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집무실의 TV로 검찰청을 나가는 진태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진태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태에겐 글쎄.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달칵.
황비서가 책상 위로 커피를 올려다 놓으며 말했다.
“홍해성 사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서영만 사장 관련인가?”
황비서가 내 책상 위로 커피를 올려다 놓으며 말했다.
행복홈쇼핑 채널은 나날이 시청자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첫 방송 이후 제품의뢰가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고, 수수료도 30프로까지 올렸다.
신규 홈쇼핑 채널도 이제 곧 개국되긴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독과점 사업이다.
“네. 수수료로 월납액의 400프로에서 500프로에서 올리는 대신, 계약종료까지 다른 보험사와는 계약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열을 올리더니 홈쇼핑의 위력을 깨달은 것 같다.
“픽앤픽 쪽은?”
“최희수 대표에게 받은 자료로는 픽앤픽은 꾸준히 매출상승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 쪽으로도 진출했는데 아직까지는 저조합니다. 기존에 있던 기업들의 강세가 원인으로 보입니다. 중국 시장을 상대로 인재를 영입하고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다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픽앤픽은 중국 상해에서 현지화 전략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 이끌고 있으니 굳이 픽앤픽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보였다.
중국 시장 쪽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전담 계약을 통해 GB로지스틱스의 중국진출도 더 수월해질 것이다.
“에릭 총괄은 어때?”
에릭의 직급은 공식적으로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 운영지원 총괄이지만 사실상 GB인베스트먼트와 GB택배, 두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며 보고를 듣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것과는 다르다.
황비서가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말했다.
“현재 GB택배 측에 지시해 운영관리자를 뽑아서 운영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픽앤픽을 비롯해 추가로 계약한 회사들을 관리하고 계십니다. GB인베스트먼트에선 담당 업무 관련 별로 직원을 채용했습니다. 자세한 사항들은 간소화해서 보고서로 따로 드리겠습니다.”
역시 에릭.
투자뿐 아니라 경영에도 재능있다.
중견증권사에 불과했던 뱅가드를 톱 반열에 올려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애플은 곧 스티브 잡스가 복귀할 것이고, 아마존은 상장한 이후에 주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채규였다.
“이실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요. 강빈 군. 다름이 아니라 회장님께서 강빈 군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 찾아뵐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 말은…”
“네. 오늘 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연락이 온 이유야 뻔했다.
***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오랜만이구나. 우선 앉거라.”
진태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참고인 조사는 잘 끝나셨습니까.”
“태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야.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태선이 이 일에 무너질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진태가 말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 게다.”
“한성사태 때문 아니십니까”
“그래. 네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꽤 큰 피해를 봤을 게야. 네 덕이다.”
전생에서 진태는 한수와 진행하려 했던 공동 투자.
그대로 진행되었다 해도 진태라면 투자금도 회수하고 어떻게든 태선을 살려냈을 것이다. 하지만 태선의 위상은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테고 진태 역시 참고인 조사만으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태는 나에게 빚을 졌다.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다행입니다.”
“말하거라.”
한 마디였지만 진태가 말하는 의도를 알아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뭘 원하든 다 들어줄 것 같은 진태의 한 마디.
다른 사람이 했다면 몰라도 진태라면, 정말로 뭐든 말하는 대로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진태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그룹에다가 제 욕심만 채우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 급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으로 끝날 이야기를 좀 더 길게 가져가고 싶었다.
진태가 내게 빚을 졌다는 그 사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지금 당장은 태선의 안위에만 신경 쓰겠습니다.”
“태선이 이딴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냐?”
“저도 태선 사람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진태가 책상을 치고 껄껄대며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미소를 짓고 내게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밖으로 나돌며 회사를 차리긴 해도, 태선은 걱정하는구나.”
밖의 일도 하지만 태선에도 관심이 있다는 걸 한번 각인시켜 드렸고.
“회장님. 회장님 말씀대로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가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니까요.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다음?”
“기업은 자신의 배만 채우고 정부는 그저 뒤에서 쉬쉬 모른 척만 합니다. 내실 공사가 엉망인데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재계 서열 11위의 오정그룹 역시 지금 부도 위기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기업이나 정부나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그 때문에 부도유예협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한성그룹이 부도가 나고 재계 서열 11위 오정그룹마저 부도를 내자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은행은 부도유예협약을 도입했다.
협약 내용은 주거래은행이 채권단 회의 소집을 통보한 날로부터 2개월까지는 해당 기업의 어음이나 수표를 돌려도 부도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일어날 기업은 애초에 위기에 놓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대기업들도 도산되는데 태선도 말려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견기업들의 부도와 달리 대기업의 부도는 은행과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차원이 달랐다.
재무구조가 탄탄했던 최고 은행이 한성그룹의 부도로 순식간에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른 방안이라도 있는 것이냐?”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몇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조만간은 일어날 일이었다.
“표정을 보니 있는 모양이구나. 말해 보거라.”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내가 먼저 말하고 보다 빠르게 대비해야 되는 일.
“주제넘은 말이지만…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진태의 표정에 일순 의아함이 스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의 한국에선 구조조정은 생소한 것이니까.
경영의 실패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구조조정이라니.
하지만 지난 삶, 이 시기를 겪으며 잘려 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봤었다.
“네가 하는 말은 지금 태선이 틀렸다는 게냐?”
“태선이 아니라 시대가 틀렸습니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은 태선그룹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게 될 겁니다.”
“국제통화기금? 너 설마 IMF를 말하는 거냐?”
IMF 사태.
내가 겪어오고 발버둥 쳤던 시기인데 모를 수가.
IMF 구제금융은 한국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으니까.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다면 재정 긴축, 시장 개방, 민영화… 경제 신탁통치로 불릴 정도로 경제정책의 주권이 사라지게 된다.
“제가 회장님께 말한 것 중 틀린 것이 있었습니까.”
“태선의 운명을 네 감에 맡길 수는 없다.”
진태의 표정은 더없이 확고해 보였지만, 외환위기를 겪게 되면 방금 같은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삶 외환위기가 터지고 세 달 뒤, 전자와 금융업을 제외하고는 어떤 회사도 처분해도 좋다, 라고까지 말했으니까.
실제로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한 것은 분명했다.
“은행이 대기업들을 상대로 대출 규제를 실행하고 한국의 위기를 느낀 외국 투자자들이 손을 떼기 시작하면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차피 맞을 매를 미리 맞자는 게냐.”
진태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부채비율을 단번에 줄일 수 있고 태선 스스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채비율을 줄인다면 매출도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수익은 줄어든다.”
“지금의 부채비율이 비정상적인 겁니다. 회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가꾼 태선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초반 태선그룹의 총 부채비율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상은 물론, 세계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었다.
지금의 태선도 이와 같았다.
진태가 내세운 기업이념을 바탕으로 한 태선.
사실 그 어느 기업보다 탄탄한 그룹이다.
그러니 더욱 구조조정을 빠르게 시작해 어차피 일어설 그룹
그냥 작게 생채기 나는 정도에서 끝나야 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1년 전만 해도 방금 네가 한 말을 무시했을 거다. 아니,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그랬겠지.”
“이해합니다. 회장님께서 살아오신 세월이 있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한수와 공동 투자를 진행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너를 믿지 않았지.”
“그래도 나중에 믿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손해를 보고 말이야. 이번에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구나.”
진태가 고민해 빠졌는지 한참 말일 없었다.
탁자에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결정을 내린 진태의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네 말대로 해보마. 다음 주에 있을 임원 회의를 통해 구조조정을 실행하마.”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 회사의 일을 내가 하겠다는데 왜 네놈이 감사한 거냐? 하하.”
“또 있습니다.”
“해보거라.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았나 보구나.”
“제가 제안했던 일인 만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구조조정 과정 중에 정리해고를 당하는 직원들도 많을 겁니다.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내놓겠습니다. 회장님의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것이 내가 직업을 잃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위선이었다.
진태의 표정이 또 한 번 날카롭게 변했다.
“내 사람을 네가 챙기겠다? 몇천 명, 몇만 명이 갈릴지 모르는데?”
“반대하시진 않는군요.”
진태가 호방하게 웃었다.