확보된 실증으로 현장을 덮치기만 하면 끝난다.

희원도 속을 뻔했다는 분노가 이제야 치미는지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

“한 달 뒤에 뜰 거니까 서류들 잘 챙겨.”

“알겠습니다. 형님.”

지어진 지 20년이 넘었다는 빌라의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남자의 방은 꽤 화려했다.

벽을 허물어 몇 개의 방을 하나로 합친 것처럼 크고 넓었다.

대리석으로 깔린 바닥 위로 회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조화된 가구들이 조화롭게 배치됐다

남자는 갈색빛을 띠는 소가죽 소파에 앉아 방 한켠에 자리 잡은 고급스러운 빛깔의 도자기들을 바라봤다.

도난당했다고 알려진 추상 미술계의 거장 김환기의 붉은색 점화 한 점도 유리 진열장 안에서 보관되고 있었다.

넓은 이마에 축 처진 눈썹, 온화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으로 알려진 노정환이다.

“에릭이라는 놈은 어떻게 됐어? 거의 넘어왔다며.”

“그게…. 자꾸 회사에서 의견이 안 맞는다고 뻐기고 있습니다. 지분을 올릴 수도 없고…. 차라리 투자금을 낮춰버릴까요?”

노정환이 혀를 찼다.

노정환이 볼 때 에릭이라는 사람은 운 좋게 투자회사를 물려받은 애송이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곽진웅이라는 놈은 더 했다.

생각이 단순하고 자신이 준 대본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자신의 뒤통수를 때릴만한 깜냥도 없어서 데리고 있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멍청한 새끼야. 지금 조건도 충분히 낮춘 건데 거기서 더 낮추면 오히려 의심하지. 미끼를 던졌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게 장사다.”

“조금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다른 투자자들은? 골프장 가서 접촉한 애들 많다며.”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서해물산 지회장이 계약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중으로 돌려야 되니까 차명으로 돌리는 거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며 노정환은 눈앞에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강빈이 접촉했던 새인산업, 월드뱅크뿐만 아니라 수십 개가 넘는 기업들의 기술서와 계약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넉 달 전 2년 동안 작업했던 기업들을 끝내고 모은 돈이 천억 원이 넘었다.

노석 빌라로 거처를 옮긴 뒤 투자자들을 모아서 지급 받은 돈만 500억 원이 넘었다.

게다가 돈 대신 받은 밀매품들의 암시장 시세까지 생각하면 그 이상이었다.

진웅이 계약하기로 한 서해물산 지부장만 해도 7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코도 좀 높여달라니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성형수술을 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외환위기 때문에 돈이 급한 기업들이 많았다.

노정환은 사기꾼에게 이만한 시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미리 매수해두었던 경찰관 중 한 명이었다.

“형님! 저 오경장입니다. 지금….”

삐용삐용!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댔다.

요란한 소리를 봐서는 한두 대가 아니었다.

“뭔 소리야! 나가 봐, 빨리.”

다급한 노정환의 말을 듣고 진웅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경찰찹니다! 한 대… 두 대… 계속 와요! 형님, 빨리 도망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씨….”

노정환이 있는 건물은 4층.

창밖으로는 다섯 대가 넘는 경찰차가 도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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