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1996년 12월 12일 20시.
대한민국은 OECD에 29번째로 가입한 나라가 되었다.
선진국의 경제 사랑방으로 불리는 OECD에 가입했다는 소식에 언론은 앞으로 급변하는 세계상황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며 일제히 환호했고
대통령 역시 위대한 출발이라며 세계질서를 창출하는 주도국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하겠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냈다.
하지만 기업들의 수출주도를 위했던 고환율정책은 무너졌다.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었고, 나라는 경제주권을 잃게 되었다.
책임은 고스란히 나라를 먹여 살리던 대기업 탓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정경유착 의혹에 벗어나기 위해 대기업들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압수수색 명령까지 해가면서.
태선그룹에게도 당연히 화살은 날아왔지만,
어디 쉬운 회장과 그룹인가.
진태는 예상했다는 듯 발 빠르게 대처했고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에릭이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늘 나를 보면 반기던 녀석인데, 오늘은 왠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그래. 에릭 오랜만이야. 모습을 보아하니 공항에서 바로 왔나 보네?”
“네. 임기사님이 데리러 와주셨어요. 대표님 얼굴 보고 호텔로 가려구요.”
“그래. 미국 생활은 어때?”
“시애틀이야 뭐. 제 고향인데요. 가족들과도 자주 볼 수 있고 좋아요. 그보다… 정말 금융위기가 왔네요.”
“예정되어 있었던 거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
에릭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자, 나도 소파로 몸을 옮겼다.
에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것과,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건 다르잖아요. 훨씬 심각한 상황이네요. 그보다 태선그룹은 어떻게 됐어요?”
“전에 말했던 대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기로 했어. 적어도 20프로는 회사를 관둬야겠지….”
“아마 팀 단위로 해체될 테니까요. 대표님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면 저도 지금쯤 일반 회사에 들어가서 불안에 떨고 있겠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에릭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었을 거야. 네 실력이 있는데 누가 감히 자르려고 하겠어?”
“히, 모르는 일이죠. 그보다 대표님은 괜찮겠어요?”
“뭐가?”
“결국 대표님의 조언을 시작으로 구조조정이 시작된 거니까요. 나가는 사람들에 마음이 편치는 않으실 거잖아요.”
에릭이 하는 말이 뭔지 잘 안다.
구조조정은 실행하는 사람도,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아니어도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야.”
“....”
“그건 그렇고, 요새 미국 쪽 상황은 어때?”
“원래 투자했던 애플, 스타벅스, 아마존닷컴은 주가가 예상하신 대로 계속 치솟고 있어요. 크리스맨뱅크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주식 이야기가 나오자 에릭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내가 추가로 보내고 있는 투자금들은?”
“새로 뽑은 직원들과 분석한 기업들에 넣고 있어요. 수익률은 30프로가 조금 안 되네요. 하하.”
에릭에게 추가로 투자금을 보낸 지 반년이 채 안 지났다.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에릭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대단한데?”
“대표님이 이룬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니야. 그 정도만 해줘도 내 기대 이상이야. 많이 바빴겠는데?”
“하하. 조금요. 그리고 접촉 중인 몇 기업들은 곧 상장할 예정이에요. 제가 나중에 자료 드릴 테니 대표님도 보시고 의견 주세요.”
상장도 하지 않은 기업들까지… 고군분투했을 에릭을 떠올리니 조금 안쓰러웠다.
“제프랑 미쉘은 어때. 최근에 만난 적 있어?”
“아뇨. 미쉘도 제프의 일을 돕는다고 바쁘고, 저도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안 본 지 몇 달은 됐을걸요?”
“무리하지 말고 가끔은 쉬어. GB로지스틱스 쪽은 어때? 픽앤픽 매출이 늘어난 것은 들었고, 아마존닷컴과도 계약했었잖아.”
미국 전역을 담당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지만, 몇 달전, 시애틀 근방을 거점으로 GB로지스틱스가 일부 맡기로 계약했었다.
“네. 픽앤픽은 무난하게 잘 진행되고 있고요. 아마존닷컴도 이제 완전히 상용화가 돼서 매출이 크게 늘었어요. 기타 계약들도 포함해서 물류센터를 추가로 지을만한 자금이 확보됐구요. 마지막으로 보고드렸던 매출이 2억 달러였죠?”
“지금은 더 늘었겠네. 바로 운용할 수 있는 돈은 얼마나 되지?”
“음…. 적어도 2000만 달러 이상이에요. 추가로 지을 물류센터 부지도 뽑아왔으니까 대표님도 보시고 결정하면 될 것 같아요.”
“그 돈은 쓸 데가 있어.”
에릭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네? GB인베스트먼트 쪽으로 돌리시게요?”
“아니. 기부할 거야.”
“기부요?”
에릭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조조정에 천만 달러를 지원하고 남은 천만 달러는 국가 부채를 갚는 데 기부할 거야.”
“대표님… 지금 환율은 믿을 수 없지만 이천만 달러면 대충 계산해도 300억 원은 넘어요. 게다가 지금 달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에릭의 말대로 IMF의 구제금융 이후 환율은 폭등하고 있었다.
벌써 1달러당 1500원을 넘겼다.
팔 수 있는 물건도 없는데 환율은 미친 듯이 올라가니 기업들은 절망에 빠진 상황이었다.
“한국이 망하면 내가 설 곳이 없고, 태선이 망하면 내 집이 없는 거야. 2000만 달러 바로 송금해.”
나를 그렇게나 신뢰하던 에릭조차 이번에는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2000만 달러는 엄청난 금액일 테니까.
에릭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내 선택을 믿는다.
나라 경제를 살리겠다고 너도나도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던 시기다.
이럴 때일수록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더욱이 분노하고 욕하는 시기이다.
어차피 기부할 거라면 그중에서 제일 많이 내서 사람들의 인상에라도 남기는 게 낫다.
어중간한 기부는 티도 안 나고 얻는 것도 없을 테니까.
“네, 대표님. 알겠어요.”
에릭이 작게 답하며 방을 나갔다.
에릭의 말처럼 이천만 달러를 다시 GB로지스틱스에 투자한다면 내 자산확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지금의 위기를 외면한다면 내가 사업을 시작한 진짜 이유가 퇴색된다.
나는 이번 기부를 통해 태선에서의 확실한 입지를 확보할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 대구, 그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대구는 구한말 일제의 경제 침탈로 나라가 도산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우리 손으로 해결하자며 민중이 일어선 곳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광문회를 이끌던 서씨와 김씨가 불씨를 지폈습니다.”
TV를 켜자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열린 뒤 점차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국채 보상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중심에 서민이 있다는 점입니다.”
리포터가 한 시민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어떤 기분으로 금을 내놓았습니까?”
시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나라니까요.”
금모으기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당시 나라의 부채를 갚기 위해서 의연금을 낸 이들의 대다수는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었다.
부녀자들도 자신이 아끼던 패물을 내놓으며 기부행렬에 동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남일동에서 결성된 ‘패물폐지부인회’는 애지중지하던 은장도, 은비녀, 은가락지 등을 내놓으며 전국의 여성들이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지금은 시작할 단계에 불과하지만, 몇 달 뒤에는 225톤이 넘는, 약 21억 70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이 모이게 될 것이다.
***
이제야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들이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기 시작했다.
태선그룹의 각 계열사 앞에서도 사람들의 농성은 끊이지 않았다.
채규가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그래도 먼저 스타트를 끊어서 다행입니다. 미리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강빈이 말을 안 들었더라면 말이야. 그보다 쉬는 날에 무슨 일이야?”
채규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진태에게 보여주었다.
태선재단 측에 강빈의 이름으로 100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내역이었다.
“이게 뭔데? 천만 달러?”
“네. 강빈 군이 저번 구조조정을 통해 해고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지급하라고 전달하더군요.”
진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0의 개수를 다시 세었으나 분명히 0이 7개, 천만 달러였다.
“강빈이가 이런 돈이 어디 있어? 그보다 달러라니, 그놈 미국회사 치워버린 거야?”
“아닙니다. GB인베스트먼트 쪽은 계속해서 자금을 돌리고 있는 중이고, GB로지스틱스 측에서 얻은 수익의 절반라고 합니다.”
한참 태선에 일이 터지니 강빈의 회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런데 천만 달러라니, 게다가 전체 수익도 아니고 절반이라니.
“그뿐만 아닙니다.”
“왜. 뭐가 또 있어?”
“아까 천만 달러가 수익의 절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채규가 서류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
“강빈 군과 태선 재단의 이름으로 국가 부채를 갚는 데 천만 달러를 더 기부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를 놀리냐?”
감히 누가 태선그룹의 서회장을 놀리겠는가.
채규는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섬찟했을 그 말이 진태가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계열사들은 자식들에게 운영을 넘겨줬지만, 태선 재단만큼은 진태가 쥐고 있었다.
태선 재단의 기부는 곧 진태 자신의 기부라는 뜻이다.
“늘그막에 막내 손자 놈이 기쁨을 주는구나. 다른 자식 놈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다들 상황 아시잖습니까. 재무팀이 각 계열사 경영 상태 분석해서 이익이 되지 않는 기업, 부서들 싹 다 정리했답니다. 주력 사업 빼고는 죄다 갈아엎었으니 정신이 없을 테죠.”
“쯧…. 물려받은 계열사도 없는 손주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전자고 물산이고 좋은 건 다 물려받은 놈들이 가만히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태도 태선그룹의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구조조정을 미리 하지 않았더라면 1위의 자리가 흔들릴 뻔했다.
“이거 다 언론에 흘려. 광고 몇 개 쥐여주는 거 잊지 말고. 큰일을 한 놈이야. 최대한 띄워서 내.”
“네. 이미 기자들 몇 명 연락해서 제대로 붙이라고 말해두었습니다.”
“하하. 역시 이실장이 빠르긴 빨라. 그보다 이번에도 강빈이 말이 맞았네.”
“하늘이 도와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운이라….”
진태는 자신이 태선을 일으켰던 때를 떠올렸다.
하늘 아래 모두가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지금 강빈을 보면 젊었던 자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