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마 지금쯤이면 진태도 기부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굳이 찾아가지는 않았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한 선물 중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선물일 것이다.
꽤 큰 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를 볼 일은 아니었다.
진태라는 투자처는 어떤 기업에도 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받는 투자금은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돈이야 얼마든지 다시 벌 수 있으니까.
출장을 끝내고 온 황비서가 피곤한 기색으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포트폴리오에 적힌 기업들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이번에 조사해온 게 30개가 넘었지? 고생했어.”
“아닙니다. 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 전, 황비서에게 지금 시기에 올랐었던 기업들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넘겼었다.
황비서가 조사해 온 자료들은 꽤 상세했기 때문에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현재 주가들을 보니 이미 내가 생각했던 상한가에 근접한 주식들도 꽤 보였다.
아직 발전 가능성이 남아있는, 최소 10배 이상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들을 골라야 했다.
“새인산업과 월드뱅크는 상장하지 않은 건가?”
“네. 월드뱅크는 내년 초 상장할 예정이고, 새인산업은 아직 상장할 예정이 없다고 합니다.”
94년 설립된 새인산업은 곧 PC 통신 접속 프로그램인 ‘새인데이터맨’을 개발해서 벤처기업대상을 수상할 기업이다.
영화배우 김중현이 5000만 원으로 이 회사의 지분을 사들여 몇 년 뒤에 100억 원이 넘는 금액에 회사에 지분을 넘겼다는 것이 기사화되어서 기억이 났다.
김중현이 지분을 샀다고 하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뒤였으니, 지금 사두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월드뱅크는 인터넷을 보면 돈을 준다는 광고로 유명해진 회사였다.
아직 상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곧 있을 상장 이후 순식간에 단기급등을 하는 회사였다.
제대로 된 수익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만 바꾸며 돌려막기를 하다가 결국 2009년에 상장폐지를 했었다.
두 회사 모두 100억 원 이상은 투자하기 힘들 텐데….
자료를 넘기다 한 기업이 눈에 띄었다.
“한국컴퓨터 주가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400원?”
“확실합니다. 400원이 맞습니다.”
한국컴퓨터.
한국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장악한 기업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3.1을 발매한 이후, 세계의 워드프로세서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가 장악했었다.
하지만 워드는 한국어 지원이 부실했고, 이를 노린 한국컴퓨터는 HWP 포맷을 개발해내며 한국의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2000년대 초반 내가 기억하는 주가만 해도 8만 원이 넘었던 것 같은데 400원이라니.
“새인산업, 월드뱅크, 한국컴퓨터. 세 기업 대표들이랑 미팅 잡아. 한국컴퓨터는 시장 풀린 거 싹 다 매수하고.”
“알겠습니다.”
외화는 재투자와 태선 재단에 기부해서 거의 다 썼지만, 아직 원화가 남아있었다.
GB택배와 행복홈쇼핑, MP3사업 등 아직도 쌓여있는 돈이 꽤 있다.
그리고 그 돈들은 이제 10배 넘게 덩치를 불린 뒤 돌아올 것이다.
***
새인산업의 건물로 들어가자 프론트에 서 있던 여직원이 밝게 맞이했다.
“서강빈 대표님이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직원을 따라 가장 안쪽에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네.”
여직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30대가 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가 일어나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서대표님. 대표 백승진입니다. 우선 앉으시죠.”
“네. 백대표님. 반갑습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신문 봤습니다 서대표님. 천만 달러를 기부하셨다고요….”
“하하. 나라가 힘든 때니까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승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분이 있어 기분이 좋네요.”
“서대표님 같은 분이 나라에 많이 있어야 될 텐데요. 하하.”
승진이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어서 말했다.
“투자를 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새인산업은 비상장기업으로, 사실상 승진의 개인회사나 다름없었다.
새인산업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승진에게서 기업의 지분을 산다는 것이다.
“그 전에 제가 먼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까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승진이 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하하… 사실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회사가 굴러갈 돈만 있으면 되니까요.”
말을 돌리려는 낌새가 보이자 내가 말했다.
“저는 지분 30프로를 원합니다. 그리고 100억 원을 투자하겠습니다.”
승진의 표정이 굳었다가 풀렸다.
“100억 원이면 저희 회사의 상황을 타개할만한 투자금이군요. 대표님의 제안 나쁘지 않지만,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 투자자가 있습니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 투자자?
새인산업은 아직 주목받지 못한 비상장기업인데?
100억 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도 몇 없을 건데 지금 시점에서 그만한 금액을 굳이 새인사업에 투자한다니.
나야 미래를 알고 있으니 하는 투자인 거고.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서대표님이 제시하실 최대 조건만 말씀해주십시오.”
뭔가 숨기려는 듯한 모습이 보였지만 우선 승진의 의도에 맞춰주기로 했다.
“25프로가 최대입니다. 그 이하는 안 됩니다.”
10프로만 가져가도 이득이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이 회사의 현재 가치를 따졌을 때, 100억 원도 되지 않는다.
100억 원을 투자해 25프로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승진의 입장에서도 전혀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승진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투자는 다른 분한테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의 조건은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서대표님께서 제시하신 조건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00억 원의 투자금 거절이라….
어차피 승진이 지분 100프로를 다 갖고 있을 테니 25프로가 큰 지분도 아닐 텐데, 무엇인가 수상했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승진이 거절할 것 같으니 우선 자리를 뜨기로 했다.
“우선 알겠습니다. 혹시 다른 생각이 주시면 연락 주세요.”
“네. 먼 길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승진에게 명함을 건넸다.
승진은 명함을 받기는 했지만 바로 확인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연락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새인산업의 건물을 나오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월드뱅크도 결과가 비슷했다.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투자자의 조건을 말하지 않으면서 내가 제시한 조건을 거절했다.
“사실 서대표님과 미팅을 잡은 것도 태선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거절했다고 너무 나쁘게 보지 말아주십시오.”
심지어 대표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최근 신문에 태선을 살린 막내, 서진태가 가장 아끼는 손자 등 거창한 수식어로 각종 헤드라인을 장식했기 때문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한국컴퓨터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컴퓨터는 몇 년 전 주식상장을 했기 때문에, 자사주의 일부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투자를 제시했는데 거절당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건물을 나오는데 한 사람이 나를 따라 나왔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20대 여자였다.
“서대표님! 잠시만요.”
“누구시죠?”
“저는 한국컴퓨터의 공동대표 이서현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태선 창립기념일에 잠깐 마주쳤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아,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기억납니다.”
무대에서 내려오고 잠깐 마주쳤던 것 같기는 한데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공동대표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내가 알던 정보가 잘못된 건가?
“그런데 한국컴퓨터에 대표가 두 명이었나요?”
“음…. 명목상으로는 공동대표이긴 한데 대부분 결정권은 희원이가 갖고 있어요. 지분도 거의 1대 9로 나눠 갖기로 했구요.”
명목상으로 공동대표라… 이쪽을 설득해 볼까 했는데,
투자를 수락하고 말고의 위치는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러시군요. 이미 저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입니다.”
서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사실 저는 서대표님한테 투자를 맡기고 싶었거든요. 다른 투자자가 내건 조건이 의심스러워서… 그런데 희원이가 무언가에 씐 것처럼 다른 투자자를 고집하고 있어요.”
서현은 자신의 회사가 위험에 빠진 것처럼 푸념했다.
“혹시 그 투자자가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 희원이는 말하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한국컴퓨터뿐만 아니라 다른 두 기업에도 다녀오는 길인데 다 똑같이 거절을 하더군요. 저는 납득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말입니다. 무언가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서현이 고개를 떨궜다.
“그럼… 서대표님이 듣고 판단해주세요. 그 투자자가 투자금으로 100억 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어요. 주식 지분에 따른 임원해임권은 온전히 저희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까지 작성하면서요.”
100억 원을 투자하면서 경영권을 포기한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대가는 어떻게 받기로 했습니까?”
“.... 자사주의 10프로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서현의 말에 코웃음이 나왔다.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타트기업에 100억 원을 투자하면서 전체 지분도 아닌, 고작 자사주 지분의 10프로만 양도받는다?
심지어 현재 한국컴퓨터의 시총은 100억 원도 안 된다.
자선사업가가 아니고서야 이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다른 대표님은 왜 의심하지 않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인 겁니까?”
“그 투자자가 말했을 때는 아귀가 다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저한테 설명을 할 때면 애가 말을 잘 못 해요.”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럴듯하게 말하며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것.
대화가 끝난 후 상대방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애초에 껍데기뿐인 말들이니까.
“우선은 제 부탁으로 보류 중이에요. 희원이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것 같긴 하지만요….”
“그 보류. 일단은 계속해서 유지시켜 주세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서대표님이요?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새인산업과 월드뱅크의 조건은 듣지 않았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좋은 조건과 높은 투자금의 거절한 이유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조리 같은 수법이라면 범인은 한 명 혹은 하나의 조직이다.
‘그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든 제 알 바 아니지만, 제가 원하는 걸 훔치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지분을 갖고 있는 서현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고 포장해서 말했다.
“제가 투자하려는 회사가 어려움에 처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모르는 척하겠습니까. 제가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